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서노 (문단 편집) === 백제를 건국하다 === 기원전 19년 4월에 부여에서 아내 예씨가 낳은 친아들 [[유리명왕|유리]]가 찾아오자 동명성왕의 태도가 급변하여 유리를 [[후계자]]로 정하려 하였다. 하루아침에 차기 왕위를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굴러온 돌]]에게 빼앗기고 언제 버림받을지 모를 신세가 된 비류와 온조는 절망에 빠졌다. 게다가 그 해에 동명성왕이 죽으니 소서노, 비류, 온조 등은 더이상 고구려에서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힘들게 되었다. 비류와 온조는 결국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패수(浿水)와 대수(帶水) 두 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갔다. 이후 형인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동생인 온조는 [[위례성]]에 도읍을 정해 나라를 세운다. 처음에는 '''십제'''(十濟)였다. 여기서 남하 과정이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소서노, 비류, 온조 등이 남하할 때는 이를 추종하는 지지 세력들도 함께 했을 것이다. 그런데 졸본에서 미추홀과 위례성이 있는 [[한강]] 유역까지 가려면 [[낙랑군]] 등의 [[한사군]] 지역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기록 중에는 소서노 세력과 한사군 세력이 충돌하거나 하다못해 어떤 식으로든 접촉했다는 등의 내용이 없다. 《삼국사기》 -온조왕-조에서도 그냥 '남쪽으로 갔는데 백성들이 따르는 자가 많았다'라고만 나오고 경로에 대한 설명은 없다. 《삼국사기》 자체의 기록 미비의 한계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고대엔 영토에 비해 인구가 적어 밀도가 널널해 간접 통치 지역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동 과정서 접촉이 없거나 적을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