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시라쿠사 (문단 편집) === 중세 === [[파일:카스텔로 마니아체.jpg]]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와 [[프리드리히 2세]]에 걸쳐 오르티기아 섬의 끝단 세워진 카스텔로 마니아체의 전경 이후로도 동로마 령으로 유지되던 도시는 827년,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국가인 [[아글라브 왕조]]의 원정군에게 포위되었다. 비록 이듬해 포위는 풀렸지만, [[아글라브 왕조의 시칠리아 정복|시칠리아 섬의 대부분이 조금씩 장악되며]] 시라쿠사는 반세기 가량 고립되게 된다. 해상 보급을 받으며 버티던 시라쿠사는 873년 5월, 결국 아글라브 군에게 함락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시칠리아의 저항 의지가 꺾였고, 결국 964년 마지막 동로마 거점이 함락되며 [[시칠리아 토후국]]이 섬을 통일했다. 시칠리아 토후국은 동로마 저항의 거점이던 시라쿠사 대신 [[팔레르모]]를 수도로 삼았고, 이로써 섬의 중심이 영영 옮겨지게 된다. 1040년, 동로마 장군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마니아케스의 시칠리아 원정|시칠리아 재정복 시도]]의 일환으로 시라쿠사를 점령했다. 그는 성녀 루치아의 성유물을 수도로 보냈고, 더 진격하려 했으나 롬바르드-노르만 용병대의 반란과 동행한 장군들의 농간으로 해임되었다. 이후 동로마 군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축출되었다. 그리고 1085년 [[루제루 1세]]의 노르만 군이 시라쿠사를 점령하였고, 그는 시칠리아 백국을 선포했다. 모스크들은 다시 교회로 환원되었다. 다만 [[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는 여전히 팔레르모로 유지되었다. 1194년 도시를 포함한 섬 전역은 [[호엔슈타우펜 왕조]]령이 된다. 호엔슈타우펜 왕조가 [[신성로마제국]] 계승전에 휘말려 약화된 틈인 1205년 ~ 1220년간 [[제노바]] 출신의 알라만노 다 코스타가 지배하기도 했다가, [[프리드리히 2세]]가 주권을 회복하였다. 스스로 시칠리아 인이라 여겼던 프리드리히 (페데리코)는 마니아체 요새, 주교궁, 벨로모 궁전 등을 세웠다. 프리드리히의 사후 프랑스의 앙주 가문이 일시 집권했으나, [[시칠리아의 만종]] 반란이 벌어졌다. 시라쿠사 시민들은 프리드리히 혈통을 이은 [[아라곤 왕국]] 측에 섰고, 결국 1298년 독립을 얻었다. 비록 아라곤-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는 아니었지만, 시라쿠사는 특권을 받아 안정을 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