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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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905년 이전까지는 구세학당, 언더우드학당, 예수학당 등 교명을 사용하였음.
  • ** 단, 제중원의 경우 서울대학교병원과 정통성과 관련된 논란이 있음.



1. 개요
2. 제중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2.1. 교명 변화
3. 연희전문학교
3.1. 교명 변화
4. 연세대학교로의 통합



1. 개요[편집]


YONSEI, Leading the Way to the Future

존중하고 존경받는 대학


1885년에 설립된 광혜원(제중원, 세브란스병원의 전신)과 1886년 제중원의학당에서의 의학교육, 그리고 미국인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가 1915년 설립한 조선기독교대학(경신학교 대학부)이 이 학교의 시초이다. 1917년에 조선기독교대학은 연희전문학교로, 광혜원을 모태로 하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이름을 고쳤다. 해방 후 각각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으로 대학 인가를 받아 개교했으며,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의과대학이 합쳐지면서, 두 학교의 머리글자를 따서 연세대학교가 되었다.[1]

2. 제중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편집]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효시는 1884년 갑신정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등의 급진 개화파가 일으킨 갑신정변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명성황후의 조카이자 최측근 민영익은 정변 중 개화파 자객에게 피습당해 13번이나 칼에 찔려 중태에 빠졌다. 고종 황제독일 외교관 묄렌도르프의 추천으로 조선에서 의사, 선교사로 활동하던 알렌에게 민영익의 치료를 맡겼다. 알렌은 민영익의 상처를 서양 의술로 치료하고 민영익을 소생시켰다. 이에 감복한 고종은 알렌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 비단 옷과 부채, 도자기 등을 선물하였는데, 이 때 알렌은 고종에게 병원 설립을 제의했다.

그리하여 1885년 4월 10일 최초의 서양식 병원 '광혜원'이 설립되었다. 고종은 설립 12일 뒤 이 병원에 '제중원'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제중원은 '중생을 구제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건물, 운영비, 병원 업무를 보조하는 주사 등의 하드웨어를, 미국 북장로회가 의사, 간호사, 일부 운영비 등의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일종의 합작 병원의 형태로 운영됐다. 이러한 진료 활동을 통해 서양 의학의 우수성이 널리 퍼졌다.

1886년 3월 29일에는 16명의 학생으로 '제중원의학당'이 문을 열어 한국 최초의 서양의학 교육이 시작됐다. 알렌이 시작한 최초의 의료 교육은 현재로 따지면 간호사나 간호조무사 등에 해당하는 보조인력 양성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여진다. 의사는 단기간에 양성하는 것이 어렵고 알렌은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 별도의 의사 파견을 요청하여 1886년 4월 헤론이 파견되어 알렌과 함께 제중원에서 의사로 활동하게 된다. 그 밖에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와 윌리엄 스크랜튼[2]이 제중원 운영을 도왔다.

알렌은 1887년 9월 주미 한국공사관의 개설을 돕기 위해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귀국했다. 알렌은 이미 귀국하기 전에도 의료 교육의 한계에 대해 언급했다.

알렌이 귀국한 후 제중원에서는 헤론, 엘러스, 빈튼 등의 의료 선교사들이 연이어 의료 활동을 폈다. 알렌에 이어 제중원을 운영하던 헤론이 1890년 7월 이질로 급사하자 제중원의 운영에 큰 어려움이 생겼다. 알렌이 시작한 제중원의 의료 교육 역시 헤론의 사망 즈음에 완전히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1891년 4월 헤론의 후임으로 빈튼이 부임했으나, 빈튼과 조선 정부간에 커다란 갈등이 생기면서 제중원은 존폐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또 미 북장로회 선교부에서도 운영에 비용이 드는 제중원을 포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한편 아내가 제중원의 의사였고, 본인도 제중원의학당에서 기초 과학과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던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당시 위기에 처했던 제중원이 운영을 지속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언더우드 등 서울지부 선교사들은 조선의 수도 서울에 왕립병원을 운영하는 것이 선교와 왕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큰 이점을 갖는다고 선교부를 설득했다.

언더우드는 1892년 미국으로 건너가 캐나다 선교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던 토론토대학교 의학부 교수 올리버 R. 에비슨(O. R. Avison)을 만나 한국행을 권유했고, 에비슨은 1893년 7월 미국 북장로회 해외 선교부 소속 선교사로 내한하여 제중원에 부임했다. 에비슨과 언더우드는 제중원을 정부에서 독립시키기로 한다. 에비슨은 정부와 오랜 협상을 벌인 끝에 1894년 9월 제중원을 정부에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 이관받았다. 청일전쟁갑오개혁으로 이어지는 어수선한 정국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이로써 제중원은 사립 선교 의료기관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정부로부터 독립하게 된 제중원은 에비슨과 언더우드의 긴밀한 협력으로 운영되었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미 북장로회 선교부 서울지부 소속 선교사들은 미국 선교회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와 홀로서기를 시도하고 있는 사립 제중원의 운영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9년 미국 클리블랜드의 부호 세브란스 씨로부터 거액의 후원금을 받아내는데 큰 역할을 했던 이도 언더우드였다. 언더우드의 친형이자 미국의 타자기 재벌인 존 토머스 언더우드(John Thomas Underwood)와 세브란스 가문이 친구였고, 이런 인맥을 통해 세브란스 씨를 설득하여 거액의 후원금을 받았던 것이다. 세브란스 씨로부터 기증받았던 후원금으로 서울역 앞에 병원을 신축하여 1904년 완공했다. 기증자의 이름을 따 제중원을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칭했다.

1899년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었다.[3] 한국에 오기 전 토론토대 의대 교수였던 에비슨은 한국에 올 때부터 이미 의학 교육기관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는 제중원에 부임했을 때부터 한국인 의료인 교육을 시작했다. 사실 1899년 제중원의학교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여기에서 교육을 받아오던 학생들이 있었고 이들도 모두 1899년 설립된 제중원의학교로 넘어오게 되었다.

1904년 세브란스병원 개원과 함께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병원의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1907년 서울을 방문한 세브란스 씨가 병원 외에도 학교 시설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3만 여 달러를 기부해 의학교 건물을 신축했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1908년 제1회 졸업생 7명을 배출했는데, 이들은 우리나라 최초의 의사면허를 부여받았다. 세브란스병원의학교는 1909년 세브란스의학교로 명칭을 바꾸었고, 1913년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다시 교명을 변경했다.

1916년 언더우드 타계 후 세브란스연합의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양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된 에비슨은 두 학교를 동시에 대학 승격을 추진했고, 1917년 전문학교로 인가받아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변경했다. 이후 1923년 신교육령에 의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재인가되었다. 교명이 너무 길어서 보통 약칭 세브란스의전이라고 불렀다.

에비슨은 1935년 12월 세브란스의전 교장에서 은퇴했고, 이듬해 미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에비슨은 한국에 영구 정착하기 위해 미국 친척들에게 인사하러 간다고 말하고 미국으로 갔다. 하지만 미국에서 아내가 병을 얻어 끝내 사망했고, 때마침 태평양전쟁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그는 결국 영영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2.1. 교명 변화[편집]


  • 1886년 : 제중원의학당
  • 1899년 : 제중원의학교
  • 1909년 : 사립 세브란스의학교
  • 1913년 :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교
  • 1917년 :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 1923년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인가
  • 1942년 : 아사히의학전문학교[4]
  • 1947년 : 세브란스 의과대학
  • 1957년 : 연세대학교로 통합


3. 연희전문학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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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립 이관: (평양공업전문학교)




1885년 조선에 입국한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는 조선에서 개신교 선교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한국인 교육 발전에 힘써왔다. 선교사로 파견되기 위해 신학교에서 의학 교육을 받았던 언더우드는 1885년 설립된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병원 운영에 지속적으로 관여했고, 1886년 제중원에서 의학 교육이 시작되자 영어와 물리, 화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가고 후임인 헤론이 급사하여 제중원이 위기에 빠졌을 때 제중원의 유지에 크게 도움을 주었고, 1890년대 초 한때 미 북장로회 선교부가 경비가 많이 드는 제중원을 포기하려 했을 때,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서 제중원이 갖는 이점을 들며 제중원을 유지하도록 설득했던 이도 언더우드였다. 또 제중원이 정부로부터 떨어져 나와 사립으로 독립할 때 언더우드가 미국 재단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온 것이 제중원의 존속에 큰 도움이 되었다.

아울러 언더우드는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면서 한국인 교육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언더우드는 1885년 고아원을 겸한 교육기관인 경신학당(현 경신중·고등학교)을 설립했다. 참고로 아래의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연희전문학교는 원래 경신학교 대학부로 설립되었다. 비록 연희전문의 모체가 되는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5년 3월에 설립되었지만#, 이화여대, 숭실대, 배재대 등의 예에서 볼때, 연희전문학교의 설립도 중등교육기관으로서의 경신학당이 설립된 1885년으로 소급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는 것이 경신학당 전통 긍정론의 입장이다.

이후 경신학당은 1901년 '중학교'(중고교 포함)가 설치되며 중등교육 기관으로 발전하였으며, 1905년 경신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다. 나아가 언더우드는 서울에서 대학교를 설립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언더우드는 1906년 경신학교를 중심으로 감리교측의 배재학당, 그리고 세브란스 의학원 등을 연합한 대학교 설립을 추진하였으나 내부 의견 합일이 이루어지지 못해 실패했다. 이미 평양에 숭실학교 대학부가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이 선교부의 결정적인 반대 이유였다.

하지만 언더우드는 조선의 수도인 서울에 반드시 대학교가 설립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대학 설립 추진을 이어갔다. 이때 대학설립을 추진하던 언더우드에게 큰 힘이 되어 준 것은 에비슨을 비롯한 미 북장로교 선교부 서울지부 선교사들이었다.

언더우드는 꾸준히 대학 설립을 추진하였고, 1912년 미국과 캐나다의 장로교 및 감리교 재단으로부터 대학 설립 자금을 모아 귀국했다. 자금의 상당부분은 언더우드의 친형이자 미국에서 타자기 사업으로 성공하여 부호가 된 존 토머스 언더우드(John Thomas Underwood)의 기부금이었다. 자금을 가지고 귀국한 언더우드는 대학 설립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당시 대학이 없던 조선에서 일제가 대학 설립을 허가해 줄 가능성은 극히 희박해 보였다.

그러던 중 1915년 3월 일제가 ‘전문학교규칙’과 ‘개정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자 언더우드는 일단 전문학교 형태라도 개교하기로 하고 그해 4월 12일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을 개교하였다. 경신학교를 중심으로 서울에 있던 다른 개신교계 학교인 배재학교, 숭실학교의 연합 대학부 형태였다. 교사는 신촌에 새로운 교사를 완공할 때까지 종로 YMCA 건물을 3년간 임대하여 사용했다. 미국 개신교 재단들로부터 원활한 지원을 받기 위해 교명에 Christian을 넣었다. 사실 조선기독교대학이라는 명칭은 대외적인 영문 명칭에 가까웠고 내부적으로는 경신학교 대학부라고 불렀다.

교장은 언더우드, 부교장은 세브란스 의학교의 교장이기도 한 에비슨이었다. 설립 당시부터 4년제 정규대학을 표방하였고 미국식 대학 시스템을 도입했다. 학과는 문과, 수물과, 상과, 농과, 신과 5과를 두었다. 문이과 및 순수학문과 실용학문을 망라했고 미국 기독교 재단의 지원으로 설립된 만큼 신학과도 설치하였다. 개교 당시 첫 학생은 61명이었다.

그러나 학교 설립 직후 언더우드의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져 1916년 4월 미국으로 돌아간 후 그해 10월 타계했다. (언더우드에 관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언더우드가 타계하자 1916년 12월 부교장인 에비슨이 뒤를 이어 교장이 되었다. 이로서 에비슨은 세브란스의학교와 연희전문학교 양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되었다.

언더우드와 에비슨 및 선교부는 정규대학 설립을 목표로 하였으나 일제는 한국에 대학령(大學令)이 없다는 이유로 그 설립을 저지하다가 결국 1917년 4월에 이르러 ‘사립연희전문학교’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1917년 4월 일제로부터 400명 정원의 4년제 전문학교로 인가받아 '연희전문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설립 당시부터 4년제 종합대학교를 계획했지만 대학교 설립 허가를 해주지 않았던 일제의 방침 때문에 대학교로 인가받지 못하고 구제전문학교[5]로 인가가 떨어졌다. 다만, 대학령 자체가 1919년에 공포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는 일본 본토에서조차 사립대학의 설립이 불가능했다.[6] 문학과, 신학과, 농학과, 상과, 수학과, 물리학과, 응용화학과 등의 학과를 두었다.

지금은 당연하게 여겨지는 미국식 대학 모델은 사실상 연희전문학교를 통해 한국에 들어온 것이었다. 연희전문학교는 설립 당시에 미국식 4년제 종합대학 허가를 받기 위해 설립되었고, 비록 일제에게 대학 설립이 불허되었지만 원래 목표로 했던 미국식 4년제 대학 시스템을 철저히 따랐고 일제가 허가만 해주면 언제든 대학으로 승격될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 이런 미국식 대학은 당시 한국에는 매우 생소한 것이었다. 아래에 나오지만 연희전문대학이 개교하고 이미 25년이 지난 1940년에 쓰여진 '조선 1940'이라는 잡지 기사에서도 연희전문학교는 미국 대학 같은 분위기를 풍긴다는 서술이 나오는 반면 보성전문학교에 대해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선배와 상급생에게 절대복종하며 집단을 이루는 무서운 집단"이라 묘사되는 등 미국식 대학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연희전문학교와 한국인이 설립 운영하는 보성전문학교 간에 학풍의 차이가 무척 크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1915년 설립 당시 YMCA 건물을 임대하여 사용하다가 설립 직후 설립자 언더우드의 형제이며 사업가로 크게 성공한 존 토머스 언더우드로부터 기부금을 받아 고양군 연희면 신촌에 있는 연희궁터 일대의 넓은 교지를 매입여 1917년 9월 신촌에 교사를 착공하여 1918년 신촌캠퍼스 최초의 교사인 치원관[7]이 완공되어 1918년 신촌 캠퍼스로 이전했다. 사실 치원관은 빠른 완공을 위해 목조건물로 지어진 임시 교사였고,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찰스 M. 스팀슨씨(Charles M. Stimson)의 기부금으로 석조건물인 스팀슨관이 1920년 9월 완공되어 본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24년에는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친형 존 토머스 언더우드의 기부금으로 지어진 현 연세대학교 본관 건물과 미국 메사츄세츠 피츠월드 제일감리교회에 의한 기부금으로 지어진 현 신학관이 완공되어 캠퍼스의 기본 골격이 완성되었다.

학풍은 서양 학문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동양과 조선의 사상 및 전통과의 결합을 추구하였다. 특히 당시 조선에는 생소했던 자연계 학과였던 수학과, 물리학과, 응용화학과 등은 미국 대학에서 해당 학문을 공부한 미국 선교사 출신이 중심이 되었다. 서양 선교사 출신 교강사들은 세브란스의전과 겸직하는 경우도 많았다. 미시간대 물리학 박사 출신 아서 베커(Arthur L.Becker)가 초대 수물과 학과장을 맡았으며,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된 후 수물과가 수학과, 물리학과, 응용화학과로 분리 개편하면서 베커가 물리학과장, 루퍼스(W. C. Rufus)가 수학과장, 밀러(E. H. Miller)가 응용화학과장을 맡는 등 미국 대학에서 해당 학문을 전공한 이들로 교수진이 구성되었다. 설립 초기부터 이미 킴볼(Kimball) 물리학 교과서를 사용하는 등 정규대학에 준하는 커리큘럼의 교육이 이루어졌다.

서양 선교사 출신의 교수들에 의해 서양 학문을 적극적으로 교육함과 동시에 민족주의 교육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훗날 국학이라는 이름으로 계승되는 민족의식 교육의 산실이던 문과와 당대 사회과학 트렌드에 따라 유물론적 방법론을 도입하던 상과 교수진 등이 학풍을 주도했다. 특히 연희전문학교는 식민지 지배를 위한 관학(官學)을 추구하던 경성 제국 대학의 학풍과 대립하면서 민족주의 학풍이 더욱 강해졌다. 당시 이러한 반(反)관학적, 민족주의 학풍을 이끌었던 이는 최현배, 정인보, 백낙준, 백남운 등이었다.

1919년 1회 졸업식 열렸다. 1915년 조선기독대학으로 개교했을 때 처음 입학했던 학생들이 4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마침내 졸업한 것이다.

연희전문학생들은 1919년 3⋅1 운동, 1920년 조선 학생 대회, 1923년 조선 학생회 조직, 1926년 6⋅10 만세 운동, 1929년 광주 학생 운동 등 민족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에비슨 교장을 비롯한 연희전문학교 교수진들은 학교의 숙원인 종합대학 승격 및 이를 위해 연희, 세브란스의전 양교 통합을 추진해왔고, 3.1운동 후 일제의 통치가 유화정책으로 바뀌자 1920년 발빠르게 종합대학 승격 계획을 수립, 추진했다. 아울러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연희전문학교과 세브란스 의전의 통합 계획 역시 가속화되었다. 또한 종합대학 승격을 위한 다양한 학과 증설 계획도 세워졌다.[8]

그러나 일제는 1923년 개정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하고 이외에는 대학 설립을 일체 불허했다. 이 개정 교육령에 의해 연희전문학교는 종학대학 승격이 좌절됨은 물론 오히려 문과, 상과, 신학과를 제외한 이과 계열 학과들이 일시 폐쇄되었다가 반발에 의해 원상 복구된 일도 있었다. 당시 연희전문의 이과를 총괄하던 베커 학장은 호러스 호턴 언더우드(원한경)[9] 박사 등과 함께 미국 선교본부에 지원을 요청하였고 학과가 복구된 직후 학칙을 개정하여 1924년 3월부터 학과를 증설하는 등 일제의 탄압에 맞대응하기도 했다.

이렇게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학교 구성원들의 좌절은 컸지만 오히려 그동안 연희전문과 세브란스의전의 합동 작업이 가속화되어 1926년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학원 교수와 이사간에 양교 합동안이 제안되었다. 하지만 당시 일제의 간섭하에 양교 통합은 성취되지 못했다. 이후에도 일제강점기 동안 몇 차례 더 양교 통합이 추진되었으나 모두 좌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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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에서도 나오지만 당시 연희전문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부모님의 표정이 흐뭇해지는 고등교육기관으로 유명했다.

1940년경 마해송 등 당시 조선의 지신인들이 중심이 되어 발행한 '조선 1940'이라는 잡지에는 다음과 같이 연희전문학교에 대해 묘사했다.

"학교건물이 신촌의 아름다운 소나무 숲 언덕 위에 있어 이화전문이 언덕을 넘어 저편에 로맨틱하게 위치하는 점 등, 지나치게 혜택받은 그들에게 질투가 날 정도다. 연희전문 학생과 이화전문 학생이 사이가 좋은 것은 자연의 이치다.(중략) 그들은 미국학생처럼 행복하다. 청춘을 마음껏 즐긴다"

조선 1940 #


같은 기사에서 당시 보성전문학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연희가 게이오라면 보성은 와세다나 메이지(대학) 풍이다. 학생은 어떠한 경우에도 선배와 상급생에게 절대복종한다. (중략) 예를 들어 보성전문의 학생이 우연치 않은 일로 학교 밖에서 억울하게 당하거나 해를 보았을 때 학생들은 당장 집단을 이루어 반드시 복수를 한다고 한다. 무서운 학교다". 또한 경성제대는 '신사형', 이화여전은 '낙원의 처녀들'이라고 묘사했다. #

일제 시대를 거치며 한국인 교수진이 확충되면서 사실상의 운영이 차츰 한국인의 손으로 이관되었다. 이는 설립자인 언더우드 등 미국 선교사들이 철저히 미국식 대학 모델을 적용한 덕분이었는데, 미국식 대학은 중세 이래 대학의 길드식 자율 자치 운영 모델을 그대로 유지하였고[10], 철저하게 미국 대학 모델을 따랐던 연희전문학교 역시 한국인 교수진이 확충되면서 자연스레 한국인에 의한 운영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었다.

연희전문학교는 일제의 가혹한 사상적인 탄압 대상이 되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 등 일제가 일으킨 사상 탄압 사건에 주요 교수진이 검거되어 큰 타격을 받았다. 1938년 4월부터는 일본어, 일본사교육을 강요당하기도 했다. 1944년 4월에는 본 대학교를 적산이라는 명목으로 몰수하고 총독부의 관리하에서 한국인 간부와 교수진을 추방하였으며, 교명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라'고 고쳐서 1945년 8.15 광복까지 이르렀다.

해방과 함께 미군정이 실시되자 접수위원(백낙준, 유억겸, 이춘호, 김윤경, 이묘묵, 조의설, 김성권)은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의 재산과 운영권을 미군정청으로부터 인수받아, 교명을 연희전문학교로 회복하였으며 유억겸 씨가 교장으로 있다가 1945년 12월 18일 백낙준 박사가 후임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1946년 8월 15일 종합대학으로 승격되어 '연희대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동시에 남녀공학으로 전환하여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남녀공학제를 실시하는 대학교가 되었다. #

3.1. 교명 변화[편집]


  • 1915년: 조선기독교대학(경신학교 대학부)
  • 1917년: 사립 연희전문학교
  • 1923년: 연희전문학교(일제의 신교육령에 의해 개칭)
  • 1944년: 경성공업경영전문학교(일제에게 몰수 후 총독부에서 관리)
  • 1945년: 연희전문학교
  • 1946년: 연희대학교
  • 1957년: 연세대학교로 통합


4. 연세대학교로의 통합[편집]


두 학교는 초기에 모두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 서울지부에서 운영했다(제중원은 1894년 이후). 언더우드, 에비슨 등 학교 초기의 역사와 관련된 선교사들의 다수가 두 학교의 설립에 모두 관여했고 두 학교에서 동시에 강의하는 경우가 많았다. 양 학교는 일제하의 암울한 시기에 전 조선인의 기대를 받으며 성장, 발전하였다. 이후 한국인 교수진이 확충되면서 사실상의 운영이 차츰 한국인의 손으로 이관되었다.

연희전문학교 설립 직후인 1910년대 중반부터 미 북장로회 선교부는 두 학교의 통합을 계획했다. 양교의 통합을 통해 종합대학교로 승격을 꿈꾸던 연희는 의대를 추가할 수 있게 되고, 서울역 앞 좁은 부지로 고민하던 세브란스는 신촌의 넓은 부지로 확장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언더우드가 1916년 사망했지만 그의 사후 에비슨이 연희전문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두 학교의 교장을 겸임하게 되면서 양교의 통합 작업은 가속화되었다. 당시 언더우드의 친형이자 미국 타자기 재벌인 존 토머스 언더우드가 에비슨이 양교의 교장 업무 겸직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자동차를 제공했고, 덕분에 에비슨은 매일 오전에 서울역 앞 세브란스로 출근했다가 오후에는 자가용으로 신촌의 연희전문학교로 이동해서 업무를 볼 수 있었다. 양교의 통합은 이미 191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언더우드의 친형인 존 토머스 언더우드와 클리블랜드의 재벌인 존 세브란스는 모두 미 북장로회 뉴욕선교본부의 이사였다. 이를 통해 언더우드 측이 세브란스 가문으로부터 제중원을 위한 기부금을 받아낸 바 있었다. 이 두 사람은 뉴욕 선교본부 안에 '조선 개신교육을 위한 협력이사회'를 설립했고 존 언더우드가 회장, 존 세브란스가 재무위원장을 맡았다. 이후 1910년대 후반 존 언더우드와 존 세브란스는 협의 하에 각각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의 교지 매입을 위한 기부금을 출연했고, 양교 통합을 전제로 신촌에 부지를 매입했다. 그리하여 존 언더우드의 기부금으로 연희전문학교 측은 신촌의 현 연세대 본교 주변 부지를 매입했고, 존 세브란스의 기부금을 받은 세브란스 측은 그 옆 현 세브란스 병원 인근 부지를 매입했다.

3.1 운동 후 일제의 유화적인 문화통치가 펼쳐지자 발빠르게 대학교 승격을 목표로 양교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은 빛을 보지 못하고 일제는 1924년 경성제국대학 하나만으로 조선의 대학을 퉁쳐버렸다.[11]

경성제대가 세워지자, 오히려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전 양교 통합에 관한 내부 조율이 빠르게 진척되어 1926년 연희전문학교 및 세브란스 의전 이사 및 교수진간에 양교 합동안이 합의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간섭 및 제지로 성취되지 못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걸쳐 몇 차례 합동안이 다시 제안되었으나 일제의 방해로 양교의 통합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8.15 광복 이후 양교의 통합이 다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두 학교의 통합을 전제로 1949학년도부터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예과가 연희대학교에 설치되었다. 그러나 통합은 6.25 전쟁으로 다시 지연되고 말았다.

휴전 이후 연희대학과 세브란스 의과대학 통합 위원회가 한국 전쟁 이후 처음으로 개최되어 합동안을 제정했다. 한때 이화여대의 합류 가능성도 잠시 논의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학과들이 중복되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의견 제기 수준에서만 그치고 불발되었다. 연희와 세브란스 두 학교는 통합에는 이미 뜻을 같이 했지만 정작 통합된 학교의 교명에 대한 이견 때문에 오랫동안 통합이 지연되었다. 연희대학교 측은 세브란스 의과대학이 연희대학교 의과대학으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브란스 의과대학 측은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이에 연희대학교 세브란스 의과대학이라는 명칭도 제안되었지만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 결국 1955년 희와 브란스의 앞 글자를 따 연세대학교라는 새로운 교명을 만드는 것에[12] 양측이 합의하였다. 1956년 재단법인 연세대학교가 설립되었고, 1957년 1월 5일 통합 연세대학교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초대 총장은 백낙준, 부총장은 최현배였다. 이후 5월 둘째주 토요일을 창립기념일로 정하여 기념하게 되었다.개교기념일 휴강을 없애버리신 어르신들


5. 국제캠퍼스[편집]


2010년 송도캠퍼스란 명칭으로 개교했다가 곧 국제캠퍼스란 명칭으로 정착되었다. 인천광역시의 중점 사업중 하나인 송도국제도시의 개발에 따라, 신촌캠퍼스의 포화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2005년 말 TF팀의 결성과 2006년 초 인천광역시와의 <연세대학교 송도국제화복합단지 건립을 위한 협약>을 시작으로 본격화되었다.

2008년 1단계 영역이 착공되었고, 2010년 자유관과 종합관, 기숙사 A, B, C동, 지혜관 A, 국제캠퍼스 기념관 등 1-1단계 사업이 완공되었다.

완공 이후 2011년, 소수의 학과들을[13] 국제캠퍼스에서 시범적으로 적용하였다.

2013년에는 1학년 전체를 1학기씩 송도에서 교육받도록 시범적용을 하였다.

2013년 1-2A단계 사업이 완공되어 언더우드 기념도서관, 크리스틴 채플, 지혜관 B, 진리관 A, B, C, D, 포스코 그린빌딩이 추가되었다.

더불어 2014년 1-2B단계 사업이 완공되어서 국제캠퍼스 내에서 학부생들이 사용할 기본적인 시설들은 전부 완공되었으며, 2014년부터 신입생 전체가 국제캠퍼스에서 1년간 수학하게 된다.[14]

학교 측에 따르면 아직 완공 기한은 정해지지 않은 모양이다. 2020년대 중반이면 대략적으로 완공되지 않을까.. 라고 두루뭉실하게 말하는 편.[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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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합 당시부터 지금까지 부총장급 직위인 세브란스 의료원장 등은 의대 교수들이 선거로 직접 뽑고 있다.[2] 1886년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튼 부인의 아들. 어머니와 함께 선교를 하러 한국에 왔다.[3] 1886년 알렌이 세운 제중원의학당에서의 교육은 1890년경 중단되었다.[4] 일제의 강요로 변경하였다.[5] 당시 일본 제국에서 공포된 '전문학교령'에 의거하여 설립된 고등교육기관을 일컫는다. 연희전문학교 외에는 대표적으로 1905년에 설립된 보성전문학교가 있다.[6] 1919년 이후에 개정된 대학령에 의거하더라도 재단예치금 최소 3만엔의 재정 조건을 비롯한 구제대학의 요건이 워낙 까다로웠기 때문에 조선에서는 1945년 종전까지 단 한 곳도 사립 구제대학으로 승격하지 못했다. 참고로 법문학부와 의학부의 단 2개 학부로만 구성된 경성제국대학이 혼자서 그렇지 않아도 만년 적자였던 조선총독부의 전체 교육예산의 1/3~1/2 가량을 소비했을 정도다. 그만큼 당시 기준으로 대학이라는 것이 고급 엘리트 교육기관이었으며 설치와 유지를 위해 엄청난 비용이 들었던 것이다.[7] 현 체육교육관 뒤편에 위치했다고 한다.[8] 음악과 등을 설치하여 예체능 계열까지 확대하는 것이 목표였고 실제로 김영환, 현제명 등 음악 전공자들이 교수진으로 영입되었다.[9] 설립자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아들[10] 대학의 기원이 된 중세 길드식 대학의 모태인 독일 등 유럽 대학은 근대 이후 국가의 영향력을 크게 받게 되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경우 좌파 정당의 주도하에 대학 평준화 정책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유럽 대륙의 대학 경쟁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세계 최고의 대학 중 하나였던 베를린 대학, 하이델베르크 대학, 소르본 대학 등은 현재는 평범한 평준화 대학으로 전락했다. 반면 미국과 영국에서는 국가의 개입을 최소하는 자유주의, 실용주의 사조의 영향하에 대학 역시 정부에 대한 자율성이 존중되어 왔고 그 결과 20세기 후반 세계적 명문대의 대다수를 미국 대학이 차지하게 되었고, 영국 대학 역시 경쟁력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11] 학교 교과서에는 일제가 사립대학 승격을 불허한 대신 경성제대를 설립해서 퉁치고 입막음하려 했다는 식으로 설명되어 있으나 최근 들어서는 폐기된 이론이다. 일제는 민립대학설립운동 및 각 지역의 구제전문학교들의 사립대학 승격 요구 전부터 경성제대 개교 계획은 세워 왔으며 어쩌다 그 시기가 우연찮게 맞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다만 경성제대와는 별개로 조선인들이 고등교육을 받아서 의식수준이 높아지는 것을 경계해서 사립대학 추가 설립 및 승격을 불허한 건 사실이었다. 경성제대는 유일한 관립대학이라는 지위를 통해 식민지배에 충성하는 황국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경성제대 출신들이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건 아니다.[12] 단순히 이름만 붙인게 아니라 세상을(世) 이끄는(延) 인재를 기르는 대학이 되겠다는 의미까지 끼워맞췄다.[13] 학교에서 발표하기로는 우수한 학과들을 우선적으로 적용한다고 했지만, 자연대나 공대처럼 실험실과 장비가 필요한 학과는 제외된 반면, 의치대처럼 학과가 인기가 좋아 송도로 보내도 무방하거나, 역사가 짧아서 힘이 없는 곳들이었다.[14] 음악대학, 미래캠퍼스 제외.[15] 조감도와 비교했을 때 지금은 대충 55% 정도 완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