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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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성경에서의 행적
2.1. 암논을 암살하다
2.2. 예루살렘으로 귀환
2.3. 반란을 일으키다
2.4. 반란이 진압되다
2.5. 반란 이후
3. 평가



1. 개요[편집]


Avshalom(אבשלום)
라틴어: Absalom

성경에 나오는 다윗왕의 셋째 아들. 어머니는 그술 왕 탈매의 딸, 마아가. 솔로몬의 이복 형.

꽤 치밀하고 권력욕이 큰 인물이었다. 다윗에게 가장 총애받았던 아들이지만, 여러 가지 복잡다단한 사건이 꼬이고 꼬인 결과 아버지 다윗 왕에게 반기를 들다가 파멸한다.

성경에 따르면 엄청나게 풍성한 장발[1]을 가진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미남이었다고 한다.

이름 '압살롬'의 뜻이 '압살할 놈'이라는 유머가 있는데 실제로는 '나의 아버지는 평안하다'라는 좋은 의미이다. 살롬(샬롬)은 개신교,기독교 등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2. 성경에서의 행적[편집]



2.1. 암논을 암살하다[편집]


압살롬의 위로는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한 명은 다윗이 헤브론에 있던 시절 아히노암에게서 낳은 장남 암논이었고, 둘째는 아비가일[2]의 소생인 길르압이었다. 하지만 길르압은 어릴 적에 죽었기에 압살롬의 왕위 계승 서열은 암논 다음이 되었고, 이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바는 없지만 둘의 사이가 그리 좋지만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성왕 다윗이 가진 최악의 단점[3]만 쏙 빼닮은 것 뿐 아니라 성격마저 희대의 개차반인 문제의 개망나니 이복 형이자 장남 암논이었다.

암논은 압살롬의 친동생이자 자신의 이복동생인 다말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는데, 잔꾀가 많은 친구 요나답[4]과 상의한 끝에 자기가 지금 아픈데 누이동생이 직접 주는 음식을 먹으면 나을 것 같다고 아버지 다윗에게 꾀병을 부려서 다말을 자기 침실에 끌어들이는 데에 성공, 아픈 오라비를 위해 다말이 직접 만든 음식을 가져다줬을 때 힘으로 눌러서 강간한다.

다말은 필사적으로 암논을 설득한다. 자신은 물론이고 암논에게까지 이것이 얼마나 마이너스적인 일인지 조목조목 설명하고 항변했으나 무시 당하고,[5] 암논이 '힘이 세므로 억지로 동침했다'고 성경이 친히 그의 폭력을 인증해준다.

이후 암논은 다말을 향한 마음이 그대로 식어서 오히려 미움으로 변해버리고[6] 자기 눈 앞에서 꺼지라고 윽박지르는데, 다말과 책임지고 결혼할 생각은 않고[7] 도리어 쫓아냄으로서 제대로 모욕+패악을 저지른다.

오늘날의 통념으로는 강간 사건의 '피해 여성을 위해' 가해 남성이 결혼 의무를 진다는 게 기이하게 보이겠으나, 고대 사회에서 이런 의무가 없다면 피해 여성의 앞길을 더 고통스럽게 할 우려가 있었다. 때문에 이 경우에는 아예 남성의 이혼 가능성까지 박탈하여 철저하게 여성의 생계를 보장하려 했다. 이렇게 생각할 때 버림받은 다말이 암논에게 한 말을 이해할 수 있다: "오라버니, 너무하십니다. 이제 저를 내쫓으신다는 것은 방금 저에게 저지르신 일보다도 더 나쁜 일입니다."(사무엘하 13장 6절, 공동번역)

다말은 지금 자신을 쫓아보내는 것이 방금 저지른 행동보다 더 악하다고 항변하지만, 암논은 듣지 않고 밖으로 패대기쳤다. 결국 다말은 입고 있던 채색옷을 찢고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8] 머리에 손을 얹고 울며 오빠 압살롬의 집으로 돌아갔다.

왕명을 받고 이복형을 간병하러 간 여동생이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오자 친오빠 압살롬이 단단히 빡친 것은 당연지사. 자초지종을 알게 된 압살롬은 더더욱 화가 났지만 일단 세간의 소문을 의식해 여동생인 다말에게 '네 오라버니 암논이 네게 이러했느냐? 그러나 누이야, 지금은 잠잠히 있고 이 일로 인해 더 슬퍼하지 말아라' 하고 달래며 자기 집으로 동생을 데리고 가서 여동생의 명예를 위해 세간의 눈길에서 철저하게 보호한다.

압살롬은 직접 암논을 찾아가거나 그에게 죄를 묻는 등의 말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이는 부왕 다윗이 첫째 왕자 암논에 대해서 어떠한 처벌을 할 것인지 상황을 지켜보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압살롬이 다말을 위로하며 한 말의 속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왕녀인 다말이 자신이 입은 피해를 부왕에게 직접 증언할 수도 있는 길을 '잠잠히 있으라'는 말로 막고, 다말의 비극을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서 유력한 후보였던 암논의 명예를 손상하는 스캔들로서 활용하기 위한 그 자신의 야심의 발로로 볼 여지도 있다. 물론 이후 행적을 보면 압살롬이 여동생 다말을 지극히 아낀 것은 분명하지만. 자기 딸의 이름조차 여동생 이름으로 지을 정도였다.[9]

암논과 압살롬과 다말의 아버지인 다윗 왕은 암논이 다말을 강간한 사건을 듣고 심히 노하였으나,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즉 노여움을 표현하기는 했는데 암논에 대해서 어떠한 처벌도 지시하거나 개입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까닭이 있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첫째, 다윗 자신이 우리야의 처인 밧세바를 빼앗아 불륜을 자행한 사람이라 아들의 강간을 징계할 도덕적인 명분이 없었다.

둘째, 다윗이 장자인 암논을 사랑하여 그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무엘상에서 유추할 수 있는 어린 시절에 대한 다윗의 트라우마도 이러한 대처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다윗의 가정환경이 워낙에 콩가루고, 형제들로부터 무시받고 자란 터라 '내가 크면 저런 아버지는 되지 말아야지'라는 생각이 잘못 작용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10]결과적으로 다윗의 내면에 있던 부정적인 요소들과 다윗의 가정에 내재되어 있던 불안요소[11]로 인해, 이 가정 안에서 벌어지게 된 여러 문제들과, 또 이를 해결해야 하고, 할 수 있는 가장 큰 권리와 의무와 힘을 지닌 '가장'이자 '부왕'인 다윗마저도 올바른 가해자 처벌 내지는 피해자 구제를 행하지 못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마지막으로, 암논의 스캔들은 여러 왕비와 후궁을 둔 아버지 덕에 왕위 계승권을 놓고서 쟁쟁한 이복형제들과 필연적으로 권력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었던 다윗의 왕자녀들 사이에서는 민감한 문제였다. 여동생을 강간하는 전대미문의 만행을 저지르고도 매우 뻔뻔스럽게 행동하는 철면피 암논, 그 망나니를 처벌하지 않는 아버지와 처벌 없이는 구제도 없기에 침묵할 수밖에 없는 다말,[12] 가엾은 여동생을 돌봐주고 바로 옆에서 지켜보며 여동생이 세간의 피해를 더 크게 입을까봐 착잡해하고 속으로 분노해야만 하고 있던 안타까운 압살롬의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까지 이 스캔들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사건 직후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다윗이 이 사건에 대한 징계와 처벌을 제대로 했다면 적어도 이후의 일들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침묵함으로서 '덮어두었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일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장되었던 것처럼 보였다. 압살롬은 암논의 범죄에 대해서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의 침묵은 이 사건을 잊어버린 것이 아니라 제대로 기억하고 칼을 갈고 있었다. 사실상 다말과 압살롬의 모친이었던 마아가가 아니라 오빠였던 압살롬이 다말의 실제적인 보호자를 자처하고, 자신의 궁으로 누이를 데려가 보호하는 것에 대해서 제동을 걸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신분이 월등하게 높은 부왕 다윗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다윗은 정말 끝까지 다말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압살롬으로서는 부왕에게 암논에 대한 처벌의지가 없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이것이 당시 궁정과, 특히 압살롬에게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암논이 차기 왕위계승자들 중 가장 가능성이 큰 장자로서 왕자들 사이의 실질적 경쟁자였다는 점이다. 즉 암논의 폭력 사건은 가정내 폭력인 동시에 왕가 내부의 권력다툼의 한 단면인 것. 사실상 1왕자였던 암논이 가정 내에서, 그것도 궁정내에서 저지른 분명한 패악에도 불구하고 국왕이 진노할 뿐 제대로 된 처벌을 일으킬 의사가 없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왕이 그만큼 암논을 귀애하는 것으로 읽히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었다.

압살롬이 동생이 당한 수모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니 차치하더라도, 이 스캔들을 통해 왕위계승 레이스에서 가장 큰 정적의 위세가 축소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런 압살롬에게 부왕으로부터의 암논에 대한 처벌 및 제재조치가 전혀 없었다는 것은 사적인 복수 차원을 넘어서 왕가내 왕위계승권자 모두에게 국왕의 의중이 누구에게 닿아있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즉 부왕이 분명한 처벌을 집행하여 암논에게 심중한 타격이 있어야 마땅한데, 다윗이 이를 행하지 않고 덮어두었다는 점이 도리어 많은 점을 시사해버리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는 다윗이 한 마디만 했다면 암논의 몰락을 향한 가장 큰 무기를 마련해놓고 있었던 압살롬에게 있어서는 속이 답답하다 못해 천불이 나는 상황이었다. 다말이나 자신이 먼저 나아가 암논을 고발하는 것보다 부왕이 암논에게 잘못을 묻는 것이 정치적으로 본인에게 훨씬 더 유리한 상황임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잠잠히 있고'라는 말을 통해서 다말을 침묵시키고 후일을 준비하던 것인데 그 '지금'이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부왕은 그 이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압살롬이 기대하던 '유리한 상황'은 오지 않았고, 오히려 왕가 내에서도 압살롬 본인의 집에서도 이 일은 쉬쉬하며 덮어지게 된 것이다. 분명한 폭력사태에 대한 처벌도 없고, 궁정내에서 암논에 대한 다윗의 묵인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처량히 지내는 여동생을 보는 압살롬의 심정은 편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 동안 압살롬은 입을 꾹 걸어잠그고, 다른 사람들이 보았을 때 그의 불편한 심기를 전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용히 지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암논 사건이 잊힐 즈음 압살롬은 성대한 잔치[13]를 열어서 암논[14]을 비롯한 다른 형제들을 초대했고, 암논은 별 의심 없이[15] 압살롬이 주관한 파티에 참석했다가 살해된다.

성경에 나온 바에 따르면 압살롬은 직접 암논을 살해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려서 암논을 살해했다. 압살롬이 부하들에게 암논의 살해를 명령하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담대히 용기를 내라"고 격려까지 하는데 전혀 죄책감이 없었음이 드러난다. 하기사 여동생의 원수인 동시에 이전부터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암논을 제거해야 할 이유가 더 늘어난 것과 다름없긴 했다.

갑자기 피튀기는 아수라장이 일어나자 당연히 다른 왕자들은 이게 무슨 일이냐며 기겁했고 자신들의 나귀를 타고 도망쳤다. 그렇게 다른 왕자들이 허겁지겁 돌아오는 도중에 "압살롬이 모든 왕자들을 죽였다"라는 오보를 접한 다윗은 옷을 찢으며 통곡을 했다. 신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요나답(암논에게 다말을 침실로 끌어들일 방법을 직접 알려 준 그 요나답이 맞다.)의 설명으로 인해 진정할 수 있었고, 이윽고 암논과 압살롬을 제외한 다윗의 다른 아들들은 모두 무사히 돌아온다. 당시 요나답이 한 말은 "임금님 걱정하지 마세요. 암논만 죽었을 겁니다. 암논이 자기 여동생을 욕보인 일로 인해서 압살롬이 많이 분노했거든요. 다른 왕자들은 괜찮을 겁니다" 였다.

그렇지만 적어도 이때까지는 압살롬은 인간말종짓을 저지른 형을 처벌할 의지가 전혀 없었던 부왕에게 실망은 했을지언정, 본인이 직접 사적 보복을 실행하여 가장 큰 정적을 처리했을 뿐이지 그외 다른 형제를 살해할 정도로 부왕과 제대로 척질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한편 암논을 죽인 뒤 압살롬은 바로 외할아버지인 그술 왕 탈매에게로 도망가 그곳에서 3년 간의 도피 생활을 시작한다.

2.2. 예루살렘으로 귀환[편집]


다윗은 왕으로서 살인자인 압살롬을 마땅히 처벌해야 하지만, 암논이 저지른 행위가 문제였다는 점은 인지하고 있었다. 실제로 암논 살해에 대한 요나답의 해명을 듣자 아무도 압살롬의 행위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렇다고 형제를 죽인 압살롬을 쉽게 용서하는 것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거기다 더욱 골치 아프게도 장남인 암논이 죽고 둘째인 길르압마저 세상에 없는 상황에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 1순위는 압살롬이 되어버린 상황이었다.

그러나 암논은 이미 죽고 압살롬은 살아 있으므로, 다윗의 마음은 내심 압살롬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나선 이가 있었으니 바로 다윗 왕의 조카이자 군대장관인 요압이었다.

그는 드고아에서 여인 하나를 불러다 과부처럼 위장시켜 다윗에게로 보내 이렇게 말하도록 시킨다. "저에게는 아들이 둘 있는데 들에서 둘이 서로 싸우다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그만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살인자인 아들을 죽이려 하는데 그 아들마저 없어지면 제게 남은 아들마저 사라지니 이를 어찌하련지요."

이 말을 들은 다윗은 여인의 아들을 죽이지 못하게 하겠다는 명령을 내릴 것을 그녀에게 약조하였고, 이에 여인은 감사를 표하면서 "그런데 왕께서는 그렇게 자비로우시면서 왜 내쫓긴 아들은 집으로 들여보내지 않으신지요?"라고 덧붙이자, 다윗은 이 여인이 요압이 보낸 사람이라는 걸 눈치채고 곧바로 요압을 불러 압살롬을 데려오라는 명을 내린다.

이로서 압살롬은 3년 간의 타향 생활을 마치고 그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지만 완전히 용서할 생각이 없었던 다윗은 자신 앞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다. 왕족이자 왕가의 사람이 왕궁 출입을 못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죄를 물어 사로잡아 끌고 오거나 처형하는 등의 형태로 본국에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막상 돌아온 이후에 아버지 앞에 나서지 못하는 '죄인'으로서의 위치에 놓인 압살롬 처지에서 보았을 때 이건 하나의 가혹한 처벌이었다.

그러나 다윗 처지에서는 자신의 잘못을 사죄한다거나 뉘우치는 기색을 보이지 않고 다시 이전 지위로 돌아오고자 하는 압살롬에게 주는 하나의 경고일 수 있었다. 즉 압살롬이 저지른 잘못은 잘못이니 돌이키기를 바랐을 뿐이었지만, 정작 압살롬은 이런 아버지의 뜻을 깨달을 만한 단서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윗의 문전박대는 압살롬으로 하여금 자신의 처신에 대해 의문을 품게 만든 계기가 되었고, 이런 생활이 2년 동안 계속되자 압살롬의 인내심은 슬슬 한계가 다다랐다. 그 사이에 압살롬은 네 아이의 아빠가 되어 있었다.[16]

그러다 문득 자신을 복귀할 수 있게 손을 써준 요압을 떠올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요압에게 몇 번이나 전갈을 넣어보지만 요압 역시 다윗과 마찬가지로 거들떠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압은 압살롬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그를 복귀시켜 준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다윗을 위해, 제1왕위 계승자가 해외에 도피행각을 벌이고 있는 불안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복귀시켰을 가능성이 높다.

안 그래도 아버지에게 제대로 된 대접도 못받는 상황이라 기분도 안 좋은데 요압마저 이런 식으로 나오자 제대로 빡친 압살롬은 결국 요압의 밭에다 불을 질러버리는 초강경수를 둔다.

자기 밭이 홀라당 타버리자 요압은 그야말로 빛의 속도로 압살롬의 앞에 나타나 따지는데, 압살롬은 가뜩이나 성질 뻗친 요압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고 더욱 언성을 높이며 "이따위 대접할 거면 그술에서 잘 먹고 잘 살던 난 왜 데려온 거냐?"이라고 아버지 다윗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며 자신의 처우를 고치길 요청한다. 당연하지만 외갓집에서 살다가 다윗이 죽으면 돌아와서 왕위를 계승해도 되는데 자기들이 불러놓고는 죄를 사해주는 것도 아니며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불만이었을 것이다. 거기다가 암논이 저지른 일은 덮어줬으면서 자신한테만 처벌이 있는 것도 부당하게 느꼈을 것이다.[17]

이러한 압살롬의 요청을 받아들인 요압은 다윗을 설득해 압살롬과 다윗을 화해시켰으며, 다윗 역시 압살롬을 다시 불러들여 용서하였다.

그러나 압살롬은 이미 서서히 삐뚤어지고 있었다.


2.3. 반란을 일으키다[편집]


다윗에게 용서받은 이후, 압살롬이 맨 처음 시작한 일은 왕을 대신해서 백성들의 송사를 들어주는 것. 당시 고대 사회에서 재판은 성읍 장로들로 시작하여 왕 앞에까지 나아가 진행하는 방식었는데, 제대로 제도가 확립되지 않은 상태였던 탓에[18] 그 틈새시장을 노린 압살롬은 ‘아버지가 송사를 들을 사람을 세우지 않았으니 내가 정의를 베풀겠다’라는 식으로 은근슬쩍 그 권한을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사사 시대 법까지 찾아보지 않더라도 왕까지 올 정도의 재판은 대개 지역에서 유력한 유지들이나 귀족들이 개입된 문제였을테니, 해결하는 과정에서 압살롬은 자신을 추종하는 세력을 은밀히 모을 수 있었다.

어느 정도 세력이 갖춰지자, 압살롬은 다윗에게 제사를 지내러 간다는 핑계를 대고 다윗의 구 거점이었던 헤브론으로 내려가 다윗의 책사였던 길로 사람 아히도벨을 비롯한 유다 지파의 유력자들을 모두 초청해[19] 그 자리에서 자신이 헤브론의 왕임을 선포했다.

특히 길로 사람 아히도벨[20]은 예전부터 유다 지파 내에 명망이 높은 당대의 명사이자 한때 다윗의 밑에서 책사로 일했던 인물로 그가 압살롬과 합류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그를 따라 압살롬에게 합류하는 이들이 점점 불어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다윗의 정치 기반이었던 유다 지파가 다윗을 등지고 압살롬에게 붙은 것이다.

이렇게 된 원인에는 다윗의 유화 정책이 컸다. 원래 유다 지파와 타 이스라엘 지파는 서로 이질적이 면이 많아 사울 왕 이전부터 거의 남남처럼 지내던 관계였다가 유다 지파 출신인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 되면서 억지로 붙은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골수 유다 민족주의자로서 철저한 정복을 주장했던 요압과는 달리 다윗은 유다 지파뿐만 아니라 전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해 사울 왕의 혈족인 므비보셋[21]을 비롯한 사울 왕의 잔당들과 타 지파들을 어떻게든 끌어 모으려고 노력했고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유다 지파에게 소홀해지면서 유다 지파, 정확히는 극우 성향을 지닌 유다 민족주의자들이 다윗에게 불만을 품던 상황에 나타난 것이 압살롬이었다. 그들로서는 훌륭한 대안이 나타난 셈.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이 다윗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요압을 비롯한 장병들은 수성전을 주장하지만 다윗은 수도에서 칼부림을 일으켜 백성들에게 피해를 입힐 순 없다고 판단해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 예루살렘을 빠져나갔고, 다윗은 요단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므비보셋이 예루살렘에 남아 압살롬과 결탁해 이스라엘의 왕권을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민다는 소식과,[22] 구 사울 왕의 잔당인 시므이에게 모욕을 받는 등 비참한 여정을 겪는다.[23][24] 덕분에 압살롬은 별 피해 없이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이 과정에서 다윗이 왕궁에 두고 온 후궁들을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강간하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으며,[25][26] 예루살렘을 점령한 직후 아히도벨은 다윗이 거점에 들어가 세를 회복하기 전에 소규모 최정예 추격군을 보내 야간 기습해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간언한다. 그러나 압살롬은 다윗의 조언자 중 한 사람이었던 하르키 사람 후새를 불러서 그에게도 조언을 구했는데, 그는 비록 도망치고 있는 적이지만 아직 휘하에 있는 역전의 용사들이 버티고 있으니 우리도 좀 더 병력을 모아서 제대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압살롬에게 말했다. 압살롬은 아히도벨과 후새의 조언 중 후새의 말을 받아들인다.


2.4. 반란이 진압되다[편집]


하지만 압살롬이 간과한 점이 하나 있었으니, 이 후새란 양반은 예루살렘에 다다른 압살롬을 환영하며 맞아들인 인물이지만 사실은 다윗이 예루살렘에서 도주하기 전, 예루살렘에 남아서 압살롬의 작전을 방해하도록 심어둔 다윗의 첩자였다. 즉, 압살롬은 다윗의 첩자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다윗의 추격을 주저하는 오판을 저지르고 만 셈.

다윗의 부하들은 수성전보다 평야전, 게릴라전 같은 다른 전투에 익숙했고, 다윗이 데리고 나온 군사들이 아무리 요압과 아비새의 정예군대라고 해도 워낙 급히 나와 재정비될 시간이 없었으므로 아히도벨의 말을 따랐다면 오히려 다윗이 궁지에 몰려 패했을지도 모른다.[27] 후새 뿐 아니라 대제사장 둘 사독과 아비아달도 언약궤를 다윗에게 가져가려다가 리턴, 압살롬을 심리적 기만에 빠지게 했고,[28][29] 대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과 공동대제사장 사독의 아들 아히마하스 둘을 전령으로 사용했다.[30] 결국 후새의 계략대로 다윗이 전력을 가다듬게 되자, 아히도벨은 압살롬이 패망할 것을 직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이 싸움은 질 게 뻔해.. 압살롬은 실패하고 다윗이 다시 왕권을 찾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주변을 정리한 뒤 목을 매 자결한다.

사실, 상식적으로 봐도 아히도벨의 작전이 후새의 작전보다 낫다는 건 자명해보인다. 압살롬은 선빵을 매우 성공적으로 날려 예루살렘까지 일거에 점령한 상태고, 다윗은 아직 거점을 잡지 못하고 도주 중인 상태였다. 여러 모로 적은 규모[31]의 빠른 추격군만 편성해서 왕을 체포하고 하루 속히 반란을 성공시켜 사로잡은 왕을 인질로 아직 복속되지 않은 지방들을 복속시키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게다가 아무리 이전에 압살롬이 민심을 사로잡았다한들 다윗이 딱히 폭정을 한 것도 아닌지라, 애초에 이렇다할 명분도 없이 왕 되고 싶어서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은 ‘아비를 친 아들’이라는 심각한 정통성 문제를 안고 있다.

오히려 후새의 말대로 시간을 들여 지역에서 군대를 총집결시켜 붙으려면 다윗에게는 아직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지역으로 도망가 세력을 회복해서 맞서게 되는 시간을 벌어주게 된다.[32][33] 성경에서는 압살롬을 멸하기 위해 하나님이 아히도벨이 내놓는 좋은 책략이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압살롬이 아히도벨이 아닌 후새의 작전을 입안한 것으로 서술한다.[34]

후새는 작전이 채택되자 사독과 아비아달에게 요단 강을 건너라는 말을 전하고, 요나단과 아히마하스가 빠르게 다윗에게 가서 첩보를 전달한 덕분에 다윗은 요단 강을 건너 압살롬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35] 요단 강을 건너 마하나임에 도착한 다윗은 요압을 중심으로 토벌군을 결성하기 시작했고, 이에 호응하듯 온 이스라엘 지파에서 다윗을 구하기 위한 군대가 속속 합류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토벌군 구성이 완료되자, 다윗은 요압, 아비새, 잇대[36]에게 지휘권을 주어 반란군 토벌의 명을 하달했고, 그 와중에 압살롬을 너그럽게 봐달라 요청하면서 자신이 직접 반란군 토벌에 앞장설 것을 천명하나 군사들의 만류로 후방에 남기로 한다.

이윽고 압살롬의 반란군은 에브라임 수풀에서 다윗의 군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이들이 상대하는 이가 다름 아닌 다윗 왕의 오른팔이자 이스라엘 최고의 명장요압오랜 세월 동안 다윗과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역전의 용장들이었다는 것이 이들의 패인이었다. 게다가 서술은 수풀이지만 사실상 늪지대였다. 아무리 압살롬이 확실한 숫적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해도 전쟁 경험이 압도적으로 높은 다윗의 정예병들을 상대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달걀로 바위치기와 같았다.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압살롬 측의 완패였는데 무려 20,000명이 도륙을 당했고 늪지에서 죽은 자가 칼에 맞은 자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이를 지켜보던 압살롬은 혼비백산이 된 채 노새를 타고 도주하기 시작했는데[37]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랑하던 긴 머리카락[38]이 상수리나무의 가지에 걸리는 바람에[39]노새는 그대로 빠져나가 버리고 압살롬은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려 버렸다.[40] 그리고 이 광경을 다윗의 군사 한 사람이 목격하고 그대로 요압에게 보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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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살롬의 최후

출정하기에 앞서 다윗은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킨데다가 자기 후궁까지 건드렸는데도 혈육의 정에 압살롬을 죽이지 않도록 부하들에게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반란군의 주동자를 살려두면 분명 후환이 있을 거라 판단한 요압은 이를 보고한 병졸에게 "그를 죽였다면 큰 상(은 10개와 띠 하나. 여기서 띠는 경우에 따라 1계급 특진으로도 해석함)을 받았을텐데 왜 안 죽였냐?"며 문책하고[42] 손에 단창 셋을 쥐고 가서 압살롬의 심장을 찌른 다음 부하 열 명과 함께 압살롬을 에워싸고 쳐죽였다. 압살롬을 죽인 후, 요압이 수풀 가운데 큰 구멍을 판 다음 시체를 던지고 그 위에다 돌무더기를 쌓자[43] 이를 본 반란군이 기세가 꺾여 각자 도주한다.

사독의 아들 아히마하스가 자신이 승전의 기쁜 소식을 왕에게 알리겠다고 요압에게 말하자 요압은 왕자가 죽었으니 기쁜 소식이 아니라면서 에티오피아 사람 하나를 불러 그 사람이 다윗에게 전보를 보내도록 한다. 하지만 사독의 아들 아히마하스가 다시 요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좋으니 자신이 뒤따라서 달리게 해 달라고 부탁한다.[44] 요압이 왜 굳이 달려가겠다 하느냐고 묻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요압은 그래라 하면서 보낸다. 아히마하스는 에티오피아 사람을 앞질러서 먼저 달려간다. 다윗 왕은 한 사람이 달려오고 있다는 말에 기쁜 소식이라 추측했고 뒤에 또 다른 한 사람이 달려온다는 말에 그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라 추측했다. 파수꾼이 아히마아스가 온다 말하자 다윗 왕은 그는 좋은 사람이니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올 것이라 평한다.

아히마하스는 인사를 한 뒤 승리의 소식을 다윗 왕에게 전하면서 다윗 왕을 축복하고, 왕이 압살롬의 소식을 묻자 요압이 자신을 보낼 때 큰 소란이 일어나는 것은 보았지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대답하고[45] 왕은 물러나라고 명해서 아히마하스는 물러난다. 그 뒤 들어온 에티오피아 사람은 아히마하스와 마찬가지로 승전보를 전한 뒤, 다윗 왕은 그가 압살롬의 상황을 알 거라 판단했는지 그에게도 압살롬의 상황을 물어보자 에티오피아 사람은 임금님의 원수들과 임금님을 해치려고 일어난 자들이 모두 그 젊은이처럼 되기를 바란다며 저주한다.

그 말을 들은 다윗은 군사들에게 다 보이는 성문 위 누각으로 올라가 압살롬의 죽음을 애도하며 크게 통곡했다. "오 압살롬, 오 압살롬! 내 아들 압살롬, 내 아들아! 너 대신 내가 죽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압살롬, 오 압살롬, 내 아들아!" 얼마나 슬프게 울었는지 병사들이 왕의 통곡을 듣고 승전했음에도 사기가 꺾여 막사로 슬그머니 도망갈 정도였다.

요압이 다윗에게로 가서 '오늘 모든 백성들이 왕을 위해서 싸웠는데 왕이 반란군 수괴의 이름을 부르며 슬퍼하고 있으면 싸워 이긴 백성들은 뭐가 됩니까?'라고 간언하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친히 위로하길 권한다. 다윗은 요압의 말을 따라 반란군 토벌에 공을 세운 장병들을 치하하고 한때 반란군에 가담했던 이들을 용서하는 유화책을 펼치는데 문제는 가장 큰 공을 세운 요압은 군대 사령관의 직위를 박탈하고 압살롬의 군대 사령관이었던 아마사[46]를 기용해버림으로서 자신의 명령을 어긴 것에 대한 문책과 동시에 너무 커져버린 요압의 권력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마사를 기용함으로서 뭇 유다 지파의 마음을 돌리려는 속셈도 깔려있었다.

여하튼 반란군의 수장인 압살롬의 사망과 다윗의 반란군 잔당들에 대한 포용 및 뒤처리가 끝나면서 압살롬의 반란은 종결된다.


2.5. 반란 이후[편집]


압살롬의 반란은 당시 다윗 치세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겹쳐서 일어난 사건으로, 특히 다윗의 유화책에 대한 유다 지파의 반발이 빚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 사건 이후 다윗은 유다 지파 역시 각별히 신경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오히려 지금까지 어찌어찌 무마하고 있던 타 이스라엘 지파들의 불만 세력이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며, 이는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복귀하던 도중 유다 지파가 단독으로 다윗을 환영하는 일로 인해 타 이스라엘 지파들이 격분한 사건을 통해 윤곽을 드러내고 있었다.[47] 결국 유다 지파와 타 이스라엘 지파와의 갈등 조율 속에 맺힌 애로사항은 뒤이어 세바의 반란이라는 또 다른 민란이 봉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솔로몬 사후 유다 지파와 벤야민 지파를 제외한 타 지파들이 돌아서며 남유다왕국과 북이스라엘로 갈라지는 원인이 된다. 즉 왕조 분열의 원인은 솔로몬 때도 아니고 그 이전 다윗 왕때부터 그 씨앗이 심어진 셈이다.

반면 압살롬의 반란이 진압되면서 유다 지파의 강경파 민족주의자들은 잠시 꼬리를 내렸으며, 다윗의 예루살렘 복귀를 환영하거나 이후 터지는 세바의 반란 토벌에 적극 협조하면서 다시 탄탄해진 다윗의 왕권을 지지했다. 그러나 다윗의 유화책은 유다 지파로서는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처사였고 이들이 본래부터 강경한 유다 민족주의 스탠스를 고수하던 다윗의 측근인 요압의 손을 들어주기 시작하면서[48] 당시 다윗 왕의 견제로 잠시 직위해제당했던 요압이 국왕의 명령도 무시하면서 다시 이스라엘의 정계에 복귀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 때문에 다윗은 자기 멋대로 신임 군대장관 아마사를 참살하고 세바의 반란을 진압해서 돌아온 요압을 어찌 건드리지도 못했고 훗날 자신의 뒤를 이은 솔로몬 대에 이르러서야 다윗의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를 지지했다는 명목과 아브넬 암살의 건으로 요압을 제거할 수 있었다.

또한 압살롬의 반란은 다윗의 자식 교육이 얼마나 막장이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결과물이기도 했다. 장남인 암논이 이복동생을 성폭행하는 인륜을 벗어난 짓거리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별 다른 처벌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압살롬을 불러들이기로 했으면서도 일부러 압살롬을 반쯤 연금상태로 만들어 압살롬에게 의혹과 불신을 품게 한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 셈이니 사실상 암살롬의 반란은 다윗 스스로가 자초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윗이 왕이자 군인으로서는 뛰어났지만 한 집안의 가장이자 아버지로서는 영 아니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다 제대로 사망하면서 다윗의 후계 서열은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에게 자연스럽게 넘어갔고, 이 덕에 아도니야는 자신이 차기 왕이 될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다윗의 뒤를 계승한 인물은 솔로몬이었다.


3. 평가[편집]


야훼께서 예언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셨다. ......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너를 사울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다. 나는 네 상전의 딸과 아내들까지 네 품에 안겨주었다. 나는 온 이스라엘과 유다의 딸들까지 너에게 주었다. 그래도 모자란다면 어떤 여자든지 더 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너는 나를 얕보며 내 눈에 거슬리는 짓을 했느냐? 너는 헷 사람 우리야를 칼로 쳐죽였다. 암몬 군의 칼을 빌려 그를 죽이고 그의 아내를 빼앗아 네 아내로 삼았다. 네가 이렇게 나를 얕보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으니, 너의 집안에는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으리라.' 야훼께서 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네 당대에 재난을 일으킬 터이니 두고 보아라. 네가 보는 앞에서 네 계집들을 끌어다가 딴 사내의 품에 안겨주리라. 밝은 대낮에 네 계집들은 욕을 당하리라.'"

사무엘하 12장 1절.7- 11절, 공동번역


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압살롬의 반란과 왕가의 구성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비극들은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를 빼앗고[49], 자신의 죄가 드러날 것이 두려워 오히려 충신인 우리야를 속이려고 시도하고, 그게 안 되자 끝내는 죽인 것에 대한 천벌로 풀이된다.

예언자 나단은 직접 다윗에게 찾아가 그의 죄를 모조리 하나하나 지적하고 정죄한 후 무서운 선고를 내린다.

"네가 이렇게 나를 얕보고 헷 사람 우리야의 아내를 네 아내로 삼았으니, 너의 집안에는 칼부림이 가실 날이 없으리라. 바로 네 당대에 재난을 일으킬 터이니 두고 보아라. 네가 보는 앞에서 네 계집들을 끌어다가 딴 사내의 품에 안겨주리라. 밝은 대낮에 네 계집들은 욕을 당하리라. 너는 그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했지만, 나는 이 일을 대낮에 온 이스라엘이 지켜보는 앞에서 이루리라."

이후 다윗 왕가에서는 암논의 강간사건을 시작으로 폭력과 살인과 범죄가 끊이지를 않는다. 장남(암논)은 반인륜적인 죄를 지은 후 칼에 맞아 죽고, 삼남(압살롬)은 반역과 패륜을 저질러 죽고, 사남(아도니야)은 솔로몬 즉위 후 반역 혐의로 처형당한다. 그리고 솔로몬은 말년에 우상숭배에 빠졌고, 그 아들 르호보암 대에는 예로보암에 의해 10지파가 이탈하여 나라가 반토막이 난다.

굳이 르호보암 대로 넘어가지 않아도, 다윗이 왕위에 앉아있던 시절만 보아도 다윗 왕가는 참 문제가 많았고 그 중 가장 큰 비극이 바로 이 압살롬의 반역이었다.

여러 모로 문제가 많은 아버지였어도 자식들을 향한 사랑만은 분명히 진심이었던 다윗에게 있어서 자기로 인해 자녀들이 다치고 죽임당하는 나날들을 지켜보는 가운데 괴롭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압살롬의 사망에 대해 다윗이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 차라리 내가 네 대신 죽었더라면. 오, 내 아들 압살롬아." 하고 울었던 것은 단순히 압살롬을 사랑해서 그가 저지른 범죄(나라가 분열됨)도 눈에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우리야의 가정을 파탄놓은 자신의 죄에서 이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음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1] 자른 머리가 자그마치 3㎏이나 되었다고 한다. 상세히 말하자면 성경상의 기록으로는 자른 머리를 달아보니 200세겔이라고 하는데 현재 학자들의 추산으로 1세겔이 약 11.42g에 해당한다고 하니, 200세겔이라 함은 현재 중량으로 약 2284g, 즉 2.284㎏이었다는 것. 작은 아령을 머리에 달고 다녔던 셈이다.[2] 다윗이 용병 생활하던 시절 양털 깎는 축제에서 양치기들을 보호해줬으니 양식 좀 달라고 손 벌렸다가 퇴짜 맞았던 지역 토호 나발의 아내로, 이후 나발이 급사한 후 다윗이 거둬들였다.[3] 다윗 항목에도 나와 있지만 다윗은 여자관계가 굉장히 문란한 편에 속했다. 더군다나 부하인 우리야를 죽이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빼앗은 사건은 비교적 최근에 터진 사건이며, 예언자 나단의 지적과 다윗 스스로도 죄를 인정하여 회개하는 등, 이미 온 이스라엘에 암암리에 다 알려진 상황.[4] 다윗의 형인 시므아의 아들이다. 즉, 암논과는 사촌지간으로 잔꾀가 많아 온갖 모략을 잘 꾸민다.[5] 이때 다말은 "임금님께 청하십시오. 그 분께서 저를 오라버니에게 주시기를 거절하지 않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긴 했는데 이게 실제로 허락될 리는 없고, 이성을 잃은 암논을 잠시 진정시키려는 의도로 한 말에 가깝다. 레위기 18장에서 완곡적으로 쓰였지만 이복형제를 포함한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조항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도 원래는 이복형제였고 야곱도 자신의 이종사촌들인 레아와 라헬과 결혼했다고 하지만, 이때는 아직 율법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으니까 논외.[6] 소위 말하는 현자타임이 오자 마음이 식어버린 것이다. 암논이 다말에게 품은 감정이 사랑이라기보다는 단순 성욕임을 알 수 있다.[7] "한 남자가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만나 억지로 함께 자다가 붙잡힌 경우에는 그 처녀와 잔 남자가 처녀의 아비에게 오십 세겔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 몸을 버려놓았으므로 내보내지 못하고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한다."(신명기 22장 28-29절, 공동번역); "어떤 사람이 아직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꾀어 범했을 경우에는 납폐금을 모두 지불하고, 그 처녀를 아내로 맞아들여야 한다. 그 처녀의 아버지가 자기 딸을 그에게 절대로 못 주겠다고 하면 그는 처녀를 맞을 때 내는 납폐금과 맞먹는 금액을 물어야 한다."(출애굽기 22장 15-16절, 공동번역)[8]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은 동방 문화권에서 극한의 슬픔과 고통의 표현이다.[9] 자신이 직접 부왕에게 암논의 악행을 고발하는 대신 부왕이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보고자 했다는 점에서 압살롬의 두뇌가 이 사건이 미칠 영향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움직였는지를 추론할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하다. 아래에 나온 다윗의 대처를 보면 다말이 직접 증언한다고 해도 큰 효력이 있었을지는 의문이다.[10] 다윗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결혼을 적어도 두 번 이상 한 것으로 보아 여자관계가 역시 복잡했으며, 다윗이 정실 부인의 자식이 아니라는 설도 꽤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11] 여러 부인과 그로 인한 이복형제의 발생했다.[12] 단 다말의 침묵은 보호자이자 대언자의 위치에 서게 된 오빠 압살롬이 침묵하는 것으로 함께 해석되며 여기에는 압살롬이 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의미도 있지만.. 어찌됐건 성경은 그녀가 "그의 오빠 집에서 처량하게 지내니라"라고 표현했다.[13] 압살롬이 소유한 목장에서 양털 깎는 겸 잔치를 벌였다. 목축이 주요 산업이었던 당시 이스라엘로선 양털 깎는 날은 그 집의 경사나 다름없었다. 마치 옛날 우리나라에서 김장하는 날엔 돼지고기도 삶고 여러가지 음식도 해서 잔치를 벌인 것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14] 원래는 아버지인 다윗을 초대하려고 했다가 다윗이 바쁘다며 거절하자 '그러면 아버지. 1왕자인 암논 형을 대타로 보내주세요.'라고 청하여 초대했다. 일부러 암논을 초대하기 위해 어차피 거절할 것이 뻔한 다윗을 한 번 거쳤으리라는 추측도 있다.[15] 다윗 왕이 압살롬에게 "왜 암논을 보내달라고 하는거니?"라고 되묻긴 했다. 그러나 압살롬이 재차 부탁해서 결국 암논과 다른 형제들 모두 참석하도록 보낸다.[16] 아이 중 고명딸의 이름을 자기 여동생의 이름을 따서 '다말'이라고 지었다. 누이를 어지간히 아끼는 동시에 아직 누이의 일을 심중에 두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는 부분. 참고로 누이 다말과 공통되게 압살롬의 딸인 이 다말도 얼굴이 아름다운 여자라는 서술이 있다.[17] 사무엘하 14장 32절에 압살롬이 요압에게 내가 만일 죄가 있으면 왕이 나를 죽이시는 것이 가하니라는 서술이 있다. 정말로 자신의 죄에 대한 자각이 없었던 듯 하다. 실제로 구약시대의 이스라엘에서 처녀를 욕보인 강간범은 돌 맞아 죽는 게 율법에 맞는 일이긴 한데 암논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긴 했다. 문제는 그 처벌을 시행하는 게 나라의 정의를 집행하는 국왕이자 아버지인 다윗의 소임인데 압살롬이 법정에서 재판이나 허가도 받지 않고 사적 제재를 가했다는 점이다.[18] 이스라엘은 신생국가로 사사 시대의 법 체계에서 왕국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사울이 1대 왕인 시절이 있었다지만 오랜 내전으로 제도가 무너져 재정비를 해야 했고, 다윗은 재위기간 동안 주변의 이민족들과 오랫동안 전쟁을 하러 돌아다니느라 상대적으로 내부 정리에 덜 신경썼다. 제도가 완전히 정비되는 것은 남유다의 여호사밧 왕 때의 일이다.[19] 귀족들을 데리고 가는 와중에도 압살롬은 자신의 반역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압살롬의 치밀함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모습.[20] 게다가 그는 다윗이 우리야에게서 뺏은 그 밧세바의 할아버지가 되는 인물이다! 가만히 있었으면 솔로몬 왕의 외척이 될 수 있었으나, 당시 그는 밧세바 사건 등을 시작으로 다윗에게 불만이 많았기에 압살롬과 합류했다. 덤으로 당대 이스라엘 지역 최고의 지략가이자 책사이기도 했다.[21] 혹은 므피보셋(원래 이름은 므립바알). 다윗의 친우이자 사울왕의 아들이었던 요나단의 하나 남은 아들이다. 난리통에 두 다리를 못쓰게 된 불구였으며, 사울 세력의 평정 이후 다윗이 왕이 되고 이 므비보셋을 수소문 끝에 찾아내어 자신의 왕자들과 똑같이 대우하며 밥도 같은 곳에서 같이 먹도록 대접한다. 당시 장애인에 대한 인권의식 같은건 당연히 없는 고대 중동이었고 므비보셋 자신도 자신을 "죽은 개"라고 비유할 정도로 처량한 상황이었지만 다윗은 므비보셋을 매우 아꼈다. 이는 사울 세력에 대한 정치적 포용책일 수도 있지만, 다윗에게는 생명도 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하고 아낀 절친 요나단의 마지막 남은 자손이었으니 개인적으로도 매우 각별했을 듯.[22] 물론 이 사실은 반역 진압 후 허구로 드러났다. 즉, 모반 음모는 므비보셋의 종 시바의 모함이었고, 므비보셋이 다윗의 피난 기간 동안 보여왔던 다윗을 향한 걱정과 애도의 표시는 진심임이 드러났는데, 더러운 옷차림은 금방 만들 수 있어도 수염의 길이만큼은 결코 속일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바의 고변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는 당일 일어났으므로, 그 일을 바로 므비보셋이 알게 되었다면 그 당일부터 수염을 깎지 않았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성경 본문에도 다윗은 므비보셋의 무고함을 100% 신뢰하지 않고, 므비보셋에게서 빼앗아서 시바에게 준 재산의 절반만을 반환하겠다고 한다.[23] 시므이는 다윗에게 돌을 던지며 "가거라 가거라"라고 욕했는데, 이것은 비단 "꺼져라"라는 의미 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이 고향에서 꺼져라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당시 예루살렘을 비롯한 이스라엘 지역을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터전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서는 모욕을 넘어 저주에 가까운 최악의 욕설이었다. 쉽게 말하면 너는 하느님께 선택받은 우리 백성의 일원이 아니다라고 말한 것.[24] 훗날 므비보셋은 자신의 시종인 시바가 모함했다고 해명하여 위기를 모면했고, 시므이는 요압의 동생이자 다윗의 측근이었던 아비새가 전날의 일을 들이대며 기어코 죽이려던 것을 다윗 앞에서 싹싹 빈 덕에 간신히 목숨을 구명했지만 훗날 솔로몬에게 빌미가 잡혀서 처형당했다(사실은 다윗이 노환으로 죽기 전에 솔로몬에게 시므이를 처단하라는 유언을 미리 내렸다).[25] 왕의 소유인 후궁을 자신이 취함으로써, 이제 자신이 왕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는 훗날 압살롬의 이복동생인 아도니야가 다윗의 첩인 수넴 여인 아비삭을 달라고 청했다가 솔로몬에게 제대로 찍혀서 처형당한 원인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여동생이 강간당했을 때 그토록 분노했던 압살롬이 자기 아버지의 후궁들을 강간한다.[26] 이는 아히도벨의 책략이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에 귀족들은 더 이상 애매하게 다윗과 압살롬 사이에서 저울질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확실하게 압살롬의 편을 들게 되었다.[27]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후새는 압살롬의 공명심을 자극했다. 백성들을 모아 다윗이 있는 성에 밧줄을 매달아 강으로 끌고가 수몰시킬 정도라고 압살롬을 추켜세웠다.[28] 물론 다윗은 '갖고 돌아가라. 하느님이 날 불쌍히 여기신다면 내가 다시 언약궤 앞에서 예배하게 해 주시겠지'라는 식의 이야기는 했지만, 종교사회에서의 대제사장과 성물이 자신 쪽에 온단 얘기는 압살롬에게 길조로 여기기에 충분했다.[29] 이스라엘이 가나안 정벌 당시 앞세운게 이 언약궤다. 언약궤를 상실한 엘리 일가가 어떤 꼴을 겪었는지를 돌아본다면 이 언약궤는 이스라엘 입장에선 엑스칼리버 만큼이나 보증된 승리 플래그였던 셈.[30] 이스라엘이 종교 중심 사회였기에 좋든 싫든 성막에 모일 수밖에 없었고, 자연스럽게 성막 안에서는 온갖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특히, 대제사장의 자제인만큼 고위직 및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가까이 했을테니 압살롬 진영의 소식을 생생하게 알 수 있었다.[31] 그마저도 만 단위다! 패주하는 다윗의 일행을 뒤쫓아 붙잡기에는 충분하다.[32] 2600여 년 뒤 대륙의 반대쪽 끝에 있던 어떤 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에서도 '(반군이) 바로 추격하여 어가를 사로잡는다면 상책이고, 도성에 머무른다면 하책'이라는, 이것과 매우 흡사한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여기서도 반란군이 도성에서 밍기적대다가 관군의 한타에 모랄빵이 나 패주하며 일을 그르치고 만다. 승기를 잡았을 때 왕이라는 중요한 변수를 '삭제'하지 않고, 기를 모으느라 시간을 허비하면 망한다는 게 반란의 흔한 공식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정통성을 가진 측은 치세의 노하우가 있는데다 공을 노리고 많은 군사가 모여들지만, 급하게 일을 벌인 반란군은 스스로 분열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33] 중국의 삼국시대에 고평릉 사변으로 지방으로 피신한 조상과 황제 일행에게 지방으로 가서 군사를 모으라고 조언하는 환범과 반란으로 수도를 접수했지만 조상과 환범과 황제가 없어 정통성과 명분이 부실했던 사마의의 상황과 굉장히 유사하다.[34] 분명 아히도벨의 의견이 씹힌 건 신의 도움이지만, 후새 자체도 말을 참 그럴 듯하게 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독자 시점에서는 압살롬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당사자는 꽤나 고민한 끝에 내린 결정이었을 것이다.[35] 이 때 한 청년이 그 두 사람을 보고 수상하게 느껴 압살롬에게 가서 알렸지만 이미 때가 너무 늦은 상태였다.[36] 가드 (그 유명한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의 고향) 출신의 전향한 이민족으로, 다윗이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떠돌다 이제 겨우 정착한 사람이 또 무슨 방랑을 하겠다는 건가? 그러지 말고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게."라고 귀향을 권했지만 왕이 어느 곳에 계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함께 하겠다며 끝까지 따라간 충신이다.[37] 말은 당연히 전쟁에서 많이 쓰였으므로 예언자들은 대개 나귀나 노새를 타고 다녔다(예수도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나귀를 타고 들어갔다.). 압살롬이 예언자도 아니면서, 말을 타야 할 전투상황에 노새를 탔다는 게 길조일 리가 없다.[38] 삼손 항목에서 알 수 있지만 긴 머리카락은 '신 앞에서의 정결함'을 상징한다. 물론 형제를 죽이고 아비를 거역한 압살롬에겐 하등 의미도 없었지만.[39] '인간의 무력함과 신의 권능'을 강조하는 성경에선 특정 인물의 자랑거리를 이런 식으로 사망 플래그나 클리셰로 써먹는 부분이 좀 있다(아까 말한 삼손의 머리카락처럼). 물론 단점을 중요한 순간에 강점으로 바꾸는 클리셰도 존재(왼손잡이 에훗이나 작은 소년 다윗).[40] 이스라엘에서 나무에 달린다는 것은 저주를 받았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대제사장 등은 예수를 율법에 따라 돌로 쳐죽이지 않고 '저 사람은 메시야가 아니라 저주받은 사람이다!'라는 의미로 굳이 재판같지도 않은 재판을 벌여 나무(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41] 그도 당연할게 요압은 다윗의 수하이며 다윗은 이미 사울의 죽음을 전해온 이방인 출신의 군인과 사울의 후손을 통수 때리고 참수해 온 두 사람을 처형시킨 적이 있다. 사울과 사울의 후손도 야훼의 기름부은 혈통이며 그들의 죽음을 가져온 자에게 마땅히 죽음으로 심판한 다윗이 과연 야훼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자신으로부터 태어난 제 친자식을 죽인 자를 살려둘 리가 없었다. 물론 요압은 이 당시엔 살아남지만 말이다.[42] 여기서 그 병졸이 요압에게 대답한 말이 걸작이다. 병졸은 요압에게 "은 천 개를 받는대도 안 할 겁니다. 왕이 압살롬을 해하지 말라고 한데다가 만약 내가 죽였더라면 당신(요압)도 나를 적대시할 게 뻔한데요?"라고 말했다.[41] 이 대답에서 요압의 성격이 잘 드러난다. 이 병졸은 만약 자신이 압살롬을 죽였다면 그 공은 자신의 몫으로 돌아가겠지만 그 근본은 다윗의 부탁을 어기고 왕의 아들을 죽인 것인데다가, 압살롬을 죽였을 경우에 요압이 책임 회피용으로 자신을 내세워 다윗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게 만들 거라는 걸 눈치챈 것이다. 요압의 속셈을 간파한데다가 지위가 낮음에도 대장군 요압 앞에다 대놓고 독설하는 걸 보면 요압 휘하에서 오랫동안 지내본, 지금으로 치면 원사급의 병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43]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것은 저주의 상징이다.[44] 당시엔 전보를 달려가서 전했다.[45] 다윗이 압살롬을 지켜달라고 군사들 모두에게 부탁했지만 요압이 압살롬을 죽이고 시체훼손까지 저지른 것을 알고 다윗이 염려되어 자신이 가겠다고 했지만 요압이 다른 전령을 보내자 그래도 같이 가고 싶다면서 고집을 피우고 먼저 달려가 다윗에게 압살롬은 잘 모르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물론 요압의 전령도 오고 있었기 때문에 상황상 다윗이 알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굳이 먼저 가서 다윗에게 소식을 전한 것을 볼 때 조금이나마 충격을 덜어주려고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다윗이 그가 온다는 것을 듣고는 그는 좋은 사람이니 기쁜 소식을 가지고 올 것이라 평한 것을 볼 때 다윗은 그에 대해 상당히 신임하고 있었고 사독의 아들 아히마하스의 다윗 왕에 대한 충심이 상당히 깊은 것으로 추측된다.[46] 다윗의 또 다른 누이인 아비가일의 아들로 요압과는 사촌 관계이다.[47] 그도 그럴 것이 압살롬의 반란 당시 토벌군에 지원한 이들은 타 이스라엘 지파들이었는데 유다 지파 혼자서 생색을 내고 있으니 불만을 품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유다 지파는 압살롬의 반역에 가장 크게 가담한 지파였다.[48] 다윗 진영으로 귀순한 사울 왕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을 요압이 쳐죽였을 때에도 다윗이 요압을 공개적으로 책망만 했을 뿐, 직위해제 같은 실질적인 견제는 하지 못했을 정도로 요압은 이전부터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을 유다 지파 내에 지니고 있었다.[49] 성경을 보면 첫 만남 자체가 정상적인 만남이 아니라 혼자 목욕하던 여자를 보고 끌고 온 것이므로 권력과 위압에 의한 성범죄일 뿐, 합의 하의 관계도 아니다. 게다가 상대가 본인의 충신의 아내였으니 그 남편과 아내 둘 모두에게 엄청난 죄를 저지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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