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쿠타가와상 (문단 편집) == 개요 == {{{+5 [ruby(芥,ruby=あくた)][ruby(川,ruby=がわ)][ruby(龍,ruby=りゅう)][ruby(之,ruby=の)][ruby(介,ruby=すけ)][ruby(賞,ruby=しょう)]}}} [[일본]]의 [[문예춘추]](文藝春秋)에서 제정한 문학상. [[1927년]] 사망한 소설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업적을 기려 만들어졌다. 정식 명칭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芥川龍之介賞)이다. 문예춘추를 창간한 키쿠치 칸(본명 키쿠치 히로시)이 [[나오키 산주고]]의 사망을 계기로 [[1935년]] [[나오키상]]과 함께 제정하였다. [[1938년]]부터는 일본문학진흥회에서 이어받아 주최하고 있다. [[태평양 전쟁]] 종전 무렵 몇 년간 시상이 중단되기도 하였으나, [[1949년]] 부활하였다. 매년 상반기와 하반기로 나누어 1월과 7월에 두 차례 시상한다. [[순수문학]] 부문, 신인 및 무명 작가에게 주로 시상되며 신인상으로는 일본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 간혹 일본 최고 권위의 문학상이라는 말만 듣고 왜 요즘에는 신인 작가들에게만 수여되는지 의아해하는 경우도 있는데, 아쿠타가와상은 처음부터 신인상이었다. 수상자에게는 상금 100만 엔, 그리고 부상으로 [[회중시계]]가 수여되며 수상작은 매년 문예춘추 3월 호와 9월 호에 실린다. 신인의 등용문으로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을 받는다. 아쿠타가와를 한국 독음으로 읽어 개천상이라고도 부른다. 일본 순수문학계 최고 권위의 신인상인 만큼 수상자들 중에는 일본 문학계의 쟁쟁한 작가들이 많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이노우에 야스시]], [[마쓰모토 세이초]], [[엔도 슈사쿠]], [[아베 코보]], [[오에 겐자부로]], 마루야마 겐지, [[무라카미 류]] 등이 이 상의 수상자이다. 그리고 [[망언|다른 의미]]로 유명한 극우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도 수상자이다. 어릴 때부터 그 쪽에 재능이 있던 건지 수상작 <태양의 계절>도 당시 논란이었다. 불건전한 묘사와 비도덕적인 행위 때문이라고. 찬성 측은 "패기 있는 묘사가 좋다"고 평하고, 반대 측은 "풍속 소설에 지나지 않는 흥행용 B급 소설"이라 평가 절하한다. 다만 이것은 언제나 있는 문단계 보수성의 문제에 의한 부분도 포함하고 있어 맥락이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이것도 재능은 재능일 거다. 이시하라는 수상 당시인 1955년 23세[* 23세 3개월]로 당시의 최연소 수상자였다. 이 기록은 1958년 [[오에 겐자부로]]가 23세[* 23세 5개월]의 나이로 수상하면서 깨졌고, 1999년 수상자인 [[히라노 게이치로]]가 오에 겐자부로와 같은 23세였지만 생일이 더 빨라서[* 23세 6개월] 다시 한 번 깨지게 된다. 그리고 2003년 하반기에 20세의 [[가네하라 히토미]], 19세의 [[와타야 리사]]가 공동 수상을 하면서 최연소 기록을 대폭 낮췄다. 참고로 가네하라는 수상작이 데뷔작이었고, 와타야는 17세에 발표한 데뷔작이 상당한 호평을 받으면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져 있었다. 한편 이시하라는 심사위원으로 있을 때, 146회 후보작들이 형편없어서 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한 적이 있다. 결국 심사위원들의 투표로 다나카 신야, 엔조 도로 수상자가 결정되었는데, 다나카는 '사양하는 게 예의지만 나는 예의가 없으니 받겠다', '할아버지는 신당 창당에나 신경쓰세요'라는 말로 이시하라를 비꼬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모 인터뷰의 제목은 "도지사 각하님과 의원 나리들을 위해, 받겠습니다"이다. 153회에는 개그맨인 마타요시 나오키가 수상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개그맨이라는 특수성 등이 작용해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중 일본 내에서 최다 부수인 229만 부 이상을 판매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수상자는 대부분 [[일본인]]이지만, 현재까지 [[재일교포]] 4명과 [[중국]] 작가 1명이 수상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66회 수상자 이회성, 100회 수상자 이양지, 116회 수상자인 [[유미리]], 122회 수상자인 현월은 [[재일교포]]이고, 139회 수상자 양이[* 본명은 류웨이(일본식 독법을 따를 시 류초)로, 2012년에는 일본 국적을 획득해 [[이중국적]]인 상태이다.]는 재일 중국인이다. 특히 양이는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최초의 수상자이다. 한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를 매우 존경하던 [[다자이 오사무]]는 아쿠타가와의 이름을 딴 이 상에 욕심을 냈지만 두 번 후보로 올랐을 뿐 수상하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심사위원이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와 설전이 오가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다자이 오사무]] 항목 참조. [[무라카미 하루키]]도 후보에 두 번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이 분야의 최고는 아베 아키라(阿部昭, 1934년 9월 22일~1989년 5월 19일)라는 작가인데, 후보 6번[* 1963년 하반기 50회 "둥지를 떠나다(巣を出る)", 1965년 상반기 53회 "유년 시편(幼年詩篇)", 1966년 상반기 55회 "달빛(月の光)", 1967년 하반기 58회 "도쿄의 봄(東京の春)", 1968년 하반기 60회 "미성년(未成年)", 1969년 상반기 61회 "위대한 날(大いなる日)". 전부 한국에는 번역되지 않았다.]에 오르고도 수상에 실패했다. 일본 내에서는 이 상을 받으면 수상 작품 이후로 변변한 작품이 나오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있다고 여겨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