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식민사관 (문단 편집) ==== 반론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는 고려시대를 중세, 조선시대를 근세로 규정하면서 이를 비판하고, 정체성론에 대항하기 위해 내재적 발전론을 통해 한민족의 주체적인 발전이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자본주의 맹아론]]도 그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근대 태동기라는 시대적 구분이 존재하며 [[한국근현대사]]과목에서도 본격적인 근현대사를 다루기 이전에 근대의 태동이라는 단원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 그런데 굳이 역사의 흐름을 반드시 고대, 중세, 근대의 틀로 규정해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 자체가 서양사관의 아류이기 때문에 이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일어나고 있다.고려시대를 고려시대라고 하면 되지, 왜 굳이 중세라는 서양개념에 때려맞출 필요가 있느냐는 것. 다만 이러한 왕조사적 시대구분은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순환론적 역사관의 함정에 빠지게 되므로 근본적인 문제가 있고, 그렇다고 아직 고대-중세-근대의 3시대 구분법을 대체할 만한 확실한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편 종교에 기반한 귀족중심적 국가 체계는 다양한 부족들이 가장 강력한 세력을 중심으로 연합을 했던 고대 국가 체계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러한 시대 구분을 단순히 서양 중심의 역사관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서양적인 관점에서의 '중세 봉건제'의 모습은 애초에 카톨릭 문화권 중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유럽 일각에나 들어맞는 것이고, 당장 프랑스 바로 옆의 신성로마제국이나 스페인 만 해도 이들의 사회상과는 일정한 차이점이 있었다. 게다가 그 중요한 르네상스를 일으키는 이탈리아만 해도 사회적으로 고대 이래의 공화정적 도시국가 전통이 면면히 내려오고 있는 상태였다([[베네치아 공화국]]이라던가). 특히 이런 점에서 근래 주목받고 있는 게 [[동로마 제국]]의 사회상이다. 하물며 폴란드나 헝가리와 같은 동유럽의 역사는 어떨까? 즉 일국사에 기초한 정형화된 틀로 중세를 해석하는 것이 '세계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일본은 [[에도 막부]]의 봉건제 이후 [[메이지 유신]]으로 넘어가는 구도가 봉건제의 중세→자본제의 근대로 가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가는 듯' 으로 보이나, 일본의 봉건제와 중국 주나라의 봉건제, 중세 유럽의 봉건제는 다 같은 '봉건제' 이지만 그 실상은 많이 다르다. 중국 주나라는 혈연적 봉건제, 중세 유럽은 쌍무계약적 봉건제인 반면, 일본의 봉건제는 상하관계가 뚜렷한 체제이기 때문. 유럽의 봉건제에서, 주군이 봉신에게 '할복하라!' 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고중근 역사관을 덮어씌우기가 쉽지만, '''세계의 역사를 획일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더욱이 조선 왕조는 관료제 사회였으므로 정치체제만 놓고 보면 근대 국가로 봐도 될 정도다.[* 이 과거제로 정립된 동아시아의 실적주의 관료제가 마르크스 이론의 가장 큰 반론으로 마르크스 이론에 따르면 근대에나 나올법한 실적주의 관료제가 고대 말 중세 초기에 등장해 정착한 것은 마르크스 사관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즉 획일화된 잣대를 들이민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애초에 일본이 근대화를 하게 된 배경은 자산가 계급의 자발적인 각성과 시민 운동이 아니라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끌어낸 개항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물론 후에 자산가들이 주가 되어 의회를 구성하기도 했지만 막부 체계를 붕괴시키고 나서 귀족 체계를 모방해 도입함으로써 만민 평등에 기반하는 서양의 시민 사회와는 거리를 두게 되었고 재산 수준에 따라 차별적인 투표권을 부여해 어정쩡하게 모방한 수준에 그치게 되었다. 당장 그 [[후쿠자와 유키치]]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것을, 왜 현실은 그렇지 못한가"하고 개탄한 현실이 당시 일본 사회가 실질적인 불평등 사회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되려 당시 일본은 근대가 아니라 근대와 중세의 중간 쯤에 있었고, [[다이쇼]] 시대를 거치고 나서야 근대적인 평등주의를 실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그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고, 결국 패전에 이르고 만다. 물론 이와는 별개로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게 된 일본의 내재적인 요인 역시 충분한 것은 사실이다. 이 부분은 본 식민사관 문서와는 거리가 있으므로 메이지 유신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다. 사실 백번 양보해 이게 사실이라 해서 이것이 일본 제국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해줄 수는 없다.이는 식민사관의 다른 관점에도 적용된다.이것은 사실에서 당위를 이끌어내는 [[자연주의의 오류]]에 해당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