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신상초 (문단 편집) == 생애 == 1922년 [[평안북도]] [[정주시|정주군]]에서 태어났다. 신의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구제고등학교|후쿠오카고등학교]][* 현재는 [[규슈대학]]에 합병] [[문과]] 병(丙)류[* 이 당시 일본의 구제고는 반을 편성할 때 학생들의 외국어 선택 여부에 따랐는데 갑(甲)류는 [[영어]], 을(乙)류는 [[독일어]], 병(丙)류는 [[프랑스어]] 선택자로 구성이 되었다. 이 중 신상초 본인은 [[프랑스어]]를 학교에서 배울 외국어로 선택해서 문과 병류 소속 학생이 된 것. 여담으로 이 당시 배웠던 [[프랑스어]]를 활용해서 해방 이후 [[블레즈 파스칼]]의 <팡세>를 직접 한국어로 번역하기도 했다.]를 졸업한 뒤, 1942년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하였다. 1944년 [[일본군]]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에 배치되었다가[* 일본군에 징집되어 전선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같은 신의주고보 출신이자 훗날 고려대 총장이 되는 [[김준엽]]과 만나 우정을 쌓았다. 신상초도 일본군을 탈출하여 독립군에 가담하고자 했으나, 무사히 원하는 대로 임시정부 광복군에 합류한 김준엽과 달리 이쪽은 어떻게 꼬여서 조선의용군쪽으로 넘어간 케이스. 사실 [[김준엽]]은 임시정부에 합류하기 전에 [[중국 국민당]]계열의 유격대에 포획되었는데 이게 '''신의 한수'''가 된 것이다. 반면 신상초는 탈출하고 나서 [[중국 공산당]]계열의 팔로군에 합류를 하게 된 건데 여기서부터 스텝이 제대로 꼬여버린 것.][* 이 사람의 회고록 <탈출>을 읽어보면 [[일본군]]에 합류하기 전부터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물이 나오게 할 정도로 온갖 개고생이란 개고생은 다 한걸 알 수 있다. [[도쿄제국대학]] 유학시절에는 [[치안유지법]] 혐의로 50일동안 유치장에 갇혀버리질 않나, 고등계 형사의 압력때문에 강제로 학병에 지원하질 않나, [[일본군]]에 합류하고나서는 관심병사로 찍혀서 온갖 가혹행위의 피해자가 되질 않나, 직속 상관이 민간인 중국 여성들을 학살하고 강간하는 꼴을 보질 않나... 게다가 탈출 이후에도 개고생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 그의 고보동창 [[김준엽]]이 츠카다 부대에서 동대학 선배를 상관으로 만나 비교적 심한 고생을 안 겪고 탈출도 잘 풀린 것과 비교된다.][* 여담으로 일본군 복무시절의 행적이 기록된 일본육군전시명부에 따르면 탈출 전에 [[간부후보생]] 시험에 합격해서 [[을종간부후보생]]이 되었다고 한다. 유수명부에는 일등병이었다고 기록되어있다.] [[팔로군]] 지역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여 [[조선의용군]]에 편입되어 [[8.15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때 [[옌안]]의 항일군정대학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마오쩌둥]]의 [[정풍운동]]을 직접 몸으로 겪기도 하였다. 1946년 초 조선의용군을 이탈하여[* 조선의용군은 광복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국공내전]]에 참전하였다. 수기에 따르면 만주까지 도보로 행진해서 고향을 바로 눈앞에 두고있었으나 이당시 3.8선 이북을 점령하고있던 소군정이 조선의용군의 무장해제를 강요하는바람에 만주땅에 계속 발이 묶여있었다고 한다.] 고향으로 귀환하였다가 [[북한]] 당국에 체포되어 강제노역 생활을 하였다.[* 회고록 <탈출>에 의하면 본인처럼 [[일본군]] 학병으로 차출되었다가 탈출하여 [[중국공산당]] [[팔로군]]이나 [[신사군]]의 일원이 되었다가 스리슬쩍 이탈하여 집으로 돌아간 이들 중 상당수가 [[김일성]]체제 북한에서 정치사범 및 반동분자로 찍혀 콩밥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도중에 이탈했다는 이유로 콩밥을 얻어먹게 한 장본인이 다름아니게도 본인과 한때 중국 [[옌안]]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가 북한에 귀국한 [[연안파]] 일원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1949년 초 [[월남]]하였고 이후 [[반공]]주의자가 되었다.[* [[공산주의]] 체제에서 워낙 개고생을 한 탓인지 몰라도 이 사람의 탈출 수기 <탈출>의 내용도 전반적으로 [[반공]] 색채가 굉장히 심한 편. 하지만 같은 학병출신이었다가 똑같이 중국 [[팔로군]] 지구로 탈출한 친구 엄영식의 수기 <탈출>(신상초의 수기와 제목이 똑같다)에 따르면 신상초는 오히려 열렬 마르크스주의자였다가 도중에 돌변했다고 한다.[* 사실 신상초 본인도 <탈출>에 [[도쿄제국대학]] 재학시절만 하더라도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한 적이 있었다고 적어놓기는 했다.] 다만 엄영식의 수기는 2005년에 출판된 수기인만큼 신상초의 <탈출>보단 반공 색채가 많이 옅은 편인데다 [[중국공산당]] [[신사군]]에 대해서도 용맹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편. 다만 엄영식또한 신상초처럼 공산당체질이 아니었던 탓에 도중에 몰래 이탈해서 집으로 돌아갔다가 [[조선의용군]]에서 몰래 이탈한 혐의로 콩밥을 얻어먹어서 도중에 월남했다. 신상초와 같이 몰래 이탈하는 과정에서 [[만주]]에 거주하고 있던 [[문동환]] 목사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게다가 월남을 시도할 때 엄영식과 동행했는데 심문과정에서 엄영식만 무사히 통과하고 신상초는 그대로 붙들려서 강제수용소로 보내져버렸다고…] 안타깝게도 월남하는 과정에서 두 아들과 아버지를 이북 땅에 놓고 온 바람에 생이별을 하게 되었다.[* 이후 신상초가 1989년 세상을 떠났을 때 유족 명단을 보면 부인과 딸 한명만 올라와있다.] 이후 [[서울대학교]] 강사, [[성균관대학교]]·[[한양대학교]]·[[경희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한편,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역임하고 [[사상계]] 편집에 참여하는 등 언론인으로도 활동하면서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비판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모두 낙선하였다. 사실 [[1961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1955년)|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마포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기도 했다. 그러나 불과 석 달 뒤에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 국회가 해산되었다... 1966년 [[동양방송]]에 출연해 [[삼성그룹]]의 [[사카린 밀수 사건]]을 옹호하다가 물의를 빚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반박정희에서 친박정희 성향으로 정치성향이 바뀌는 행보를 보인다.[* 그래도 오랫동안 친[[장면]] 정치인으로 활동해왔던 전적때문인지 친박정희성향으로 정치성향이 바뀌고나서 출간한 수기 <탈출>에 [[장면 내각]]은 무조건 실패한 정권은 아니었다고 [[장면]]을 옹호하는 글을 개재하기도 했다.] 1970년 [[김지하]]의 오적 필화 사건 때에는 [[검찰]]측 증인으로 나서서 오적은 [[공산주의]] 문학이라고 매도하기도 했다. [[10월 유신]] 이후 1976년부터 1980년까지 제2기 및 제3기 [[유신정우회]]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1980년에는 [[전두환]]의 신군부에 협력하여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원을 역임하고,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1984~1988년까지 북한학회 회장, 1985년 [[한국반공연맹]] 이사장을 맡았으며, 1989년 2월 26일 오후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