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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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아랍군
الْقُوَّاتُ الْمُسَلَّحَةُ الْعَرَبِيَّةُ السُّورِيَّةُ
Syrian Arab Armed Forces[1]
파일:시리아군기.svg
파일:시리아군 엠블럼.svg
깃발
엠블럼
창설일
1946년 (78주년)
국가
[[시리아|

시리아
display: none; display: 시리아"
행정구
]]

소속
시리아 국방부
상비군
170,000명 (2023년)
예비군
50,000명 (2023년)
참전
제1차 중동전쟁
제3차 중동전쟁
제4차 중동전쟁
레바논 내전
시리아 내전
육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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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대 전차
2,700 대
1세대 전차
2,150대
수륙양용전차
100대
전차 총합
4,500대 (2016년)
장갑차
4,510대 (2016년)
견인포
2,150문 (2016년)
박격포
1,510문 (2011년)
자주포
436대 (2016년)
다연장로켓
650대 (2016년)
수송 차량
8,000대

해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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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공모함
0척
GFP 기준 구축함[1]
0척
GFP 기준 호위함[2]
0척
초계함(고속정)
8척[3]
잠수함
0척
전투함 총합
12척

공군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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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122기
4세대 전투기[1][2]
10 ~ 19기[3]
3세대 전투기[4]
197 기
제트훈련기
66기
조기경보관제기(AWACS)
0기
전자전기(SIGINT/ISTAR)
0기
공중급유기
0기
헬리콥터
166기 (2021년)
공군기 총합
461기 (2016년)

예산
GDP 대비 국방비
6.5 %(2019년)[2]
국방비 총합
18~29억 달러(2019년)

1. 개요
2. 역사
2.1. 시리아 내전
7. 관련 문서



1. 개요[편집]


시리아 아랍 공화국의 정규군으로서 정식명칭은 시리아 아랍군(아랍어: الْقُوَّاتُ الْمُسَلَّحَةُ الْعَرَبِيَّةُ السُّورِيَّةُ)이다.

시리아 아랍 육군, 시리아 아랍 해군, 시리아 아랍 공군, 시리아 아랍 방공군으로 구성되어있다. 시리아 헌법에 따라서 시리아의 대통령이 군 통수권을 행사한다. 징병제를 채택하여 남성은 18세가 되면 입대한다. 단, 부모님을 봉양할 형제가 없으면 병역을 면제받는다. 복무 기간은 기존 2년 반에서 2005년에는 2년, 2008년에는 1년 9개월, 2011년에는 1년 반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시리아 내전 이후 정규군은 325,000명에서 절반 가까이 감소했고, 비정규군은 8만 명에서 100,000명을 유지하고 있다. 전투 및 비전투 병력손실은 178,000명에서 220,000명으로 추산한다.

2. 역사[편집]


1919년 프랑스가 시리아-레바논 지역을 통치하면서 지역 치안과 방어를 위해 창설한 레반트 특수군(Troupes spéciales du Levant)에 모체를 두고 있다. 여기서 복무한 8000여명의 군인들은 주로 보조임무를 수행하였으며 고위 장교는 프랑스인들이 맡았다. 이들은 레바논과 시리아군의 모체가 되었다. 1946년 시리아가 독립하면서 정치인들은 이 군대를 사단 규모로 증설을 시도하였으며 제1여단과 제2여단이 1948년 조직되었고 2개 보병대대와 1개의 기갑대대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숫자가 적고 규율이 부족하며 훈련수준도 낮아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패배했고, 뒤이어 혼란한 시리아 정계에서 각 종파, 정당 정치인이나 장군들이 군대를 정치 싸움이나 쿠데타 도구로 사용하면서 시리아군의 분열은 매우 심각했다. 자신과 지지하는 정당이나 종파가 다르면 아예 지시조차 받지 않고 무시하는 행위가 1948년에서 1967년 내내 계속되었다. 1967년에는 군이 확장되어 7만여 병력과 550여대의 전차, 500여대의 APC, 300여대의 대포가 확보되었으며 12개 보병여단, 2개 기갑여단, 2개 기계화여단으로 총 16개 여단이 확보되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의 제3차 중동전쟁에서 무력하게 참패하였다.

그래서 당시 시리아 정부는 공군 조종사이자 국방장관이었던 하페즈 알아사드에게 책임을 씌우고 숙청하려고 하자 하페즈는 이에 반발하여 휘하 군대 내에서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알라위파 군인들과 함께 일제히 쿠데타를 일으켜 정부를 전복하였다. 그 다음 1970년 11월 하페즈 알아사드는 대통령으로 취임하였다. 이와 동시에 시리아군은 67년부터 73년까지 제1, 3기갑사단, 제5,7,9기계화사단을 증설하였고 하페즈 취임 이후에는 10개 독립여단, 69 로켓포병여단, 그리고 혼란한 종파주의에서 정권을 보위할 제70기갑여단을 창설하였으며 이것은 현재의 시리아 공화국 수비대의 모체가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때부터 시리아군은 겨우 종파/정당에 따른 분열을 종식하고 제대로 된 군대로 통합될 수 있었다.

제4차 중동전쟁에서는 이집트군에 협력하여 대규모의 헬기 강습과 기갑 돌격으로 골란고원을 되찾고 이스라엘군에 큰 피해를 입히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이집트군의 공세를 저지한 이스라엘군이 반격해오면서 대대적인 기갑 결전을 벌였으나 오히려 참패하고 골란고원을 다시 빼앗겼으며 수도 다마스쿠스 근방까지 퇴각할 지경까지 왔고 소련의 개입으로 수도 함락만 면할 수 있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쟁에 개입한 전력이 있다. 1970년 9월 요르단의 검은 9월 사건에 개입하고 팔레스타인 난민들 편을 들여 기갑여단과 제5보병사단을 파병하여 팔레스타인 무장단체들과 함께 300여대의 T-55와 16000여명의 병력으로 요르단 군을 격파하고 수도 암만으로 진격하였으나 9월 22일 미국의 강력한 공습을 받아 퇴각했다. 또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 암살 이후 탄력을 얻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봉기를 진압했다. 1980년 3월 제3기갑사단은 알레포 지역에서 일어난 원리주의 폭동을 진압했으며, 1982년 무슬림 형제단의 대반란인 하마 사태를 진압하기도 했다. 시리아 특수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알리 하이다르 소장은 하페즈 알 아사드의 동생으로써 쿠데타를 일으킨 라피야트 알 아사드의 수도 장악 시도를 격퇴하여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저지해내기도 했다.[3]

레바논 내전에도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여 이스라엘과 대리전을 치뤘다. 이때 레바논의 수니파와 시아파를 집중 지원했고 내전 종식 이후에도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취약한 소국 레바논 정부를 핍박하며 헤즈볼라를 육성하여 레바논을 반식민지 상태로 만들었으나, 2006년 라피크 하리리 총리 암살사태가 국제적인 문제로 비화되었고 레바논에서의 시리아 영향력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압박으로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가 시리아군을 전면 철수시키는 용단을 내려 26년간의 개입은 끝을 맞이했다. 걸프전쟁에서는 적대관계였던 이라크에 대항하여 미국을 지지하며 아랍연합군에 제9기갑사단을 파병했으나 예비병력으로써 실제 전투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1970년 이전에는 지나친 정쟁과 분열, 내부갈등, 훈련량 부족으로 제대로 된 전투력을 보여주지 못했고, 하페즈 알 아사드 집권 후 역량이 좋아졌음에도 이스라엘, 요르단과의 전쟁에서 초반은 잘하지만 후반에 가서 털리는 처지를 면치 못했다. 그래서 밀리터리 매니아들 사이에서는 높은 인기를 자랑하는 이스라엘과는 달리 비인기 수준을 면치 못하는 편이다.

파일:external/i.alalam.ir/alalam_635047705001917392_25f_4x3.jpg
위장 패턴은 처음에는 붓으로 쓸어내린 듯한 무늬의 브러쉬스트로크(Brushstroke) 패턴을 채용했으나 1970년대부터 프랑스식의 리쟈드 패턴을 병용했고, 1980년대부터는 이른바 "Syrian Leaf"로 알려진 독특한 위장 패턴을 채용했다.

2012년까지 시리안 리프 패턴은 자주 볼 수 있었으나 90년대부터 이미 미국식 M81우드랜드 패턴을 모방한 군복이 생산되었으며 현재 시리아 내전에서 정부군은 거의 대다수가 우드랜드 패턴의 전투복을 착용하고 있다. 상세한 위장패턴 변천사는 해당 사이트를 참고. 전투복 디자인은 미국 등의 서방권과 다르지 않으나 철모를 비롯한 군장은 러시아식이고, 어설트 베스트는 90년대 유고슬라비아에서 볼 수 있었던 형식의 천으로 만든 탄창 주머니가 있는 것이다. 이 어설트 베스트는 천 조끼와 방탄조끼 형태의 두종류가 확인되고 있다. 한편 친정부 민병대인 국가방위대(National Defence Force, NDF)나 일부 정부군, 몇몇 주요 인사들은 저렴한 미국제나 러시아제, 혹은 중국산 택티컬 베스트를 착용하는 것도 많이 보이고 있다.

2.1. 시리아 내전[편집]


시리아군이 직면한 최대의 위기.

2011년 시리아 민주화 운동에서 시리아 정권 수뇌부는 민주화 시위를 과거 시리아군이 여러번 경험했던 국내 소요사태 정도로 취급하였다. 여기에는 이들리브-알레포 지역에서 시위의 주동자가 무슬림 형제단계열 이슬람 원리주의자였던 이유도 있고, 사우디, 카타르, 터키가 주도적으로 왜곡 보도를 하며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에게 하야를 촉구했기 때문에 민주화 시위에 순수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2011년 6월 바샤르 알 아사드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을 통해 민주 시민, 범죄자, 외세, 원리주의자가 이 사태에 있다고 말하며 민주시민과는 대화하지만 나머지와는 싸우겠다고 선포하며 강경 진압을 강화했다.

하지만 국제 사회가 개입한 시아파 정권 축출 프로젝트는 단순 소요사태 이상이었으며, 정부군은 레바논, 터키, 요르단 국경지대에서 점점 강력해지는 반군을 성공적으로 차단하는 데 실패했다. 특히 리비아의 카다피 축출과 사망으로 중동 독재자 축출은 막을 수 없는 시대의 대세로 여겨졌고 이에 따라 시리아 내부에서도 동요가 커졌다. 서구 언론에서도 아사드 축출이 눈앞이라는 선전이 이루어졌다. 이로 인해 시리아 정부군 내부에서도 탈영이 빈번하게 이뤄지기 시작했고 장교와 사병을 가리지 않았다. 이들이 반군에 합류하여 작전 지휘를 개시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정부군은 이에 대응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2012년부터 정부군은 교외 지역에서 빈발하는 게릴라 습격을 견디지 못하고 주요 군기지와 거점에 틀어박혀 방어태세로 돌아섰으며 이로 인하여 수도 다마스쿠스를 비롯 알레포 이들리브 등의 주요 지역의 교외 지역이 전부 반군에게 넘어갔다. 반군은 여세를 몰아 2012년 7월 수도함락작전을 입안했으나 조기 노출되는 바람에 급히 작전을 개시했음에도 수도의 최대 80%까지 장악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수도방위를 맡은 제3, 제4기갑사단이 수도로 돌입하여 대격전을 벌이면서 반군의 수도 장악은 실패했고, 2013년 3월부터는 공세종말점에 달한 반군에 대해 정부군이 반격작전을 개시하기 시작했다. 반군의 전투력을 담당하는 레바논, 터키, 요르단 국경지대의 주요 거점을 점령하여 반군 보급로를 끊어버리는 것이 주요 목적이었으며, 탈영으로 부족한 병력을 이란 혁명수비대와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보충해주면서 레바논 국경지대는 2014년까지 성공적으로 차단했고 포위되었던 알레포 서부 시가지와의 보급로를 개통, 하마와 홈스 시가지를 재장악하고 다마스쿠스 주변 교외지역을 탈환, 수도권의 반군을 동부 고타와 북부 산악지대로 몰아넣음으로써 포위망을 완성했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정부군의 공세종말점이었다. 아사드 대통령을 무력으로 하야시키는 옵션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이자 터키, 카타르, 사우디는 지원을 줄여나가기 시작했으나 2013년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비중이 커지고 ISIS가 반군에 합류하면서 미국이 이른바 온건 반군을 엄선하여 무기와 자금을 지급하며 새로운 스폰서가 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또한 이미 2012년부터 외국에서 지하드 전사들이 시리아로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었으며 정부군이 아무리 활약해도 반군 병력은 충분했다. 여기에 정부군은 몇년동안 병력을 제대시키지 못했으며 강력한 경제 봉쇄로 월급조차 제대로 주지 못했기 때문에 사기가 낮아졌고 탈영병도 급증해서 가용병력은 줄어들어만 갔다. 거기에 정규군 10만 정도로 시리아 내부의 수십개의 전선을 커버했기 때문에 주요 지역을 포위했음에도 병력 손실이 막대한 시가전을 수행할 수가 없었다. 정부군의 장점인 공군도 유일한 항공기 정비창이 반군에 넘어갔고 조종사와 항공폭탄도 크게 부족해져 공습을 필요한 만큼 수행할 수 없어 편대도 구성하지 못하고 50대의 예비역 조종사를 동원하여 1기의 전투기가 통상폭탄 한두발을 던지고 가는 수준이었다.

이렇게 되자 경제가 붕괴된 정부는 전쟁 비용을 댈 수 없었고 무장 수준이 반군과 별 차이 없는 수준까지 떨어졌다. 항공폭탄을 대신해 드럼통을 용접해서 만든 이른바 통 폭탄이 등장했고, 항공기로는 쓸 수 없어 헬리콥터로 싣고 가서 굴려서 떨어뜨리는 수준이었다. 병력이 매우 부족한데 광대한 전선을 유지해야 하다 보니 기존 편제에 없는 과도한 화력이 필요해졌고 코끼리 로켓 같은 드럼통에 추진체와 날개를 달아 쓰는 무식한 로켓포가 등장했다. 기존의 군용 트럭의 소모율이 높고 기름도 많이 먹다 보니 저렴한 민수용 트럭에 기관포를 달아 테크니컬로 굴리기 시작했다. 군대의 역량도 크게 떨어져서 철수시 무기와 탄약, 중화기와 중요문서의 파기는 기본임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놔두고 도주하는 건 일상적이다.

이 문제는 2015년 3월 이들리브 전역에서 정부군이 5000여명의 병력을 상실하며 패퇴하면서 극심해졌고 당시 시리아 정부는 신문과 방송에 모병광고를 내며 제발 군대 좀 오라고 사정을 했고 대통령령으로 탈영병과 반군에 대한 대사면령을 내리면서 병력 충원에 골몰하기도 했었다. 이때가 정부군 최대의 위기였다. 하지만 2015년 9월 러시아가 참전하면서 부족한 공군력을 메꿔주고 정부군에 말 그대로 기갑장비와 중화기를 퍼다주면서 그후부터는 정부군이 연전연승을 거두기 시작했다. 2016년 12월에는 반군의 수도격인 알레포를 완전 함락하였고 2017년 들어서는 3월에 팔미라를 완전히 수복하고, 타이거 장군이 시리아 중부로 진격하여 다에시를 보이는 대로 때려잡으며 9월에는 3년 이상 IS에 포위된 데이르에조르의 포위를 풀면서 승기를 굳힌 상태다.

초반에는 다들 정부 편을 들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으나, 반군이 정부군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심장을 꺼내 먹거나, 알레포 알 킨디 중앙병원에서와 같이 항복한 병력을 학대하다가 총살하고, 원리주의자들이 알라위파나 기독교도를 잔인하게 살해하면서 소수종파, 아랍민족주의자, 세속주의자들은 친정부 민병대를 결성하면서 정부 편을 들었다. 또 군대도 초기에는 쉽게 항복했지만 잔학 행위가 알려지면서 포위되어도 무조건 항전하기 시작했다. 또 부족한 병력은 헤즈볼라와 이란 혁명수비대가 보조한다.

하지만 이러면서도 병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은 십몇명 정도의 병력만 주둔한 전술기지나 검문소를 통해 지역을 장악하고, 마주한 반군의 검문소나 전술기지간에 소규모의 교전만 이뤄진다. 주로 여러대의 테크니컬을 통해 적 주둔지 주변에 자리를 잡고 소량의 로켓포로 지원하며 거리를 두고 총질을 좀 하다가 적 건물이나 병력이 피해를 입으면 철수하는 식. 대규모의 공격이 이뤄질 때는 각 전선에서 차출할 수 있는 만큼 병력을 모으고 공습과 포격, 전차나 테크니컬 지원 하에 적 기지를 공격하며 BMP같은 장갑차들이 소화기 교전거리까지 병력을 운송하고 하차시킨다. 냉전식의 보병돌격은 거의 보기 힘들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대화력전을 벌여서 적들이 퇴각하면 그제서야 돌입하여 점령한다.

이런 형태의 전술이 꽤나 없어보이다 보니 타국의 정규군이나 밀리터리 매니아들은 시리아군을 상당히 무시한다. 하지만 2016년 시리아 북부에 개입한 터키군이 ISIS의 전술에 휘말려 3세대 레오파트 2 전차만 10대를 넘게 손실하는 등 6년간 내전을 치뤄온 시리아군의 노하우와 전투력을 마냥 얕볼 수는 없다.

무엇보다 중동 독재정권 군대의 가장 큰 약점이 독재자가 자기나라 군대를 못믿어서 실전적인 훈련, 제대간 수평적인 정보공유, 실력에 따른 인사배치, 하위 지휘관의 자율성 부여 같은 현대전의 미덕들을 전혀 보장해 주지 않아 병사들이 자기 주특기를 할 줄 모르고, 아군간의 진격로, 공격루트 같은 기본적인 정보공유도 안되고, 실력 없는 예스맨들이 고위직 꿰차고, 그 아래 지휘관들은 자율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로봇이 되어서 자국 민간인 상대로 정권보위 하는거 말고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수아비들로 만든다는것이다. 다만 이쪽은 내전이 워낙 길어지다보니 아사드 충성파와 반란군이 다 가려져서 독재자가 눈 치켜뜨고 경계할 필요성이 줄었고 실전을 통한 노하우도 많이 쌓여서 현대적인 교육의 부재로 인한 저질 인적자원이 기간병력을 이룬다는 점을 제외하면 중동군의 약점들을 많이 극복했다.

특이한 점은 정부군 정규 병력보다는 친정부 민병대가 전력 대부분을 담당한다는 점이다. 이유가 시리아는 국가 정체성이 비교적 옅고 지역이나 종파 기반으로 정체성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전 초반 자기 고향의 시위를 진압하던 병사들이 고향을 쏠 수 없다며 집단으로 탈영하게 된 원인이기도 했다. 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는 의식이 옅기 때문에 적 앞에서 쉽게 도주하고 패퇴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으며, 국가에서 운영하는 국군의 소집에 응하지 않고 회피하려는 모습이 내전 이후에 심화되었다. 하지만 지역 종파 기반의 친정부 민병대는 입대하면 병역의무 수료로 인정될 뿐만 아니라 같은 지역 사람이기 때문에 설득하기도 쉽고 연대감을 가지고 있어서 응소율이 꽤나 높을 뿐만 아니라 쉽게 와해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정부군은 2017년 시점에서는 이러한 민병대들 중 정예부대로 판단된 조직들을 상당히 많이 활용한다. 주로 정부군 고위 장교단 하에 배속시킨 다음 일반 단위부대처럼 활용하는 것. 수헤일 알 하산 소장이 이끄는 타이거 부대도 사단급으로 확대 개편되면서 지역 부족 민병대나 타하-3, 아부 샤다이, 리와 알 쿠드스[4] 같은 정예 민병대들을 사단 내 대령들이 지휘하고, 병사들에 대한 개별 지휘는 각 민병대 사령관과 간부들이 맡는 형태로 분권화가 이뤄진 상태이다.


2.2. 시리아 내전에서 전쟁범죄[편집]


시리아 내전에서 민간인 희생자의 대부분은 시리아 정부군에 의해 나오고 있다고 한다. 2014년 1월부터 2014년 7월까지 IS가 죽인 시리아인은 1천131명이지만 아사드의 정부군과 친정부 민병대에 의한 사망자는 7천894명에 달한다고 한다. 당연히 ISIL이 시리아 정부군보다 인도적(...)이라 그런 것일 리는 없고 공군력이 없는 ISIL이 사람들을 땅 위에서만 학살한다면 시리아 정부군은 민간인 상대로 통 폭탄을 퍼붓기 때문.

유엔은 시리아 민주화 운동이 시작된 2011년 3월부터 2013년 11월 15일까지 시리아군이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자행했던 납치와 구금, 구타, 고문, 성폭행, 인간방패 활용, 소년병 강제 동원 등 갖가지 인권 침해 사례를 수집해 2014년 공개하기도 했는데 이 보고서에는 매우 잔인한 시리아군의 만행이 적혀 있었다.
시리아 민주화 운동 당시에 이미 심각한 형태의 무자비한 고문을 했던 시리아 군은 현재까지도 시리아 내전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행하고 있다 시리아 남부 다라 지역에서 탈출한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정부군이 학교를 사실상 고문실로 둔갑시켰다고 한다. 학교에는 반군에 가담한 어른뿐만 아니라 4∼10세의 어린이들도 갇혀 있었는데, 무장한 정부군은 아이들의 손을 뒤로 묶어 공중에 매달아놓고 밧줄이나 쇠파이프로 때려댔다고 하며, 정부군은 소년병 가담 혐의를 받은 어린이들의 손톱발톱을 뽑는 무자비한 고문을 했다. 또한 전기충격을 가하며 잔혹하게 학대하기도 하기도 했으며, 아메드라는 소년은 “아이들의 귀를 자른 뒤 수배 중인 부모가 볼 수 있도록 길거리에 묶어놓은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레일라 제루기 유엔 아동·무력분쟁 특사의 이름으로 작성된 보고서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잔학한 방법으로 어린이들을 학대한 실상이 폭로되었는데, 시리아군은 어린이들에게 반군과 관련된 부모나 친척의 소재를 말하도록 강요하며 굵은 철제 밧줄이나 회초리, 곤봉으로 아이들을 때렸다. 심지어 여자 어린이는 물론이고 남자 어린이도 성폭행을 당했으며 전기충격기로 아이들의 성기에 전기 충격을 가하는 고문을 하기도 했다. 잠을 재우지 않거나 손톱 발톱을 뽑고 담뱃불로 지지고 독방에 감금하는 고문도 이루어졌다고 보고서에는 적혀 있으며 시리아군은 학교를 폐쇄해 아동의 교육 기회를 박탈한 것은 물론이고 국제사회의 인도적인 도움도 받지 못하게 하고 있다. 기사

한편 휴먼라이츠가 시리아 정부의 교도소에 수감된 여성 재소자들이 성폭행과 고문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전쟁 무기'로 이용되고 있다고 발표한 42페이지 분량의 이 보고서는 "시리아의 여성 구금: 전쟁 무기와 고문"이라는 제목으로 시리아 여성 교도소의 인권 유린을 고발했다. 보고서에는 시리아의 교도소에 수감된 임신부와 어린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는 여성 재소자들의 상황에 대해 전하고 있는데, 시리아 정부가 운영하는 교도소에서 여성 재소자들은 "다양한 형태의 위협과 독방 감금을 당하는 것은 물론 강간, 성추행을 포함한 성고문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또한 보고서에서 언급된 한 38세 여성은 두 아이의 엄마로서 지난 2013년 수감생활에 대해 전했는데 그녀는 "월경 중이던 당시 쥐가 득실거리는 차가운 심문실에서 벌거 벗겨진 채 서 있었다"고 회고했으며, 또 다른 재소자는 16살 아들 앞에서 교도관 10여명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고 말했으며, 다른 여성들은 반군과 '지하드 섹스'를 했다는 거짓 자백을 강요 당했다고 한다. 기사
폭탄 자체는 민간인 학살용이 아니나 무차별 투하가 문제. 시리아군이 행하는 가장 유명한 전쟁 범죄 중 하나 시리아 전문가들은 아사드가 반군의 진격으로 정부군이 엄청난 타격을 입자 점점 더 공군력에 의존하며 통폭탄을 계속해서 투하하고 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시리아군은 아이들을 잡아다가 인간 방패로 쓰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아동과 무력분쟁에 관한 사무총장 보고서’를 보면 시리아군은 2012년 3월 9일 이들립 지역의 한 마을을 공격하러 갈 때마다 8살 에서 13살의 어린이들을 집에서 강제로 끌어내 탱크 앞에 태웠는데 이는 시리아 반군이 공격하지 못하도록 인간 방패로 쓴 것이다.

보고서를 작성한 라디카 쿠마라스와미 특별대표는 BBC 방송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시리아 어린이들에게 ‘인간방패로 이용됐다’는 증언을 확보했고 몸에 고문 흔적이 있는 어린이들을 직접 만났다”며 “어린이를 죽이거나 그 신체를 훼손하는 건 전투 상황에서조차 드문 일”이라고 인터뷰를 했다. 기사
  • 화학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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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무기금지기구(OPCW)는 2015년 3월 시리아 정부군이 북서부 이들리브 지역의 사르민 마을에 염소가스가 담긴 통폭탄을 헬기에서 떨어뜨려 어린이 2명과 부모 등 6명이 숨지고 주민 90명이 부상했다고 발표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미국 주도로 염소가스 사용 책임을 묻는 결의안 초안을 작성 했으며, 염소가스는 화학무기 사용 및 보유를 금지하는 화학무기금지협정(CWC)에 의해 화학무기로 사용하는 것이 금지돼 있는데 이런 걸 썼다는 것에 대해서 국제사회가 시리아 정부군을 비난하고 있다. 기사

현재 시리아 내전에서 시리아군은 화학무기를 사용하고 있는데 시리아군은 다마스쿠스 인근 구타 지역 동부에 사린가스를 담은 로켓을 발사했고 반정부군을 향해 화학무기를 사용해서 1,400여 명이 사망하고, 3,000여명에게 엄청난 부상을 입히게 했다.기사

한편 시리아 정부군이 반군을 대상으로 화학무기를 수차례 사용해 100∼150명이 사망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미국 정부 당국자가 밝히기도 했으며기사

탈영한 한 시리아 정부군 장교가 시리아 정부군이 수십 차례에 걸쳐 화학무기 공격을 했다고 증언했다. 아랍에미리트 일간지인 더내셔널은 바샤르 알 아사드가 이끄는 시리아 정부군에서 화학전을 담당했던 자헤르 사케트 준장이 자신이 복무할 당시에 시리아 정부군이 자행한 화학무기 공격이 14차례에 달한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2013년 3월 탈영한 사케트 준장은 자신이 부대를 이탈한 뒤 20여 건의 추가 공격이 이어지는 등 정부군의 화학무기 사용 빈도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고 전했으며, 사케트 준장은 시리아 육군 제5사단에서 6년 동안 복무하며 화학전을 담당했으며 시리아 정부군의 핵심 조직인 공군 정보국에서도 1년 동안 화학무기 관련 업무를 보조했다고 더내셔널은 설명했다.

그는 시리아군이 사린가스 등의 화학무기를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다고 증언했으며, 사케트 준장은 시리아 정부군 소속 450부대는 신경가스 생산시설 7곳 가운데 한 곳을 담당하고 있으며 416·417·418 부대는 각각 화학무기 저장과 수송을 맡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바샤르 알 아사드가 화학무기 공격 명령을 내리면 시리아 정부군의 대응을 총괄하는 위기대응조직과 군 핵심조직인 공군정보국을 차례로 거쳐 각 육군 부대에 전달된다고 설명했다. 기사
  • 시리아군의 전쟁 범죄에 대한 증언

“방에 있던 6살 남자 아이가 제일 심한 고문을 당했어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영문을 모르던 아이였는데 심하게 고문당하고 사흘간 아무런 음식과 물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아이가 간신히 버티다 죽는 걸 내가 직접 봤습니다” - 와엘 16세


“(팔목의 상처를 보여주며) 그들은 제 팔목을 묶고 다리가 땅에 닿지 않게 매달았어요. 그리고 심하게 때렸습니다” - 칼리프 15세


“군인들이 아이들을 끌어다 인간 방패를 만드는 걸 목격했습니다. 대학살 이후 시체들이 부상당한 사람들과 함께 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 뒤 이틀간 개들이 죽은 시체를 먹기도 했어요” - 하산 14세


“우리 마을에서 두 살 먹은 아이가 총에 맞아 숨지는 걸 봤습니다. 군인들 물러가라는 시위에 일부 아이들이 참여했는데 그에 대한 보복으로 6살 아이를 잡아다 손톱을 뽑는 고문을 했어요” - 모하마드 17세


“영문도 모른 채 감옥에 끌려가서 시체들을 치우지 않은 방에 22일간 갇혀 있었습니다. 매일 맞고 전기고문을 당했습니다” - 모우사 15세


출처: 세이브더칠드런이 2012년 9월25일 난민캠프에서 만난 아동의 증언을 모은 “형언할 수 없는 잔혹함-시리아 아동의 이야기(Untold Atrocities: The Stories of Syria’s Children)”를 펴낸 책에서 자료집에 실린 증언의 일부.


3. 육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육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해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해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공군[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시리아 공군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방공군[편집]





7. 관련 문서[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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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리아군 정보[2] 현재 내전이 장기화됨으로 인해 정확하지 않은 수치다. 위 수치대로라면 현재 시리아의 GDP는 400억 달러가 넘어야 하나 길어진 내전으로 시리아의 GDP가 폭락한 것은 확실한 사실이므로 그 어느 기관에서도 400억 달러 이상으로 측정하지 않는다. 또한 해당 자료대로 군비 지출이 29억 달러라면 시리아는 현재 GDP 대비 18.7%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군비 지출을 하고 있다는 뜻이 된다. 2020년 기준 시리아의 추정 GDP는 155억 달러다. 다만 국가비상사태로 인해 과도한 군비 지출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므로 실제로는 6.5%보다 월등히 높은 것은 사실일 것이다.[3] 라피야트 알 아사드는 공화국수비대장이자 방위산업체를 장악한 정권의 최측근이었으나 하페즈 알 아사드의 뒤를 이어 권력을 잡을 야망을 품고 있었으며 군권에서 해임될 기미가 보이자 쿠데타를 결행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후로도 이자는 버릇을 못 버리고 조카인 바샤르 알 아사드가 개혁정책과 민주화를 외쳐 바트당 보수파들의 불만을 사자 이를 이용하여 유배지인 라타키아에서 샤비하 민병대를 동원하여 봉기를 일으켰으나 역시 조카인 제4기갑사단 부사단장/대통령 경호실장인 마헤르 알 아사드에게 진압당하고, 영국으로 도망쳐 시리아를 욕하는데 앞장서고 있다.[4] 팔레스타인 난민으로 이뤄진 친정부 민병대. 알레포 시 북쪽의 한다라트 난민캠프 출신자들 위주로 이뤄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