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흥무관학교 (문단 편집) == 후신들 == || {{{+1 {{{#ffffff '''신흥무관학교 및 국외 독립운동단체 타임라인'''}}}}}}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 [[신민회]][br](1907~1911) ||<-3><|3>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br](1896~1909) || ||<-3> '''↓''' || ||<-3> [[경학사]][* 신흥강습소(신흥무관학교)는 [[경학사]]의 하위조직으로 출범하였다. 비유하자면 경학사는 학교의 [[재단]]과 같은 셈. [[경학사]]는 [[1914년]]에 중국-일본의 탄압과 자금난으로 해산되었고 이 재단 역할을 부민단(扶民團)이 인계받았으며 부민단은 다시 [[1919년]] 한족회(韓族會)로 통합된다.][br](1911~1914)[br]→ 부민단,,(1914~1919),, → 한족회,,(1919~1920),, || ||<-3> '''↓''' ||<-3> '''↓''' || ||<-6> {{{#ffffff '''신흥무관학교[br](1911~1920)'''}}} || ||<-2><|3> || '''↓''' || || '''↓''' || '''↓''' || || [[대한민국 임시정부]][br]서로 군정서[* 한족회 산하의 군정부(軍政府)가 임시정부 산하기구로 개편된 것이다. 이후 대한통의부에 합류하였지만 결국 통의부가 임정 산하로 일부 오면서 개편되었다.][br](1919~1922) || '''→''' || [[대한민국 임시정부|대한민국 임시정부[br]육군무관학교]][br](1920~1921) || 광복군 사령부[* 신흥무관학교의 재단인 한족회가 1920년 통합되면서 출범한 단체다.][br](1920~1922) || || '''↓''' || '''↙''' || || '''↓''' || ||<-2> 검성중학원[* 한족회 재단과는 무관하지만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많이 참여하였다고 한다.][br](1922~1930) || [[대한민국 임시정부]][br]육군주만참의부[* 일명 참의부. 대한통의부 일부가 합류하여 출범한 단체이다. 이후 정의부와 합쳐 국민부를 설립했지만 표현이 난해해 각주로 대신 설명한다.][br](1924~1929) ||<-2> '''←''' || 대한 통의부[br](1922~1924) || ||<-2><|3> || '''↓''' ||<|3><-2> || '''↓''' || || [[대한민국 임시정부]][br](1919~1948) || 정의부[br](1924~1929)[br]'''↓'''[br]국민부[br](1929~1934)[br]'''↓'''[br][[조선민족혁명당]][br](1935~1938) || || '''↓''' || '''↓''' || || 신흥전문학원[* 신흥무관학교 설립자이자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소속이었던 [[이시영(정치인)|이시영]]이 재개교하였다.][br](1947~1949)[br]'''↓'''[br]신흥대학[br](1949~1960)[* 1955년에 종합대학인 "신흥대학교"로 승격함.] || '''←''' || [[대한민국 임시정부]] / [[한국광복군]][br](1940~1946) ||<-2> '''←''' || [[조선의용대]][br](1938~1942) || || '''↓''' ||<|3> || '''↓''' || '''↘''' || || '''↓''' || ||<|2> [[경희대학교|{{{#ffffff '''경희대학교'''}}}]] ||<|2> [[대한민국 정부|{{{#ffffff '''대한민국 정부'''}}}]] {{{#ffffff / }}} [[대한민국 육군|{{{#ffffff '''대한민국 육군'''}}}]] ||<|2> '''→''' ||<|2> [[육군사관학교|{{{#ffffff '''육군사관학교'''}}}]] || 조선의용군[br](1942~1945) || || [br] || }}} || 그야말로 '''국외 [[독립운동]]의 중심이자 시작'''이라는 표현이 전혀 아깝지 않다. 이는 [[1910년]] [[경술국치]]의 거의 직후부터 국외에서 투쟁하여 [[일제강점기|당시 한반도의 상황]]에 비해 탄압이 적어 세를 키울 수 있었고 [[교육기관]]이자 [[독립운동가]]를 양성하는 군사학교라는 점도 많은 학생 및 [[독립운동가]]를 모집하기 용이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들 때문에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수립 이전까지는 경학사를 위시한 신흥무관학교가 [[독립]] 투쟁의 중심으로 자리하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다. 후신 단체들의 면면을 보면 아예 직접적으로 유관한 단체들[* 재단 역할인 "한족회"가 이어진 경위]만 따져도 정의부, [[조선의용대]] 등 [[만주]]지역 독립운동 단체의 절반 정도가 그 후신에 해당할 정도다. 이보다는 약하게 연결된 단체들[* 한족회 소속 군정부가 서로 군정서로 이어진 경위] 중 하나는 자그마치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법통이자 전신인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되겠으며 실제 임정 산하 무관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고도 한다. 이 외에도 신흥무관학교 출신 졸업생들이 뻗어나간 곳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인데 수백 명의 졸업생들이 [[김좌진]] 장군의 남로 군정서에 합류하여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으며 [[김원봉]], [[나석주]] 등이 [[의열단]]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주요 단체들만 열거해도 [[대한독립군단]], [[한국 독립군]], 신민부, 고려혁명군, 주만통군부 등등 무수히 많으며 이들 졸업생들의 대부분은 [[8.15 광복]] 이전까지 계속 투쟁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이에 따라 현재 신흥무관학교를 직접적으로 잇는 단체는 기능과 역할 면에서 크게 '''[[경희대학교]], [[육군사관학교]], [[대한민국 정부]]/[[대한민국 육군]]'''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이 세 단체는 [[http://www.sh100th.org/sub2.html?Table=ins_bbs1&mode=view&uid=52&page=1|신흥무관학교 110주년 기념 후원기관]]들을 기준으로 현재에 어느 정도의 [[계승]] 의식을 갖는 단체들을 기준으로 한 것이며 이외에 역사적 연결성이 있는 [[용인대학교]]를 포함하면 네 가지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