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남생 (문단 편집) === 고구려 멸망 === ||<-2> '''{{{#white 남생의 당 관직(본인 묘지명 기준)}}}''' || ||<|2> '''{{{#white 당 작위}}}''' ||현도군공(玄菟郡公) || ||변국공(卞國公) || ||<|3> '''{{{#white 당 직위}}}''' ||평양도 행군대총관(平壤道 行軍大摠管)[* 평양도는 고구려의 수도, 행군은 임시 군부대란 뜻이며 대총관은 당국 군대 계급이다.] 겸(兼) 지절안무대사(持節安撫大使)[* 지절은 임금의 임명을 받았다는 뜻이고 안무대사는 고정 직위라기보단 일종의 특별 인사 같은 직위다.] || ||요동 대도독(遼東 大都督) || ||우위 대장군(右衛 大將軍) || 당시 당나라는 1, 2차 [[고구려-당 전쟁]]의 연이은 실패 이후 숨고르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연남생의 전갈을 받은 [[고종(당)|당고종]]은 사신으로 파견된 연헌성에게 벼슬과 재물을 하사하여 국내성으로 돌려보냈으며 장군 [[글필하력|계필하력]]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 연남생을 맞아들이도록 하였다.[* 계필하력은 [[태종(당)|당태종]] 시절부터 수 차례 고구려 공격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최대의 적이었던 연개소문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 출정했다니 기분이 묘했을 것이다.] 666년 6월에 연남생은 국내성을 비롯한 6개 성의 주민과 목저성(木底城)·남소성(南蘇城)·창암성(倉巖城) 등 3개 성의 백성을 이끌고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666년 9월 연남생은 그 공으로 당고종으로부터 특진[* 당나라의 문산계 품계로 정2품.] - 요동도독 겸 평양도안무대사(特進 - 遼東都督 兼 平壤道安撫大使)의 벼슬을 받고 현도군공(玄莬郡公)에 봉해졌다.[* [[삼국사기]] 기준. [[구당서]], [[신당서]] 등을 비롯한 [[중국]] 측 사서에는 연남생을 사지절요동대도독 - 상주국 - 현토군개국공(使持節遼東大都督 - 上柱國 - 玄菟郡開國公) 식읍 3,000호에 봉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한때 고구려 최고 권력자였던 연남생은 당나라의 고구려 원정의 향도가 되고 말았다. 이런 천금같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당나라는 5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공을 해왔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가 났음에도 고구려는 2년에 걸쳐 끝까지 대사투를 벌였지만 결국 668년 말 수도 평양성의 성문이 당나라와 내통한 [[승려]] [[신성(승려)|신성]]에 의해 활짝 열리게 되었다. 물밀듯이 밀려온 [[나당연합군]]은 평양성을 불바다로 만들었으며 고구려군을 이끌던 연남건은 [[자결]]을 하려 했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보장왕]]과 함께 당나라군에 사로잡히면서 평양성은 함락당하고 고구려는 멸망하게 된다. 평양성이 함락되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 연남생은 당나라군의 길을 터준 공을 인정받아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벼슬을 받았으며 3,000호에 달하는 [[식읍]]을 하사받았다. 연남생 묘지명에 따르면 당고종은 연남건을 포로로 잡을 생각이 없고 바로 죽이려 했는데 연남생은 형제간의 정이 조금이나마 남아있었는지 죽이지 말라고 부탁해서 결국 [[유배]]형으로 끝나게 해 주었다. 이후 연남생은 한동안 당나라의 수도였던 [[시안시|장안]]에 머물렀다. 그러던 중에 676년 [[나당전쟁]]에서 당나라 군대가 [[신라]]와 고구려 부흥 세력 [[연합군]]에게 패배하고 평양에 거점을 뒀던 당나라 세력은 [[요동]]까지 쫓겨나게 됐다. 이로 인하여 당나라는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고 그 틈을 타서 고구려의 옛 북쪽 땅 요동에서도 다시 부흥 운동이 일어날 기미가 보이게 되었다. 당나라 조정은 고구려 유민들을 달래기 위해 677년 연남생을 요동으로 파견하여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관리로 임명하였다. 연남생 묘지명에 의하면 요동에서 행정 구역을 개편하고 질병을 막고 구휼하며 농사에 필요한 전야 구획, 치수를 개편하고 세금을 균등히 하고 역역(力役)을 폐지해 유망민을 불러들이는 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연남생은 안동도호부에서 2년간 근무하다가 679년에 46세의 나이로 안동도호부 관사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 연남생 묘지명에는 연남생의 죽음을 훙(薨)으로 표현했다. 훙은 [[제후]] 중 왕 급에만 붙여주는데 당나라가 얼마나 연남생을 좋아했는지 알 수 있다.] 679년 12월 26일 당나라는 죽은 연남생의 유해를 [[중국]] 땅으로 옮겨와 [[낙양]]의 [[북망산]]에 매장하였다. 4일 동안 조회가 중지되었으며 장례식에 든 비용은 모두 조정이 냈다. 비단 700필과 쌀 200석을 내려 주고 5품 관리를 시켜 부절(符節)과 새서(璽書)를 보내주었다. 당 고종은 연남생에게 사지절대도독, 병, 분, 기, 남의 4개 군사, 그리고 병주자사를 추증하고 나머지 관직은 그대로 유지하라는 조서를 내렸고 비문을 세워 그 공적을 드러냈다. 황실 악단을 시켜 노래를 연주하게 시켰고 황실 호위대가 관 운반을 호송했으며 3일 동안 조정의 일을 보지 않았고 발인 날 5품 이상 관리는 그 집으로 가도록 해 애송(哀送)의 성대함이 고금에 다시 없었다고 한다. 연남생묘지명은 연남생의 일생, 관직, 가계도 등에 대해 기록한 묘지명을 남겼는데 이 연남생 묘지명은 1923년에 발굴되었다. 묘지명에 기록된 당나라에서 내려준 [[시호]]는 양공(襄公). 도와준(거들어준) 공작이라는 뜻인데 연남생에게 어울리는 시호이다. 증손자 [[연비]]의 묘지명에는 '변국 양공(卞國 襄公)'으로 나오는데 생전의 봉국을 시호에 붙혀 쓴 것.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