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심덕부 (문단 편집) == 생애 == 유력 가문인 덕에 [[음서]]로 관직 경력을 시작하고 고려 말 문하시랑찬성사, [[문하시중]], [[판문하부사]] 등을 역임한 재신(宰臣)이다. [[진포해전]]과 [[위화도 회군]]에 참여했으며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옹립한 [[흥국사(개성)|흥국사]] 9공신 중 한 명이다. 조선 건국 후 회군공신 1등에 봉해졌다. [[한양]] 천도를 결정한 뒤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의 판사 직에 올라서 궁궐([[경복궁]])과 [[종묘]]의 건립을 지휘했다. 이후에 판문하부사, [[영삼사사]]를 역임하고 [[정종(조선)|정종]] 때 [[정승|좌정승]]을 역임한다. 사극에서 비중이 없어 대중에게 [[심온]]의 아버지 정도로나 알려져 있는데 사실은 여말선초에 손꼽히는 거물이었다. [[위화도 회군]] 때 [[조민수(고려)|조민수]], [[태조(조선)|이성계]] 바로 뒤의 3인자였으며 고려 군부에서 [[최영]]과 이성계 다음가는 존재감을 지녔다. 흥국사 9공신으로서의 작위에서도 이성계와 더불어 둘뿐인 [[백작]]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군(작위)|군]]이었다. 여기에 동생 심원부가 [[이제현]]의 제자로 신흥 유신쪽에도 인맥이 풍부했기에 고려말 온건파와 급진파 모두 그를 끌어들이려 애썼다.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 전후로 공양왕과 이성계 사이에서 간 보는 행적을 보임에도 급진파 세력은 [[변안열]]처럼 심덕부를 제거하지 못하고 [[윤이·이초의 옥사]]에 엮어 겨우 3개월 유배를 보내는 데 그쳤다. 공양왕 측에서도 그를 문하시중에 임명하며 끌어들이려 애썼고, [[정성군|세자 왕석]]의 명나라 입조에 동행시킬 만큼 신뢰했다. 이성계조차 그런 그를 못 건드려서 조선 개국 후 자신의 둘째 딸 [[경선공주]]와 심덕부의 6남 심종을 혼인시켜 심덕부를 회유하는 방식을 택했다. 첫째 아들 심인봉이 군부 1인자인 [[의흥삼군부]] 도총제 직을 역임했고, 4남 심징이 경창부윤, 6남 심종이 이성계의 사위, 7남 심정이 공양왕의 동생 [[왕우(고려)|정양군 왕우]]의 사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심종이 귀양간 [[회안대군]]과 은밀한 모의를 해도 조선에서는 심종을 죽이지 못하고 귀양 보내는 선에서 심종의 모든 죄상을 덮어줬고, 심정이 [[양녕대군]]에게 매를 바치는 등 그의 비행을 부추겼음에도 심정이 군부 중심으로 다진 막강한 입지를 무시할 수가 없어 심정을 동지총제까지 올렸다. 화룡점정은 다섯째 아들인 [[심온]]으로, [[소헌왕후]]의 아버지, 즉 [[세종(조선)|세종]]의 장인이 되었다. 이처럼 심덕부 대에 [[청송 심씨]] 가문은 강력한 권세와 거대한 군맥을 형성했으나, 이들의 세력은 외척에 대한 [[태종(조선)|태종]]의 경계심을 키우는 요인이 되어 후일 심온 등 가문의 주요 인물들이 숙청되고 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