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소 (문단 편집) ==== 한반도에서의 소 ==== * [[한반도]]에선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키우기 시작했다. [[고조선]]의 유적지에서 다량의 소, 말, 돼지, 닭 등의 뼈가 출토되고 있어 한국 민족사의 시작과 함께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여의 사출도 중 하나인 우가의 뜻에서도 소와 관련된 점을 알 수 있으며 '후한서' 동이전에서는 부여와 고구려, 예, 한 등에서 소를 사육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쟁이 빈번하던 삼국시대에는 소보다 [[말(동물)|말]]을 더 많이 키웠으나 고려 조선으로 넘어가면서 소가 더 늘어나게 되었다. 기록상 [[신라]] [[지증왕]] 때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는 우경(牛耕)을 실시했는데, 6세기가 될 때까지 신라 사람들이 농사짓는데에 소를 활용하지 못했었냐는 의문이 생기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이 때 우경법이 시작됐다고 보기보다는 우경법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를 시작했다고 본다. 조선시대에는 가마를 탈 수 없고, 말도 없었던 평민들은 말 대신 소를 타고 다니기도 했다. [[맹사성]]처럼 [[선비]]들도 소를 자주 타고 다녔다. 말과는 달리 평시에는 속도가 느려서 풍경을 감상하기 좋았고 잠깐 졸아도 떨어질 염려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이동수단, 좋은 경작기에 심지어 양질의 고기가 되어주는 소의 가치는 한반도가 산업화가 많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그 가치가 아주 컸다. 이 때문에 이런 소를 훔치는 소도둑을 지금보다도 더 [[천하의 개쌍놈]] 취급했다[* 작은 것을 도둑질한 사람이 나중에는 큰 것도 도둑질한다는 의미의 '바늘 도둑이 소도둑된다'란 속담이 바로 이것이다.]. * [[조선시대]]에는 가축을 관영 목장에서 길러왔으나 임진왜란으로 혹심한 파괴를 겪고 통제가 약화되면서 관영 목장은 빠르게 줄어든다. 이후 개인 축산업이 발달한다. 함경도에 개인이 운영하는 소목장이 많았다. 총 16만 마리에 이르렀고 품질이 좋아 조선 말기엔 한 해간 블라디보스토크에 3만 마리의 조선 소를 수출하기도 했다. 조선 후반 전통적으로 소를 많이 길렀던 지역은 함경도의 함흥, 북청 지방과 경기의 개성, 수원, 경상도의 대구 등지였다. 조선시대에 소를 기를 땐 계절에 따라 봄에는 짚과 밀기울, 콩깍지, 겨, 콩 등을 날것으로 먹였고 따뜻한 계절엔 산과 들에 놓아 먹였다. 한겨울엔 목화씨와 닥나무잎을 섞어 [[소죽]]을 쑤어 먹였으며 잔등에 소삼정이라는 덕석을 씌워 관리했다.[* 고사신서 목양문 양우.] * SBS 드라마 [[식객(만화)|식객]]의 [[등장인물]]인 소 '꽃순이'나 해당 드라마의 원작 만화에서의 '순진이',[* 3권 '소고기 전쟁' 편에서 [[성찬(식객)|성찬]]이 [[소고기]] 납품 경쟁을 위한 요리대결을 앞두고, [[김진수(식객)|진수]]와 함께 [[아롱사태]] [[육회]]를 만들기 위한 소를 구하려고 사들인 소였다. 주인이 반려동물 아끼듯 아끼던 소였던지라, '순진이'이라는 별도의 이름도 붙어있고 그 소가 [[보리]] 이파리를 좋아하는 것도 정확하게 꿰고 있었다. 이런 소를 성찬에게 팔려고 했을 때 주인 내외가 기뻐하다가 말고 [[도축|순진이의 운명]]이 얼핏 떠올라서 슬퍼서 울거나, 마지막으로 쇠죽을 주었는데도 순진이가 주인의 반응을 보고 대강 눈치를 채고 먹기를 거부하기도 하는 등, 진짜로 애완동물에 가까운 대접을 받는 걸로 나온다. 그리고 같은 편의 마지막 에피소드에서 성찬 일행이 비육용 소를 사러갔을 때, 그에게 소를 판 축산업자가 부인에게 가정보다 소에 더 신경쓴다고 타박을 당하거나, 성찬에게 "소들이 [[도축장]]으로 팔려가는 날에는 기분이 씁쓸한 나머지 술로 달랜다"고 하소연하는 내용이 나오기도 했다. 키우는 용도에 관계없이 소를 키우는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무슨 관점에서 소를 인식하는지를 잘 보여준 부분이다.] 소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워낭소리]] 등등을 봐도 확실히 농경중심이었던 한국과 소는 여러가지로 친밀한 관계에 있다. 농업이 국가 주요 산업이었고 농기계가 보급되지 않았던 1960~70년대만 해도 소는 농가의 중요 재산으로 꼽힐 정도로 농가 경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그래서 농민들은 급전이 필요할 경우 소를 담보로 돈을 빌리기도 했고, 송아지를 잘 키워서 어느 정도 크면 우시장에 내다 팔아 목돈을 마련하기도 했다. 특히 자녀들이 대학에 진학할 경우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소를 파는 경우가 많았던지라, 흔히들 대학을 '우골탑(牛骨塔)'이라고 비꼬아 부르기도 한다. 요즘처럼 [[부실대학|개나 소나 대학에 가는]] 시대가 아니었다 보니 그때 당시 대학은 知性(지성)의 象牙塔(상아탑)이라고 우대받던 시대였는데, [[공대]]로 유명한 [[한양대학교|h대]] 밎 3k대 등 몇 개의 사립대학에서 부정입학 사건이 터지면서 상아탑이 아니라 우골탑이라고 언론의 비꼼성 기사가 나온 것이 시초다. * 1980년대 초반까지 이양기가 한창 보급되던 시기는 아직 기계화 영농의 태동기라서, 공중파에서는 모내기철에 사람이 일일이 모를 심는 농사일을 TV에서 많이 방송하며 도시 일반인들에 농촌일 돕기에 참여를 독려하였다. 1980년도 초중반엔 거의 농촌 전업 농부 마을별로 소보다 훨씬 빠른 작업 속도를 내던 경운기 몇대씩이 보급되다시피하던 태동기여서, 80년대까지 농사일에 핵심이던 황소들은 대단위 축사도 아닌 농사일을 준비하며 쉬던 주인집 외양간에서 논밭으로 출퇴근도 없이 애완동물 마냥 빈둥빈둥 먹고자기만 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소 주인들은 처음 다루는 농기계가 아직 못미더워 못쓰게 될까봐 소를 계속 준비시켜놓거나, 오래도록 가까이 두던 소에 애착이 있어, 놀고먹는 소를 처분하는데 시간이 한해 농기계 농사가 처음 끝날때까지 꽤 걸렸던 것이다. * [[2008년]] 12월 송아지 값이 3만 원[* 이 경우는 [[젖소]]의 수송아지에 한정, 육우라고 칭하는 송아지 가격이다.]이라 축산농가가 많이 힘들다고 한다. [[FTA]] 이후로 전체적인 소고기 가격이 많이 내린 탓이라고. 그런데 한우의 소비자 가격은 체감되지 않아서 중간업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있다. 다만 송아지 가격뿐만이 아니라 사료 가격도 고려해야 한다. * 한국에선 유독 사용범위가 넓어 소의 모든 부분을 사용한다. [[일본]]이 소를 150부위로, [[영국]]이 200여 부위로 도살하는데 비해 한국에서는 소의 부위를 300개가 넘는 부위로 구분하여 도살한다. 세계적으로도 이렇게 세세하게 분류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이것만 봐도 시장바닥 한켠에 쇠뼈가 밟힐 정도로 소를 먹어댔다는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살코기 부위 외에도 곱창, 막창, 간 등의 내장도 먹는다. 심지어 꼬리조차 '소꼬리곰탕'으로 만들어먹는다. 피는 선지를 만드는데 쓰이며 배설물은 비료로 활용한다. 심지어 소의 '''담낭에 생긴 병적인 응결물'''은 약으로 쓴다(흔히 담이라 부르는 그것이다. 이것이 아주 유명한 신경안정제인 [[우황청심환]]의 재료 '[[우황]]'). 소뿔도 버리지 않고 갈아서 약이나 [[국궁]]의 [[국궁/재료와 종류|소재]],[* 보통 수입산 물소 뿔로 만든 것을 [[각궁|흑각궁]]이라며 중요시했고, 현은 소의 힘줄로 주로 만들었다.] [[아교]],[* 전통 접착제. 여기에는 발굽도 들어간다.] 화각 공예품을 만드는 데 쓴다. 뼈란 뼈는 사골국물 확정이고 끓이고 남은 뼈는 갈아서 거름으로 쓴다. 가죽은 의류재료나 기타 [[가죽]]제품[* [[가죽]]가방, [[구두]] 등]의 재료로 아주 요긴하게 쓰인다. 또한 말랑말랑한 소프트겔 형태의 영양제(건강보조식품) 외피 재료로도 우피 성분이 사용되었으나, 한국에서는 몇 년 전부터 [[광우병]] 우려를 이유로 우피성분이 함유된 소프트겔 제품은 모두 통관이 금지되었다. * 2008년부터 쇠고기 이력제가 시작되었다. 위에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귀에 [[노란색]] 고무재질의 네모난 물건이 귀표다. 귀표가 없으면 양수양도를 할 수 없으며, 물론 도축도 불가능하다. 이 법 덕분에 소 나이로 사기행각을 벌이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력제를 통해 유통과정을 역추적할 수도 있다. * [[한우]]가 유명한 [[강원도]] [[횡성군]]에는 소를 키우는 농가가 많은데, 사람이 워낙 적은 동네라 지역민들이 자기 지역을 소개할 때 "소가 사람보다 더 많은 동네"라는 농담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