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라쿠사 (문단 편집) ==== 참주의 몰락과 1차 민주정 ==== 기원전 478년 [[겔론 1세]]가 사망한 뒤, 동생인 '''[[히에로 1세]]'''가 시라쿠사의 새 참주로 선임되었다. 또다른 형제이자 겔라의 총독 폴리젤로스가 이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아카긴타의 통치자이자 겔론의 장인인 티론에게 망명했다. 양자는 전쟁을 벌이는 듯했지만, 기원전 477년 시인(詩人) 시모니데스가 중재하여 화해했다. 같은 해 시라쿠사는 레지아의 참주 아낙실라스의 공격을 받고 있던 이탈리아 남부의 에피제피리아 참주 로크로스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기원전 476년 낙소스 섬과 카타니아의 주민들을 레온티노스로 옮기고 카타니아를 에트나로 개명했으며, 시라쿠사인 5천 명과 펠로폰네소스인 용병 5천 명을 그곳에 정착시켰다. 이후 히에로 1세는 에트나와 도리스 제도를 아들 데이노메네스에게 맡겼다. 기원전 474년 [[에트루리아]]인들을 해전에서 격파해 키미 주민들을 구했으며, 이를 기념하여 에트루리아군의 투구를 올림피아 신전에 헌정했다. 이후 티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트라시디오스를 격파하고 아카긴타의 참주에서 폐위했다. 시라쿠사는 히에로 1세의 통치기간 동안 큰 번영을 누렸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많은 금화와 은화가 발행되었으며, 시모니데스, [[크세노파네스]], 에피카르무스, [[아이스퀼로스]], [[핀다로스]], 바킬리데스 등 당대 최고의 시인, 음악가, 예술가들이 초빙받아 히에로 1세의 궁정에 머물렀다. 그러나 [[디오도로스 시켈로스]]는 그를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묘사하며, 온화하고 순수했던 형 겔론 1세와 대조했다. 그에 따르면, 히에로 1세는 간첩 조직을 결성하여 정적들의 약점을 찾아내어 숙청했다고 한다. 기원전 467년 히에로 1세가 사망한 뒤 집권한 '''[[트라시볼로스]]'''는 히에로 1세보다 잔인하여 많은 시민을 불법적으로 살해하거나 거짓 혐의로 추방하고 재산을 몰수한 폭군이었다. 기원전 465년, 시민들은 폭정에 분노해 반란을 일으켜 트라시볼로스를 축출하고 [[민주정]]을 도입했다. 기원전 458년에서 452년 사이, 시칠리아의 원주민들은 섬 내부에 강력한 국가를 새우고 모르간티니 등 일부 그리스와 카르타고인 도시국가들을 장악했다. 시라쿠사의 제1민주정은 이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끝에 시칠리아 원주민들을 제압하고 그들을 간접 지배했으며, 엘바 섬과 코르시카 섬 등 여러 섬에도 원정을 이어나갔다. 이윽고 기원전 445년 아카간타를 공략하면서 시칠리아 섬의 절반 이상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시라쿠사의 패권에 위협을 느낀 많은 시칠리아 도시들은 아테네와 손을 잡았다. 아테네 역시 스파르타의 동맹인 코린토스와 관계가 깊은 시라쿠사가 스파르타와 손을 잡고 자신들을 칠 수 있다고 여겼거니와 시칠리아의 풍요로운 자원에도 관심이 많았기에 시라쿠사를 장차 도모하려고 했다. 기원전 427년, 아테네는 시칠리아로 함선 20척을 보내 시라쿠사에 맞서는 레기온과 레온티노스 등 동맹도시들을 지원했고 기원전 425년에 증원군 40척을 파견했지만, 기원전 424년 아테네와 손을 잡았던 시칠리아의 동맹도시들이 시라쿠사에 복종을 서약하면서 무위에 그쳤다.{'''제1차 시라쿠사(시켈리아) 원정''', 기원전 427~424} 아테네는 이후에도 시라쿠사와 다른 도시국가들의 분쟁이 발생할 때마다 시라쿠사를 견제했다. 그러던 기원전 416년, 세게스타가 도움을 요청하면서 모든 전쟁 비용을 부담하겠다고 하자, 아테네는 이에 혹해 전함 134척, 중장보병 5천 명 이상, 함대 운용인력 2만 명 이상에 달하는 대규모 원정대를 파견했다('''[[펠로폰네소스 전쟁#s-4.2|제2차 시라쿠사 원정]]''', 기원전 415~414). 아테네군은 초반에는 시라쿠사군을 압도하여 시라쿠사를 함락 직전까지 몰아붙였지만, 시라쿠사의 구원 요청을 받은 스파르타군이 견제하면서 차츰 장기전으로 흘러가다가 보급이 끊기면서 지리멸렬해졌다. 결국 시라쿠사-스파르타 연합군의 협공에 궤멸되어 원정군 지휘관들은 전원 처형되었고, 아테네 사람 7천 명이 생포된 뒤 채석장에서 죽을 때까지 노역을 해야 했다. 아테네군이 궤멸되면서 전세가 급격히 불리해지자, 세게스타는 카르타고에 구원을 요청했다. 기원전 409년, 카르타고는 히메라 전투 때 전사한 하밀카르의 손자인 한니발 마고 휘하의 대군을 파견했다. 한니발 마고는 셀리눈다, 히메라, 아크라간타, 겔라, 카마리나를 함락시키고 히메라에서 할아버지의 죽음에 복수하려고 그리스인 3천 명을 집단 처형했다. 이후 시라쿠사와 한니발 마고 간의 전쟁이 수년간 이어졌는데, 전세는 갈수록 시라쿠사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기원전 406년 12월 카르타고군이 시라쿠사군을 격파하고 아르라가스(오늘날 아그리젠토)를 공략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시라쿠사인들은 기원전 405년 [[대 디오니시오스]]를 무제한의 권한을 가진 '스트라테고스 아우토크라토르'(strategós autokrátor: 단독 지휘관)로 선출했다. 비상시에만 시행되는 임시 관직이었지만, 그는 이를 기회로 삼아 절대권력을 손에 넣기로 작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