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세대학교/역사 (문단 편집) == 제중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효시는 1884년 [[갑신정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등의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최측근 [[민영익]]은 정변 중 개화파 자객에게 피습당해 13번이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다. [[고종(대한제국)|고종 황제]]는 [[독일]] [[외교관]] [[묄렌도르프]]의 추천으로 조선에서 의사, 선교사로 활동하던 [[호러스 뉴턴 알렌|알렌]]에게 민영익의 치료를 맡겼다. 알렌은 민영익의 상처를 서양 의술로 치료하고 민영익을 소생시켰다. 이에 감복한 고종은 알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비단 옷과 부채, 도자기 등을 선물하였는데, 이 때 알렌은 고종에게 병원 설립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이 설립되었다. 고종은 설립 12일 뒤 이 병원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제중원은 '중생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건물, 운영비, 병원 업무를 보조하는 주사 등의 하드웨어를, 미국 북장로회가 의사, 간호사, 일부 운영비 등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일종의 합작 병원의 형태로 운영됐다. 이러한 진료 활동을 통해 서양 의학의 우수성이 널리 퍼졌다. [[1886년]] [[3월 29일]]에는 16명의 학생으로 '제중원의학당'이 문을 열어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이 시작됐다. 알렌이 시작한 최초의 의료 교육은 현재로 따지면 간호사나 간호조무사 등에 해당하는 보조인력 양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의사는 단기간에 양성하는 것이 어렵고 알렌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 별도의 의사 파견을 요청하여 1886년 4월 헤론이 파견되어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하게 된다. 그 밖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윌리엄 스크랜튼[* 1886년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 어머니와 함께 선교를 하러 한국에 왔다.]이 제중원 운영을 도왔다. 알렌은 1887년 9월 주미 한국공사관의 개설을 돕기 위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 알렌은 이미 귀국하기 전에도 의료 교육의 한계에 대해 언급했다. 알렌이 귀국한 후 제중원에서는 헤론, 엘러스, 빈튼 등의 의료 선교사들이 연이어 의료 활동을 폈다. 알렌에 이어 제중원을 운영하던 헤론이 1890년 7월 이질로 급사하자 제중원의 운영에 큰 어려움이 생겼다. 알렌이 시작한 제중원의 의료 교육 역시 헤론의 사망 즈음에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1891년 4월 헤론의 후임으로 빈튼이 부임했으나, 빈튼과 조선 정부간에 커다란 갈등이 생기면서 제중원은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또 미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도 운영에 비용이 드는 제중원을 포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한편 아내가 [[제중원]]의 의사였고, 본인도 제중원의학당에서 기초 과학과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당시 위기에 처했던 제중원이 운영을 지속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언더우드 등 서울지부 선교사들은 조선의 수도 서울에 왕립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선교와 왕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이점을 갖는다고 선교부를 설득했다. 언더우드는 18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캐나다 선교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던 토론토대학교 의학부 교수 올리버 R. 에비슨(O. R. Avison)을 만나 한국행을 권유했고, 에비슨은 1893년 7월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내한하여 제중원에 부임했다. 에비슨과 언더우드는 제중원을 정부에서 독립시키기로 한다. 에비슨은 정부와 오랜 협상을 벌인 끝에 1894년 9월 제중원을 정부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받았다.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으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정국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로써 제중원은 사립 선교 의료기관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정부로부터 독립하게 된 제중원은 에비슨과 언더우드의 긴밀한 협력으로 운영되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 북장로회 선교부 서울지부 소속 선교사들은 미국 선교회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와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는 사립 제중원의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9년 미국 [[클리블랜드]]의 부호 세브란스 씨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아내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이도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의 친형이자 미국의 [[타자기]] 재벌인 존 토머스 언더우드(John Thomas Underwood)와 세브란스 가문이 친구였고, 이런 인맥을 통해 세브란스 씨를 설득하여 거액의 후원금을 받았던 것이다. 세브란스 씨로부터 기증받았던 후원금으로 서울역 앞에 병원을 신축하여 1904년 완공했다. 기증자의 이름을 따 제중원을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칭했다. 1899년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었다.[* 1886년 알렌이 세운 제중원의학당에서의 교육은 1890년경 중단되었다.] 한국에 오기 전 토론토대 의대 교수였던 에비슨은 한국에 올 때부터 이미 의학 교육기관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제중원에 부임했을 때부터 한국인 의료인 교육을 시작했다. 사실 1899년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여기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학생들이 있었고 이들도 모두 1899년 설립된 제중원의학교로 넘어오게 되었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 개원과 함께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서울을 방문한 세브란스 씨가 병원 외에도 학교 시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3만 여 달러를 기부해 의학교 건물을 신축했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1908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면허를 부여받았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로 명칭을 바꾸었고,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다시 교명을 변경했다. 1916년 언더우드 타계 후 세브란스연합의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양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된 에비슨은 두 학교를 동시에 대학 승격을 추진했고, 1917년 전문학교로 인가받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이후 1923년 신교육령에 의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재인가되었다. 교명이 너무 길어서 보통 약칭 세브란스의전이라고 불렀다. 에비슨은 1935년 12월 세브란스의전 교장에서 은퇴했고,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에비슨은 한국에 영구 정착하기 위해 미국 친척들에게 인사하러 간다고 말하고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미국에서 아내가 병을 얻어 끝내 사망했고, 때마침 [[태평양전쟁]]과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그는 결국 영영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