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식민사관 (문단 편집) ==== 반론 ==== 우선 삼국시대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스스로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고조선의 영토는 한반도 북부지역까지만 미쳤기 때문에 한반도 남부에 있던 삼한 등 다른 고대국가들은 같은 정체성을 공유하지 않았으며, 이후의 신라와 백제도 마찬가지다. 기록상 삼국 간에 통역사 없이 소통한 것으로 보아 언어는 매우 유사했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지만, 이들 한 민족이라는 정체성이 처음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때로, 남북국시대 이후 남국에서는 구백제, 구신라, (신라에 포함된) 구고구려 정체성을 통합한 "신라인"이라는 공통된 정체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백년이 지나 동화가 불완전한 시점에 신라의 국력이 쇠락해 재차 후삼국시대가 벌어졌고, 이를 수습한 고려왕조는 신라가 했었던 삼한일통을 다시 했음을 천명하고 그 노선을 이어받아, 비로소 구삼국유민의식을 초월해 현대까지 이어지는 단일의식 정체성이 정립된 것은 고려시대 중기로 추측한다. 중국의 경우 자국의 문자를 한자(漢字, 한나라의 글자)라고 부르고 삼국지에서 유비 정통론이 등장한 것이 원나라 때인데, 이는 몽골의 지배를 당하면서 역으로 우리 민족(한족)이라는 정체성이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려도 마찬가지로 고려의 통일과 원나라와의 항쟁을 거치면서 정체성이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들 간의 싸움을 당파싸움이라고 볼 수 없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통일 이전에 일본인들 간에 피터지게 싸운 것도 당파싸움인가? 심지어 얘네들은 칼가지고 싸웠다. 물론 붕당이 완벽한 체제는 결코 아니었고, 식민사관과 무관하게 붕당의 단점과 폐해를 지적하는 학자들도 많다. 이에 대해선 [[붕당]] 문서에 더 자세히 나와 있다. 중요한 것은, 파벌이라는 정치의 보편성과 여기에서 비롯된 붕당의 모습을 마치 '[[한민족]]의 특성' 수준으로 폄하했다는 것이 이 당파성론의 문제점이다. '''정치에서 당파가 안 생기는 경우는 사실상 없다.'''[* 이는 현대의 모든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동일하다.오히려 정당간에 서로 견제하면서 토론과 협의로 정치를 진행하는것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당파간에 대립을 부정적으로는 보는것은 어디까지는 전체주의적 시점에서나 통용될뿐 오히려 사회구성원 모두의 의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각각의 구성원들의 의견을 대변할수 있는 여러 정치집단이 공존하는것이 좋다.] 독재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다른 주장을 모두 묵살하더라도 그 밑에서 파벌 싸움은 항상 일어난다. 세상 어디에서 자연적으로 생기는 당파를 유독 한국역사에서만 생기는 악습으로 왜곡하는 논리는 사실 어처구니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조선왕조 정치를 말하면 "전하~ 아니되옵니다~" 수준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조선사에서 폐해가 심했던 시기는 붕당이 완전히 붕괴된 시점인 [[세도정치]] 시기였다. 붕당일 때는 오히려 건강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민주당과 공화당이 싸우는 미국이 건강한 사회인가? 조선로동당 하나로 당파싸움이 전혀 없는 북한이 건강한 사회인가? 한편 당파 싸움을 비난하는 일본도 한국사보다 파벌싸움이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그 유명한 [[사무라이]]들도 사실 막부시대 이전 천황과 대귀족간 권력다툼 와중에 정적에게 살해당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생긴 보디가드가 원조였다. 사무라이들이 천황과 귀족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할 때 미나모토가와 다이라 가로 나뉘어 싸우고, 나중에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북조와 고다이고 천황의 남조로 나뉘어 싸우고, 무로마치 막부의 힘이 약해지니까 각 지역 영주들끼리 싸우고, 히데요시가 교통정리좀 하나 했더니 히데요시의 잔당과 도쿠가와파로 나뉘어 싸웠으며, 에도 막부 이후에는 막부파와 유신지사파로 나뉘어 싸우고 유신지사파도 사쓰마와 조슈로 나뉘었다. 그 이후 군국주의 일본제국 시절에도 육군과 해군으로 나뉘어 파벌싸움질하다 사이좋게 미군에게 망했다. 좀 삐딱하게 꼬아보자면 일본의 역사는 파벌싸움질로 시작해서 파벌싸움질로 끝났다고 봐도 과언은 아니다. 결국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일본이라는 국가보다 자기가 속한 번국에 대한 소속감이 더 강했다. 중앙집권화 경향이 강했던 한국과는 반대로 지방분권화가 대세였던 셈. 임진왜란 당시에도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카가 서로 싸운 것은 유명하며, 에도 시대 이전까지의 일본은 그야말로 자기가 일본의 천하인을 노리고 영주들끼리 전쟁이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는 현재진행형으로 일본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일본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역사 내내 이어져오는 파벌싸움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한국은 아무리 당파싸움이 심하다 어쩌다 했어도 저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현대에 들어와서는 한국과 일본의 대기업간에 기업 파벌문화가 비교된적이 있었는데, 한국 대기업은 기업 소속의 파벌들이 기업 전체의 이익을 위해 대체적으로 협력하는 반면 일본 기업은 기업내 파벌들이 기업 전체의 이익은 제쳐두고 자기 파벌의 경영권 장악을 놓고 다투기만 한다고 '''일본인들 스스로가 깠다'''. 다른 나라만 보더라도 영국에서는 [[찰스 1세]] 재위 시절 의회파와 왕당파로 갈려 [[올리버 크롬웰]]의 [[청교도 혁명]](내전)이 벌어졌고 미국도 건국 초기 연방주의자와 공화주의자 간의 대립이 나중에 [[남북전쟁]]으로 터졌고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말 할 것도 없다]]. 심지어 [[고대 로마]]는 [[옵티마테스]]와 [[포풀라레스]]의 대립 등 당파 싸움이 내전으로 번지는 경우도 있었고, [[내전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반면 조선은 최소한 [[임진왜란]]이 터졌을 때 당파 없이 협력했고, 당파 싸움이 전쟁으로 치달은 것은 무신년란([[이인좌의 난]]) 정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