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죽교 (문단 편집) === 정몽주가 죽은 장소가 아니다? === '선지교'가 '선죽교'로 변한 것도 정몽주의 일화 때문이라는 설이 유명했다. 다리 옆에서 참[[대나무]] 가지가 솟아 자랐다고 하여 '선죽교(善竹橋)'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만 정몽주가 죽기 4년 전(1388) 이미 위화도 회군 관련한 기록에서 선죽교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에 정몽주의 죽음과 대나무가 솟아서 이름을 선죽교로 바꿨다느니 하는 말은 낭설에 불과할 뿐이라는 비판이 있다. [[용비어천가]], 송경록 등의 기록을 볼 때 정몽주는 실은 개성 시내인 태묘동에서, 철퇴가 아닌 칼로 목이 베여 죽었다는 추측도 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8060700209207008&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78-06-07&officeId=00020&pageNo=7&printNo=17437&publishType=00020|(참조)]]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고려사]]등 조선의 공인 기록에는 선죽교에서 죽었다가 아니라 "정몽주가 돌아가는 길에 죽었다"고만 나와있다. 즉 선죽교 이야기는 없는 것을 알수가 있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 >[[태조실록]] 권1 총서, [[http://sillok.history.go.kr/id/kaa_000131|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 >[[1392년]] 을묘일(음력 [[4월 4일]]).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이 수시중(守侍中) 정몽주(鄭夢周)를 죽였다.''' >---- >『[[고려사]]』 권46, 세가46 공양왕2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72127&categoryId=62163&cid=62131|##]] ---- >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알리자 정몽주가 태조의 집을 찾아가 낌새를 살피려 했으나 태조는 평소처럼 그를 대했다. 태종이, 때를 놓칠 수 없다고 하며 '''정몽주가 돌아갈 때 조영규(趙英珪) 등 너덧 명을 보내어 길에서 그를 격살하게 하니 나이 쉰여섯이었다.''' >---- >『[[고려사]]』 권117, 열전30, 정몽주[[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672127&categoryId=62163&cid=62131|##]] 조선시대에도 이와 관련된 의문이 있었는데, 선죽교의 혈흔이나 혈죽 같은 [[괴력난신]]적 낭설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정동유가 지은 백과사전 '주영편'에서도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 문인들의 기록에서는 왜 선죽교 혈흔이나 혈죽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후대의 설화나 이야기를 배제하면, 당대 기록에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언급이 없다.[* 이것도 반론이 가능하다. 일단 기사 자체가 40년 전 기사이고 후속편이 없으며, '송경록' 이라는 책은 [[육신전]]이라는 소설을 쓴 [[남효온]]이 지었다는 책인데, 육신전 자체의 허구가 드러난 이상 송경록도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모른다. 용비어천가도 본문에 없고 부록에 있다. [[용비어천가]]와 [[고려사]]가 편집되던 시점에 [[계유정난]] 등 정치적 혼란이 많았음을 감안하면 이 사건에 대한 견해도 오락가락했을 테니 선죽교 전설을 뒤집기에는 불충분하다 하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에 관련 기록이 없다'''는 것은 중요한 지적으로, 전설이 사실이라고 확증할 근거 역시 부족한 게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