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리아군 (문단 편집) == 역사 == 1919년 프랑스가 시리아-레바논 지역을 통치하면서 지역 치안과 방어를 위해 창설한 레반트 특수군(Troupes spéciales du Levant)에 모체를 두고 있다. 여기서 복무한 8000여명의 군인들은 주로 보조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고위 장교는 프랑스인들이 맡았다. 이들은 레바논과 시리아군의 모체가 되었다. 1946년 시리아가 독립하면서 정치인들은 이 군대를 사단 규모로 증설을 시도하였으며 제1여단과 제2여단이 1948년 조직되었고 2개 보병대대와 1개의 기갑대대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숫자가 적고 규율이 부족하며 훈련수준도 낮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뒤이어 혼란한 시리아 정계에서 각 종파, 정당 정치인이나 장군들이 군대를 정치 싸움이나 쿠데타 도구로 사용하면서 시리아군의 분열은 매우 심각했다. '''자신과 지지하는 정당이나 종파가 다르면 아예 지시조차 받지 않고 무시하는''' 행위가 1948년에서 1967년 내내 계속되었다. 1967년에는 군이 확장되어 7만여 병력과 550여대의 전차, 500여대의 APC, 300여대의 대포가 확보되었으며 12개 보병여단, 2개 기갑여단, 2개 기계화여단으로 총 16개 여단이 확보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무력하게 참패하였다. 그래서 당시 시리아 정부는 공군 조종사이자 국방장관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에게 책임을 씌우고 숙청하려고 하자 하페즈는 이에 반발하여 휘하 군대 내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알라위파]] 군인들과 함께 일제히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였다. 그 다음 1970년 11월 하페즈 알아사드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와 동시에 시리아군은 67년부터 73년까지 제1, 3기갑사단, 제5,7,9기계화사단을 증설하였고 하페즈 취임 이후에는 10개 독립여단, 69 로켓포병여단, 그리고 혼란한 종파주의에서 정권을 보위할 제70기갑여단을 창설하였으며 이것은 현재의 [[시리아 공화국 수비대]]의 모체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시리아군은 겨우 종파/정당에 따른 분열을 종식하고 제대로 된 군대로 통합될 수 있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집트군]]에 협력하여 대규모의 헬기 강습과 기갑 돌격으로 골란고원을 되찾고 이스라엘군에 큰 피해를 입히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이집트군의 공세를 저지한 이스라엘군이 반격해오면서 대대적인 기갑 결전을 벌였으나 오히려 참패하고 골란고원을 다시 빼앗겼으며 수도 다마스쿠스 근방까지 퇴각할 지경까지 왔고 [[소련]]의 개입으로 수도 함락만 면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쟁에 개입한 전력이 있다. 1970년 9월 요르단의 [[검은 9월|검은 9월 사건]]에 개입하고 팔레스타인 난민들 편을 들여 기갑여단과 제5보병사단을 파병하여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과 함께 300여대의 T-55와 16000여명의 병력으로 요르단 군을 격파하고 수도 암만으로 진격하였으나 9월 22일 미국의 강력한 공습을 받아 퇴각했다. 또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암살 이후 탄력을 얻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봉기를 진압했다. 1980년 3월 제3기갑사단은 알레포 지역에서 일어난 원리주의 폭동을 진압했으며, 1982년 [[무슬림 형제단]]의 대반란인 [[하마 학살|하마 사태]]를 진압하기도 했다. 시리아 특수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리 하이다르 소장은 [[하페즈 알 아사드]]의 동생으로써 쿠데타를 일으킨 라피야트 알 아사드의 수도 장악 시도를 격퇴하여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저지해내기도 했다.[* 라피야트 알 아사드는 공화국수비대장이자 방위산업체를 장악한 정권의 최측근이었으나 하페즈 알 아사드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을 야망을 품고 있었으며 군권에서 해임될 기미가 보이자 쿠데타를 결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후로도 이자는 버릇을 못 버리고 조카인 [[바샤르 알 아사드]]가 개혁정책과 민주화를 외쳐 바트당 보수파들의 불만을 사자 이를 이용하여 유배지인 라타키아에서 샤비하 민병대를 동원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나 역시 조카인 제4기갑사단 부사단장/대통령 경호실장인 마헤르 알 아사드에게 진압당하고, 영국으로 도망쳐 시리아를 욕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레바논 내전]]에도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이스라엘과 대리전을 치뤘다. 이때 레바논의 수니파와 시아파를 집중 지원했고 내전 종식 이후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취약한 소국 레바논 정부를 핍박하며 [[헤즈볼라]]를 육성하여 레바논을 반식민지 상태로 만들었으나, 2006년 라피크 하리리 총리 암살사태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되었고 레바논에서의 시리아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압박으로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가 시리아군을 전면 철수시키는 용단을 내려 26년간의 개입은 끝을 맞이했다. 걸프전쟁에서는 적대관계였던 이라크에 대항하여 미국을 지지하며 아랍연합군에 제9기갑사단을 파병했으나 예비병력으로써 실제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1970년 이전에는 지나친 정쟁과 분열, 내부갈등, 훈련량 부족으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하페즈 알 아사드 집권 후 역량이 좋아졌음에도 이스라엘, 요르단과의 전쟁에서 초반은 잘하지만 후반에 가서 털리는 처지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밀리터리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이스라엘과는 달리 비인기 수준을 면치 못하는 편이다. [[파일:external/i.alalam.ir/alalam_635047705001917392_25f_4x3.jpg]] 위장 패턴은 처음에는 붓으로 쓸어내린 듯한 무늬의 브러쉬스트로크([[http://camopedia.org/index.php?title=Brushstroke|Brushstroke]]) 패턴을 채용했으나 1970년대부터 프랑스식의 리쟈드 패턴을 병용했고, 1980년대부터는 이른바 "Syrian Leaf"로 알려진 독특한 위장 패턴을 채용했다. 2012년까지 시리안 리프 패턴은 자주 볼 수 있었으나 90년대부터 이미 미국식 M81우드랜드 패턴을 모방한 군복이 생산되었으며 현재 [[시리아 내전]]에서 정부군은 거의 대다수가 우드랜드 패턴의 전투복을 착용하고 있다. [[http://camopedia.org/index.php?title=Syria|상세한 위장패턴 변천사는 해당 사이트를 참고.]] 전투복 디자인은 미국 등의 서방권과 다르지 않으나 철모를 비롯한 군장은 러시아식이고, 어설트 베스트는 90년대 유고슬라비아에서 볼 수 있었던 형식의 천으로 만든 탄창 주머니가 있는 것이다. 이 어설트 베스트는 천 조끼와 방탄조끼 형태의 두종류가 확인되고 있다. 한편 친정부 민병대인 국가방위대(National Defence Force, NDF)나 일부 정부군, 몇몇 주요 인사들은 저렴한 미국제나 러시아제, 혹은 중국산 택티컬 베스트를 착용하는 것도 많이 보이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