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흥무관학교 (문단 편집) === [[청산리 대첩]] 참전과 [[일본 제국|일제]]의 강제 폐교 === [youtube(b4AmOqWn8Z8)] [[1919년]] 12월 북간도 지역의 군정부(정의단과 길림군정사의 연합체)가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로 개편되자 서로군정서(서간도의 군정부)는 몇 차례에 걸쳐 북로군정서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을 파견했다. 이후 북로군정서의 핵심 직책을 맡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묘 홍범도 부대의 대한의용군으로 편성되어 청산리 전투에 참전했다. 이와 같이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북로군정서의 지휘관이나 대한의용군의 일원으로 [[홍범도]] 부대와 합류하여 [[청산리 대첩]]의 최전선에서 전투를 치르면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일본 제국|일본]]과 그들의 지원을 받던 만주의 [[봉천군벌]]은 신흥무관학교의 명성이 높아지자 이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일본 제국|일제]]는 [[1920년]] 5월부터 중일(中日) 합동수색을 시작으로 삼원포에서 애국지사와 가족들을 체포하거나 살해했으며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홍범도부대에 대패한 일본군도 이를 복수하고자 양민학살과 독립군 초토화 작전을 앞당겼다. 따라서 서간도에서 신흥무관학교를 유지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결국 [[1920년]] 6월 서로군정서와 신흥무관학교 관계자들은 잠시 몸을 피하고 [[지청천]]·[[김동삼]]이 이끄는 400여 명의 교성대(신흥무관학교 졸업생 무장부대)가 청산리 전투에 참전하게 되었다. 1920년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추진한 '외교독립'의 환상이 깨지면서 민족운동 역량이 강한 [[만주]] 지역이 독립운동의 전략적 기지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서간도 군정부도 1921년 5월 본부를 길림성 연길도(延吉道) 액목현(額穆縣)[*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자오허시(蛟河市).]으로 옮겼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도 독판 이상룡과 부독판 여준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다시 전개하는 한편 이들이 주체가 되어 액목현 황지강자(潢池崗子)[* 현 [[중화인민공화국]] [[지린성]] [[지린시]] 자오허시(蛟河市) 난강즈향(南崗子鄕).]에 신흥무관학교를 계승한 검성중학원(劍成中學院)을 설립했다. 이밖에도 길림성의 신흥촌에 신흥무관학교 분교를 세우거나 3회 졸업생인 이규동은 길림성 연길도 영안현(寧安縣) 신안촌(新安村)[* 현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성]] [[무단장시]] 하이린시(海林市) 신안조선족진(新安朝鮮族鎭) 신안촌(新安村).]에 신창학교(新昌學校)를 개설하는 등 모교에서 배운 교과목과 교육이념, 그리고 교가까지 신흥무관학교의 것을 따라 하며 그 맥을 이어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