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집 (문단 편집) == [[삼국사기]]와의 관계 == 학계에서는 삼국사기 13~17권에 해당하는 고구려본기 다섯 권[* 참고로 고구려본기는 총 10권이며 이중 [[보장왕]] 본기가 2권 분량이다.]이 신집을 일부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고구려본기를 보면 [[동명성왕]]-[[미천왕]] 사이의 기록은 등장하는 인명이나 인물들의 발언이 세세하게 언급되며, 고구려 내부사정도 잘 나온다. 이 파트 기록들의 전개 방식도 단순한 사실의 나열 수준이 아니라 각자 하나의 '이야기'가 되는 것들이 많다. 반면 동시기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의 경우 분량이 고구려본기의 절반에 불과하다. 하지만 미천왕 이후 고구려본기의 경우 전부 중국 기록이라 왜곡이 심한 편이다. 반면 그 후대인 [[고국원왕]]대부터 기록이 급감[* 정확히는 미천왕 원년 10월부터 기록이 급감한다.]하기 시작하며, 중국 측 역사서로부터 인용한 기록들 뿐이다. 그나마 있는 기록도 어떤 일이 언제 있었다는 내용의 간략한 사실에 대한 기록이 대부분이다. 또한 광개토대왕릉비에 있는 신라 원병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중국 기록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광개토대왕대[* 물론 삼국사기 편찬 당시 광개토대왕릉비의 존재가 잊힌 상태라 신라를 구원한 사실 등이 빠지긴 했다.]까지는 당대의 사료도 조금 있는 것으로 보이나 삼국사기 자체기록도 상대적으로 풍부한 편이지만, 장수왕대부터는 말 그대로 조공 기록이 다수를 차지한다고 할 정도로 내정기록이 줄어든다. 즉, 전자와 후자는 삼국사기를 편찬하던 고려시대 당시 참고한 옛 기록 원전이 다르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영양왕]] 본기의 [[고구려-수 전쟁]]의 기록이나 [[보장왕]] 본기의 [[고구려-당 전쟁]]의 기록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중국사서를 옮겨온 수준이 되버린다. [[연개소문]]은 아예 중국 사서의 [[피휘]]를 미처 감안하지 못하고[* 당나라 시대 사서들은 자기들 황제 [[고조(당)|이연]]의 이름 연자를 피휘하다보니 천개소문으로 적었는데 당나라도 멸망하고 이 피휘를 지킬 필요가 없어진 고려시대의 삼국사기 편찬자들이 옛날 당나라 사서를 참고하다가 이게 피휘로 바꿔적은것인 줄 모르고 삼국사기에도 그냥 천개소문이라고 쓴 것이다.] 천개소문으로 강제개명되는 수준(...)이며[* '연개소문'이라는 실제 이름이 밝혀진 것은 조선 후기에나 이르러서이다.] 전투와 관련된 기록들도 대부분 중국측 규모나 피해는 상세하나 고구려는 정확한 규모가 명시되지 않는다. 학계에서는 그 이유로 신집의 기록이 고구려본기에 반영된 점을 들고 있는데, 이는 신집의 원사료인 유기가 소수림왕대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신집이 5권이라는 것과 고구려본기 초반 5권이 동명왕-미천왕 시기의 내용을 실었다는 사실로도 이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다만 [[동명성왕]]과 [[광개토대왕]] 사이의 세손차이[*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이 동명성왕의 13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광개토대왕비]]에는 17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물론 17세손을 직계가 아닌 (3대 [[대무신왕|대주류왕]]으로부터의) 왕계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긴 하지만.] 같이 오류가 있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완벽하게 반영된 것은 아닌듯 하다.[* 이부분에서는 세손이 혈족을 뜻하는게 아니라 왕계를 뜻하는 것이라고 풀이하는 학자들도 있다. 실제로 대무신왕(3대)으로부터 17대 후의 왕이 광개토왕(19대)이기 때문.] [[분류:한국의 역사책]][[분류:고구려의 도서]][[분류:없어진 역사책]][[분류:영양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