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쌍계사 (문단 편집) === 상세 === [[724년]]([[신라]] [[성덕왕]] 23년) [[의상(신라)|의상]]의 제자인 대비(大悲), 삼법(三法)이 창건하였다. [[당나라]]에서 유학중이던 삼법은 귀국 전 중국 [[선종(불교)|선종]]의 육조(六祖) [[혜능]]의 정상(頂相, [[머리]])을 모시고 [[삼신산]]의 곡설리 갈화처(谷雪里 葛花處)[* 눈쌓인 계곡에 칡꽃이 피어있는 곳]에 봉안하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러나 귀국 후 이곳저곳을 다녀보았지만 그런 땅은 찾지 못했고 [[지리산]]까지 당도하였다. 그때 호랑이가 나타나 길을 안내했고 지금의 쌍계사 금당(金堂)[* 현재의 육조정상탑전(六祖頂相塔殿)이며 혜능의 정상은 지금도 이 자리에 있다.] 자리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그곳이 꿈에서 계시한 자리임을 깨닫고 혜능의 정상을 평장(平葬)한 후 옥천사(玉泉寺)라는 절을 지은 것이 유래가 되었다고 설화로 전한다. 그후 [[840년]]([[신라]] [[문성왕]] 2년)에 당나라에서 선종의 법맥을 잇고 귀국한 진감선사(眞鑑禪師, 774~850)가 퇴락한 옥천사를 오늘날의 대가람으로 중창하여 선(禪)을 가르치고 [[범패]]를 보급하였다. 나중에 [[헌강왕]] 때 한 고을에 같은 이름의 절이 두 개가 있어[* [[경상남도]] [[고성군(경상남도)|고성]]에도 옥천사(玉泉寺)가 있는데 쌍계사보다 훨씬 전인 670년, 의상이 창건하였다. 지금은 쌍계사의 말사로 존속하고 있다.] 혼동을 일으켰으므로, 문전에 흐르는 쌍계라는 시냇물에 연유하여 쌍계라는 호를 내려 주고 하고 [[최치원]]으로 하여금 '쌍계석문(雙磎石門)'의 4자를 쓰게 하여 바위에 새겼다. 그 후 두 차례나 화재로 절이 불탔으나 1632년([[인조]] 10년)에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 임진왜란 이후 쌍계사를 포함하여 완주 [[송광사]], [[법주사]], [[화엄사]] 등 전란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대사찰의 중창 불사를 주도해 조선 후기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다. 승군을 이끌고 [[남한산성]]도 축성했다.]을 비롯한 여러 승려들에 의하여 복구, 중수되었다. [[차]]와도 인연이 깊은 절인데,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金大簾)이 [[828년]]에 차의 종자를 가지고 귀국한 후 지리산에 심었는데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차시배지(茶始培地)로서, 쌍계사 계곡 아래에 위치해있다. 그후 진감선사가 재배 면적을 늘리고 보급하였다고 한다. 쌍계사는 진감선사와 [[초의선사]]의 다맥을 잇는다는 의미에서 매년 법회를 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