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달 (문단 편집) === [[리 왕조]] 원정 === 희녕 9년(1076년) 2월, 안남도 행영 마부군 도총관 [[곽규]]는 베트남 리 왕조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북송 정권이 광서 일대에 군사력을 집중시키자 [[리트엉끼엣|이상걸]]이 위협을 느껴 북송군을 선제공격했고, 그가 이끄는 군대는 [[왕안석]]의 신법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한다는 것을 전쟁 명분으로 삼는다.], 연달은 행영 마부군 부도총관을 맡았다. 입궁폐사 때 [[신종(송)|송 신종]]이 연달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대는 이미 이름이 높으니 직접 전진에 임할 필요가 없고 장병들을 격려하기만 하면 되네. 연달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한다. >신이 폐하의 위령으로 도적을 멸할 수 있는데, 죽음이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처음에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연달은 공격군이 적을 만나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려고 했다. 어떤 편장이 그에게 집안일을 꾀하여 경진하지 말라고 권하자, 연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쪽의 전세는 이미 매우 위급하니 어찌 차마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고려하겠는가? 주둔하는 자는 모두 참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휘사가 진원하자 앞의 병졸은 크게 분발하여 "태위(연달을 지칭)가 오라"라고 외쳤고, 이로 인해 월군은 궤멸되었고, 송군은 이 여세를 몰아 광원주(오늘날의 베트남 광연)를 함락시키고 항복한 장수 유응기를 불러들였다. 그 후 송군은 수로를 따라 진격했고, 연달은 결리협까지 종군하여 월군을 격파하고 기랑현과 문주를 공격한 데 이어 12월에 부량강[* 지금의 베트남 홍하]에 도착하여 [[부량강 전투|결전을 벌인다]]. 월남군 대장 [[리트엉끼엣|이상걸]]은 월남군 전선 400여 척을 모아 강남에서 수로를 막아 송군의 공세를 방해했고, 곽규와 부장 조조는 군사를 나누어 벌목을 시켜 발석거를 만들어 공격했다. 연달은 속으로 '''병법이 '사람을 치지만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 이겨내려면 적을 지배해야지 적에게 지배당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고 하니, 아군이 약하게 보이면 그들이 반드시 먼저 공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암묵적으로 계략을 썼다. 그래서 몰래 군대를 보내 산에 매복시킨 이후 점차 군사를 줄여 적을 유인했다. 리 왕조의 군대는 계략에 걸려 수만 명이 강을 건너 출격하여 송군의 복병에게 총격을 받고, 북송군은 돛이 부러진 틈을 타 정병을 뽑아 큰 뗏목을 타고 맹공을 퍼부어 월군을 대파하고 수천 명을 죽인다. 이 전투에서 리 왕조의 대장 홍진태자와 소문왕자가 전사하고 좌랑장 응우옌안이 포로로 잡혔다. 얼마 후 이건덕이 항복을 청하자 송군은 병에 걸려 사상자가 절반을 넘고 군량이 바닥나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되자 화해한다. 희녕(熙寧) 10년(1077년) 초, 조정에 징집되어 3월에 배연로부도총관(路延路副都總管)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아직 출발하지 않아 5월에 베이징에 머물 때 위보군사를 모시기에 편하였다. 같은 달 광원주 수복의 공으로 충주자사에서 영주방어사로 승진했다. 8월, [[곽규]]가 죄를 짓고 혼자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관상을 회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송 신종은 그를 광원주, 결리애, 부량강(富良江)을 점령한 데 공이 있다는 이유로 기각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