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달 (문단 편집) === 서방을 방어하여 모멸시키다. === 후에 연달은 연주 동로 도순검으로 부임하여 전략 요충지인 회녕채를 지키라는 명을 받는다. 희녕 3년(1070년) 4월, [[서하]] 대장 양을매가 수덕을 공격하는 데 실패하여 성 밖에 8개의 요새를 건설하고 각 3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킨다. 선휘남원사 [[곽규]]가 소식을 듣고 연달에게 군사를 이끌고 그 중 두 채를 함락시킬 것을 지시한다. 연달은 수령 몇 명을 죽이고, 나머지 보채의 수졸들은 소문을 듣고 뿔뿔이 흩어졌다. 9월, 서하 기병 3만 명이 회녕채를 공격하러 와서 하루 종일 수비군과 교전했지만 승부가 나지 않았다. 연달은 500명의 부대에 불과했음에도 악전고투하여 서하군을 퇴각시킨다. 그 공로로 배연로 도감으로 승진하여 여러 차례 군대를 이끌고 서하로 깊숙이 들어갔고, 9번의 교전에서 모두 승리하고 돌아온다. 희녕 4년(1071) 정월에 대장 [[충악]][* 청간성을 쌓아 [[서하]]를 방어한 [[충세형]]의 아들이다. 아버지 충세형의 음보로 지청간성을 지냈다. 아버지 충세형, 아들 [[충사도]]와 함께 충가장의 일원이다.]이 북서쪽을 거쳐 영락천, 상포평 등의 보채를 쌓고 연달과 도감 조박을 보내 눈을 맞으며 무령 구성을 쌓게 했다.[* 충악은 횡산을 차지하려는 계획이었다.] 완공 후 연달은 새로 점령한 나올성[* 지금의 섬서성 미지 북서쪽]으로 이주한다. 3월이 되자 송군의 수채 행위에 격분한 서하가 순녕채를 공격하여 무녕을 포위하고 새로 쌓은 각 채가 차례로 함락된다.[* 이 당시 충악은 이에 어쩔 줄 몰라 붓으로 글을 써내리지 못하였고 눈물과 콧물을 흘리는 걸 그치지 못했다.] 이에 송 신종이 송군으로 하여금 이를 포기하게 했으나 연달은 수졸 수천 명을 호송하고 군자금과 치수를 남쪽으로 철수시켰는데, 도중에 양을매의 군대에 의해 요격당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송 신종은 그가 고군분투하여 이미 많은 병졸들을 보호했다고 생각하여 처벌하지 않았다. 이듬해 11월, 전후의 전공으로 권발파 환경로 정박총관으로로 승진했고, 이후 진봉부총관, 서상각문사, 영영주자사로 승진한다. 희녕(熙寧) 7년(1074년), 하주(河州) 단련사 경사립이 답백성에서 전사하고, 하주는 [[강족]] 군대에 포위당한다. 연달은 [[왕소(북송)|왕소]][* 1068년 평융책 3편을 올려 서하를 정복하기 위해서는 하, 황 2개의 주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의 밑에서 군사를 이끌고 하주의 강족들을 토벌하고 은천을 공격하여 그 보루를 부수고, 취락 7000여 장막을 불태우고, 앞뒤로 4000급을 참수하고, 하노성으로 돌아가 청해 동부 토번의 수령인 목정을 불러들였다. 4월에 공로로 다시 동상합문사와 부도총관으로 승진한다. 희녕 8년(1075년) 윤사월, 조정은 진봉로의 정병 2만 200여 명과 궁수, 재호, 번병 2만 4000여 명을 4부로 나누어 4명의 장수를 나누어 통솔하게 했다. 그 중 연달은 제1장을 맡았고, 여전히 희하로의 사무를 담당한다. 이후 충주자사, 용신위사방도지휘사에 오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