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압살롬 (문단 편집) === 반란 이후 === 압살롬의 반란은 당시 다윗 치세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겹쳐서 일어난 사건으로, 특히 다윗의 유화책에 대한 유다 지파의 반발이 빚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 이후 다윗은 유다 지파 역시 각별히 신경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지금까지 어찌어찌 무마하고 있던 타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 세력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며, 이는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던 도중 유다 지파가 단독으로 다윗을 환영하는 일로 인해 타 이스라엘 지파들이 격분한 사건을 통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압살롬의 반란 당시 토벌군에 지원한 이들은 타 이스라엘 지파들이었는데 유다 지파 혼자서 생색을 내고 있으니 불만을 품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유다 지파는 압살롬의 반역에 가장 크게 가담한 지파였다.'''] 결국 유다 지파와 타 이스라엘 지파와의 갈등 조율 속에 맺힌 애로사항은 뒤이어 세바의 반란이라는 또 다른 민란이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솔로몬 사후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제외한 타 지파들이 돌아서며 남유다왕국과 북이스라엘로 갈라지는 원인이 된다. 즉 왕조 분열의 원인은 솔로몬 때도 아니고 그 이전 다윗 왕때부터 그 씨앗이 심어진 셈이다. 반면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유다 지파의 강경파 민족주의자들은 잠시 꼬리를 내렸으며, 다윗의 예루살렘 복귀를 환영하거나 이후 터지는 세바의 반란 토벌에 적극 협조하면서 다시 탄탄해진 다윗의 왕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다윗의 유화책은 유다 지파로서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처사였고 이들이 본래부터 강경한 유다 민족주의 스탠스를 고수하던 다윗의 측근인 [[요압]]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하면서[* 다윗 진영으로 귀순한 사울 왕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을 요압이 쳐죽였을 때에도 다윗이 요압을 공개적으로 책망만 했을 뿐, 직위해제 같은 실질적인 견제는 하지 못했을 정도로 요압은 이전부터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유다 지파 내에 지니고 있었다.] 당시 다윗 왕의 견제로 잠시 직위해제당했던 요압이 국왕의 명령도 무시하면서 다시 이스라엘의 정계에 복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때문에 다윗은 자기 멋대로 신임 군대장관 아마사를 참살하고 세바의 반란을 진압해서 돌아온 요압을 어찌 건드리지도 못했고 훗날 자신의 뒤를 이은 솔로몬 대에 이르러서야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를 지지했다는 명목과 아브넬 암살의 건으로 요압을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의 자식 교육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결과물이기도 했다. 장남인 암논이 이복동생을 성폭행하는 인륜을 벗어난 짓거리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처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압살롬을 불러들이기로 했으면서도 일부러 압살롬을 반쯤 연금상태로 만들어 압살롬에게 의혹과 불신을 품게 한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 셈이니 사실상 암살롬의 반란은 다윗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윗이 왕이자 군인으로서는 뛰어났지만 한 집안의 가장이자 아버지로서는 영 아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다 제대로 사망하면서 다윗의 후계 서열은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갔고, 이 덕에 아도니야는 자신이 차기 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다윗의 뒤를 계승한 인물은 [[솔로몬]]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