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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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재용겸비
2.2. 서방을 방어하여 모멸시키다.
2.3. 리 왕조 원정
2.4. 숙위 진급
2.5. 서거
3. 주요 행적
3.1. 누차 서하 격파
3.2. 교지 원정
3.3. 황하의 재해를 다스리다
3.4. 금군 훈열


1. 개요[편집]


燕達, 1030-1088
자는 봉신(逢辰), 개봉부 출신으로, 북송의 장수이며, 시호는 '의민(毅敏)' 이다. 서하 전선에서 활동했고, 송월희녕전쟁 시기 곽규의 부장으로 참전한다.


2. 생애[편집]



2.1. 재용겸비[편집]


1030년 출생이다. 연달은 어린 시절 친구들과 놀면서 군대의 행렬을 이루곤 했는데, 어른들은 이를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성년이 되자 체격이 우람해졌고 승마와 사격에 능하였다. 그는 처음에 재주와 용맹을 겸비하여 금군 군적에 예속되었고, 관내전 숭반을 수여받는다.


2.2. 서방을 방어하여 모멸시키다.[편집]


후에 연달은 연주 동로 도순검으로 부임하여 전략 요충지인 회녕채를 지키라는 명을 받는다.

희녕 3년(1070년) 4월, 서하 대장 양을매가 수덕을 공격하는 데 실패하여 성 밖에 8개의 요새를 건설하고 각 3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킨다. 선휘남원사 곽규가 소식을 듣고 연달에게 군사를 이끌고 그 중 두 채를 함락시킬 것을 지시한다. 연달은 수령 몇 명을 죽이고, 나머지 보채의 수졸들은 소문을 듣고 뿔뿔이 흩어졌다. 9월, 서하 기병 3만 명이 회녕채를 공격하러 와서 하루 종일 수비군과 교전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연달은 500명의 부대에 불과했음에도 악전고투하여 서하군을 퇴각시킨다. 그 공로로 배연로 도감으로 승진하여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고 서하로 깊숙이 들어갔고, 9번의 교전에서 모두 승리하고 돌아온다.

희녕 4년(1071) 정월에 대장 충악[1]이 북서쪽을 거쳐 영락천, 상포평 등의 보채를 쌓고 연달과 도감 조박을 보내 눈을 맞으며 무령 구성을 쌓게 했다.[2] 완공 후 연달은 새로 점령한 나올성[3]으로 이주한다. 3월이 되자 송군의 수채 행위에 격분한 서하가 순녕채를 공격하여 무녕을 포위하고 새로 쌓은 각 채가 차례로 함락된다.[4] 이에 송 신종이 송군으로 하여금 이를 포기하게 했으나 연달은 수졸 수천 명을 호송하고 군자금과 치수를 남쪽으로 철수시켰는데, 도중에 양을매의 군대에 의해 요격당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송 신종은 그가 고군분투하여 이미 많은 병졸들을 보호했다고 생각하여 처벌하지 않았다. 이듬해 11월, 전후의 전공으로 권발파 환경로 정박총관으로로 승진했고, 이후 진봉부총관, 서상각문사, 영영주자사로 승진한다.

희녕(熙寧) 7년(1074년), 하주(河州) 단련사 경사립이 답백성에서 전사하고, 하주는 강족 군대에 포위당한다. 연달은 왕소[5]의 밑에서 군사를 이끌고 하주의 강족들을 토벌하고 은천을 공격하여 그 보루를 부수고, 취락 7000여 장막을 불태우고, 앞뒤로 4000급을 참수하고, 하노성으로 돌아가 청해 동부 토번의 수령인 목정을 불러들였다. 4월에 공로로 다시 동상합문사와 부도총관으로 승진한다.

희녕 8년(1075년) 윤사월, 조정은 진봉로의 정병 2만 200여 명과 궁수, 재호, 번병 2만 4000여 명을 4부로 나누어 4명의 장수를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그 중 연달은 제1장을 맡았고, 여전히 희하로의 사무를 담당한다. 이후 충주자사, 용신위사방도지휘사에 오른다.


2.3. 리 왕조 원정[편집]


희녕 9년(1076년) 2월, 안남도 행영 마부군 도총관 곽규는 베트남 리 왕조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고[6], 연달은 행영 마부군 부도총관을 맡았다. 입궁폐사 때 송 신종이 연달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대는 이미 이름이 높으니 직접 전진에 임할 필요가 없고 장병들을 격려하기만 하면 되네.


연달은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한다.

신이 폐하의 위령으로 도적을 멸할 수 있는데, 죽음이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처음에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연달은 공격군이 적을 만나 고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구원하려고 했다. 어떤 편장이 그에게 집안일을 꾀하여 경진하지 말라고 권하자, 연달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쪽의 전세는 이미 매우 위급하니 어찌 차마 자신을 보전하기 위해 고려하겠는가?

주둔하는 자는 모두 참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휘사가 진원하자 앞의 병졸은 크게 분발하여 "태위(연달을 지칭)가 오라"라고 외쳤고, 이로 인해 월군은 궤멸되었고, 송군은 이 여세를 몰아 광원주(오늘날의 베트남 광연)를 함락시키고 항복한 장수 유응기를 불러들였다. 그 후 송군은 수로를 따라 진격했고, 연달은 결리협까지 종군하여 월군을 격파하고 기랑현과 문주를 공격한 데 이어 12월에 부량강[7]에 도착하여 결전을 벌인다. 월남군 대장 이상걸은 월남군 전선 400여 척을 모아 강남에서 수로를 막아 송군의 공세를 방해했고, 곽규와 부장 조조는 군사를 나누어 벌목을 시켜 발석거를 만들어 공격했다. 연달은 속으로 병법이 '사람을 치지만 사람을 이기지 못한다'[8]고 하니, 아군이 약하게 보이면 그들이 반드시 먼저 공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암묵적으로 계략을 썼다. 그래서 몰래 군대를 보내 산에 매복시킨 이후 점차 군사를 줄여 적을 유인했다. 리 왕조의 군대는 계략에 걸려 수만 명이 강을 건너 출격하여 송군의 복병에게 총격을 받고, 북송군은 돛이 부러진 틈을 타 정병을 뽑아 큰 뗏목을 타고 맹공을 퍼부어 월군을 대파하고 수천 명을 죽인다. 이 전투에서 리 왕조의 대장 홍진태자와 소문왕자가 전사하고 좌랑장 응우옌안이 포로로 잡혔다.

얼마 후 이건덕이 항복을 청하자 송군은 병에 걸려 사상자가 절반을 넘고 군량이 바닥나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되자 화해한다.

희녕(熙寧) 10년(1077년) 초, 조정에 징집되어 3월에 배연로부도총관(路延路副都總管)으로 임명된다. 그러나 아직 출발하지 않아 5월에 베이징에 머물 때 위보군사를 모시기에 편하였다. 같은 달 광원주 수복의 공으로 충주자사에서 영주방어사로 승진했다. 8월, 곽규가 죄를 짓고 혼자 상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관상을 회수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송 신종은 그를 광원주, 결리애, 부량강(富良江)을 점령한 데 공이 있다는 이유로 기각당한다.


2.4. 숙위 진급[편집]


원풍 원년(1078년), 변경에 남아 보군도우후를 서임하고, 금주관찰사 겸 금주자사, 상주국 등으로 옮긴다. 후에 마군 도우후로 변경하고, 급을 넘어 시위친군 마군 부두 지휘사로 승진하여 하남군 개국공에 봉해진다.

원풍 2년(1079년) 6월, 연달은 사졸을 훈열하고 정결하여 아들 하나를 합문지후로 제수한다. 그는 송 신종의 사랑을 받아 여러 차례 조정의 포상을 받는다. 그해 10월 태황태후 조씨(자성광헌황후)가 사망하자 연달은 산릉수봉총관을 맡아 금군을 이끌고 능침을 쌓는다. 원풍 4년(1081년) 8월, 전전의 부도지휘사, 무강군 절도사로 승진하여 양주관찰사 겸 자사(史史) 등을 주관한다.

원풍 8년(1085년) 3월, 송 철종이 즉위하자, 연달은 전전의 도지휘사로 승진하여 검교사공을 가하고 무신군 절도사를 사절한다.


2.5. 서거[편집]


원우 3년 7월 2일(1088년 7월 22일), 5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송 철종은 부고를 듣고 하루 조회를 그만두고 연달의 저택에 직접 가서 제사를 지내고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하였으며 의민(毅敏)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3. 주요 행적[편집]



3.1. 누차 서하 격파[편집]


1070년 4월 연달은 사령관 곽규의 명을 받아 서하가 수덕성 밖에 쌓아둔 두 보루를 함락시키고, 수령 몇 명을 죽이고, 나머지 여섯 보의 수졸을 강제로 풍문을 흘려 이들을 궤멸시킨다. 9월에는 500명의 부대로 회녕채를 지키고 서하 기병 3만 명을 물리친다. 그는 군대를 이끌고 서하로 깊숙이 들어가 9번 싸워 9번 승리한다. 이듬해 정월에는 눈을 무릅쓰고 부녕의 옛 성을 쌓고, 이후 나올성[9]의 군사들을 호위하여 남쪽으로 철수한다.

1074년 희하로경략사 왕소가 하주의 강족을 토벌할 때 은천(銀川)을 공격하여 앞뒤로 4천급 목을 베고, 청해 동부 토번의 수령인 할목정에게 투항을 권한다.


3.2. 교지 원정[편집]


1076년에는 곽규를 따라 베트남 리 왕조를 토벌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광원주(지금의 베트남 광연)와 결리협 등지에서 광원의 장수 유기를 투항시킨다. 12월, 부량강 전투에서 적을 유인하여 강을 건너 리 왕조의 군대 수천 명을 죽이고 대장 홍진태자, 소문왕자 등을 참수했다.


3.3. 황하의 재해를 다스리다[편집]


1077년 7월, 황하는 성주[10] 조촌에서 결정되었고 북쪽의 흐름이 끊기고 수로가 남쪽으로 이동하여 농지를 파괴한다. 그는 조촌의 파열된 물을 옛길로 되돌리는 데 참여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원풍 원년(1078년) 4월까지 활동했다.

1081년, 내황현 소오에서 황하가 터지자 신종에 의해 감독으로 파견되나, 그는 '소오도가 끊어져 지금은 물이 거의 불어나고, 하문의 수구가 모두 깊고 넓으며, 붕괴가 불확실하여 공적을 계산하기 어렵고 고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소환된다.


3.4. 금군 훈열[편집]


연달이 금군마군부수와 시위보군사를 겸할 때 스스로 기졸을 훈련시켜 말과 보 2사졸을 '기능이 날로 더 나아간다'고 하여 '훈열정정'의 효과를 얻었다. 그 후, 그는 제갈량이정의 병법에 따라 일련의 오진법을 총괄하여 금군을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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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청간성을 쌓아 서하를 방어한 충세형의 아들이다. 아버지 충세형의 음보로 지청간성을 지냈다. 아버지 충세형, 아들 충사도와 함께 충가장의 일원이다.[2] 충악은 횡산을 차지하려는 계획이었다.[3] 지금의 섬서성 미지 북서쪽[4] 이 당시 충악은 이에 어쩔 줄 몰라 붓으로 글을 써내리지 못하였고 눈물과 콧물을 흘리는 걸 그치지 못했다.[5] 1068년 평융책 3편을 올려 서하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하, 황 2개의 주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6] 북송 정권이 광서 일대에 군사력을 집중시키자 이상걸이 위협을 느껴 북송군을 선제공격했고, 그가 이끄는 군대는 왕안석의 신법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구한다는 것을 전쟁 명분으로 삼는다.[7] 지금의 베트남 홍하[8] 이겨내려면 적을 지배해야지 적에게 지배당할 수 없다는 의미이다.[9] 충악이 1071년 서하를 격파하여 쌓은 성이다. 서하는 북송 측의 수채 행위에 분노하여 이를 공격했고 충악은 눈물을 흘리며 어쩔 줄 몰라했다.[10] 지금의 하남성 복양시 근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