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양일환 (문단 편집) === [[삼성 라이온즈]] === 은퇴 후 바로 [[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로 활동하다가 1998 시즌을 마치고 삼성과 재계약에 실패했다. 1999년과 2000년에는 각각 [[일본]] 연수와 [[영남대학교 야구부]]에서 코치를 하며 삼성을 잠시 떠났었지만, 2001년 삼성에 복귀해 1군 투수코치를 맡으며 팀의 3회 우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2008년 5월에 갑자기 [[조계현]] 당시 2군 투수코치와 보직을 맞바꾸게 되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20&aid=0001958062|#]][* 이를 두고 [[선동열]] 감독의 친정체제 구축이라는 게 대다수의 반응이었다.] 그리고 시즌 후 재계약에 실패했다. 삼성에서 나온 후 여기저기 노린 팀도 많았을 법했는데 2009년 한 해동안 야인으로 지내면서 대구 지역의 아마추어 선수들을 가르쳤으며, 특히 원민구[* 2019년 삼성의 1차 지명을 받은 [[원태인]]의 아버지다.] 감독의 요청으로 [[경복중학교]] 야구부에서 인스트럭터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그는 반드시 프로 팀 코치로 현장에 복귀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고 안 되면 다시 해외 연수를 떠날 계획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44&oid=109&aid=0002043797|#]] 그리고 2009년 시즌이 끝나고 다시 삼성의 2군 투수코치로 복귀했다. 2011 시즌에는 암으로 입원하여 끝내 생을 마감한 [[장효조]] 2군 감독을 대신하여 2군 감독 대행을 겸임했다. 선수로서는 [[김시진]], [[김일융]] 등에 밀려 명성을 날리지 못했지만 [[김시진]]이 못다한 투수코치로서의 역할을 책임졌으며, 공백기를 빼면 한 팀에서 코치로서의 오랜 시간 동안 봉직 중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삼성 마운드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 팬들의 평가는 꽤 좋았던 편. 우선 삼성의 [[2005년 한국시리즈]], [[2006년 한국시리즈]] 2연패 시절 투수코치였고 이 당시 막강한 불펜진을 보유했던 데다 그만큼 잘 운영했기 때문에 이 때만 해도 평가가 좋았다. 이후 1차 지명 폐지와 고순위로 인한 낮은 지명 순서 등으로 포텐셜 자체가 그리 높지 않다고 평가되는 삼성 2군 투수진에서도 괜찮은 투수들을 적잖게 키워냈다는 평가와 함께 '''일환매직'''으로도 통했다. 그러나 2군 투수코치로 보직을 바꾼 2010년대 들어 평가가 나빠졌다. 일단 2군에서 육성되어 올라오는 투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없었고 2군에서 묵힌 유망주나 부상을 당한 선수가 2군만 갔다 오면 평균 구속이 눈에 띄게 하락하고 좀처럼 구속 회복이 되지 않는 등의 이유[* 대표적인 사례로는 허리 부상에서 복귀한 구속이 5km/h 이상 줄어든 [[김현우(1988)|김현우]]가 있다.]로, 일각에서는 삼성 투수진이 망한 원인을 1군 투수코치 [[김태한]]이 아닌 2군 투수코치인 양일환에게서 찾을 정도로[* 특히나 2군은 육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코칭스태프 중에서 투수진의 성장이 더딘 원인을 찾는다면 2군 투수코치인 양일환의 책임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과거에 비해 평가가 많이 떨어졌다. 2016년 삼성 라이온즈의 부진과 함께 2군 육성문제가 부각되며 평가가 더더욱 급하락했다. 특히 최고 구속이 150km 가까이 나오던 1차 지명 유망주 [[최충연]]이 양일환에 의해 투구폼을 교정한 뒤 최고구속이 140km/h도 안 나오며 그동안 2군에서 대체 뭐했냐며 철밥통이라고 욕먹고 있다. 결국 시즌 후 감독 교체의 여파로 팀을 떠나게 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