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죽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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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善竹橋 / Sonjuk Bridge
파일:external/ojsfile.ohmynews.com/IE000857377_STD.jpg
위치





1. 개요
2. 역사
2.1. 정몽주가 죽은 장소가 아니다?
3. 가설 선죽교
4. 노래
4.1. 가사



1. 개요[편집]


개성 송악산에 흐르는 물은 만월대의 티끌은 씻어가도 선죽교의 피는 못 씻으며, 진주 남강에 흐르는 물은 촉석루의 먼지는 씻어가도 의암에 서려있는 논개의 이름은 못 씻는다.

만해 한용운[1]

개성시 선죽동[2]에 있는 돌다리. 북한의 국보 159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개성역사유적지구에 속한다. 조선의 건국과 관련하여 이방원정몽주 사이의 갈등, 그리고 그의 죽음에 얽힌 일화로 유명하다.

고려시대에는 난간이 없는 다리였으나, 조선시대에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여 통행을 막고 옆에 새로운 돌다리를 설치했다. 기사


2. 역사[편집]


파일:나무위키상세내용.png   자세한 내용은 정몽주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본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는데, 말 그대로 '좋은 땅의 다리' 라는 뜻이다.[3]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 때 숭인문으로 들어온 이성계가 선지교를 지나서 황룡대기를 날리며 개성 자남산에 올랐다고 한다.

이 다리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정몽주가 살해된 사건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1392년 정몽주는 이 곳을 지나다 이방원의 지시를 받고 기다리던 조영규에 의해 살해되었다. 오늘날에 다리 위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는데, 야사에 의하면 이것이 정몽주의 혈흔이며, 이는 일제 시대까지도 선명했지만 현재는 희미한 무늬만 남아 있다고 전한다.[4] 물론, 과학적으로는 특별히 처리되지 않은 혈색소가 노상에서 600년간 풍화, 침식되지 않고 그대로 남을 수는 없으므로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2차 왕자의 난 때에 전투가 일어난 곳도 이 곳 선죽교 부근이었다고 한다.

선죽교 서쪽에는 정몽주를 제향(祭香)하기 위해 세웠다는 숭양서원(崇禳書院)[5]이 있으며,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와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지금은 선죽교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지만 과거에는 물이 흐르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는데 김일성이 "다리 밑인데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며 지금처럼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게 했다고 한다.[6]

2.1. 정몽주가 죽은 장소가 아니다?[편집]


'선지교'가 '선죽교'로 변한 것도 정몽주의 일화 때문이라는 설이 유명했다. 다리 옆에서 참대나무 가지가 솟아 자랐다고 하여 '선죽교(善竹橋)'로 부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다만 정몽주가 죽기 4년 전(1388) 이미 위화도 회군 관련한 기록에서 선죽교라는 이름이 나온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이에 정몽주의 죽음과 대나무가 솟아서 이름을 선죽교로 바꿨다느니 하는 말은 낭설에 불과할 뿐이라는 비판이 있다. 용비어천가, 송경록 등의 기록을 볼 때 정몽주는 실은 개성 시내인 태묘동에서, 철퇴가 아닌 칼로 목이 베여 죽었다는 추측도 있다. (참조) 그리고 조선왕조실록, 고려사등 조선의 공인 기록에는 선죽교에서 죽었다가 아니라 "정몽주가 돌아가는 길에 죽었다"고만 나와있다. 즉 선죽교 이야기는 없는 것을 알수가 있다.

이때 전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유원(柳源)이 죽었는데, 몽주가 지나면서 그 집에 조상(弔喪)하느라고 지체하니, 이 때문에 영규 등이 무기(武器)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되었다. 몽주가 이르매 영규가 달려가서 쳤으나, 맞지 아니하였다. 몽주가 그를 꾸짖고 말을 채찍질하여 달아나니, 영규가 쫓아가 말머리를 쳐서 말이 넘어졌다. 몽주가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서 급히 달아나니, 고여 등이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태조실록 권1 총서, 정몽주가 조준 등을 처형코자 하니, 태종이 정몽주를 죽이고 일당을 탄핵하다


1392년 을묘일(음력 4월 4일). 판전객시사(判典客寺事) 조영규(趙英珪) 등이 수시중(守侍中) 정몽주(鄭夢周)를 죽였다.

고려사』 권46, 세가46 공양왕2 ##


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알리자 정몽주가 태조의 집을 찾아가 낌새를 살피려 했으나 태조는 평소처럼 그를 대했다. 태종이, 때를 놓칠 수 없다고 하며 정몽주가 돌아갈 때 조영규(趙英珪) 등 너덧 명을 보내어 길에서 그를 격살하게 하니 나이 쉰여섯이었다.

고려사』 권117, 열전30, 정몽주##

조선시대에도 이와 관련된 의문이 있었는데, 선죽교의 혈흔이나 혈죽 같은 괴력난신적 낭설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정동유가 지은 백과사전 '주영편'에서도 고려 말이나 조선 초기 문인들의 기록에서는 왜 선죽교 혈흔이나 혈죽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는지 알 수 없다 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로 후대의 설화나 이야기를 배제하면, 당대 기록에는 정몽주가 선죽교에서 죽었다는 언급이 없다.[7]


3. 가설 선죽교[편집]


파일:영천 가설 선죽교.jpg
영천 가설 선죽교
경상북도 영천시 임고면 양항리가설 선죽교가 하나 더 있다. 영천 가설 선죽교는 2012년 5월 24일에 임고서원 1단계 성역화 사업이 완료되면서 만들어진 것이며, 영천에 가설 선죽교가 만들어진 이유는 영천시에서 정몽주가 영천 출신임을 알리려는 목적 때문. 정몽주의 위패를 봉안한 임고서원 옆에 있다.


4. 노래[편집]



1949년에 선죽교의 핏자국을 토대로 한 이인권[8]의 '선죽교'라는 노래가 발표되었다. 이 노래를 작사, 작곡한 김해송[9]은 직접 선죽교에 가서 핏자국에 물을 부어보고 담뱃갑에다가 즉석에서 작사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김해송이 월북하는 바람에[10] 금지곡이 될 것 같아 작사가 유호가 가사를 다듬었고, 작곡가 이름을 김해송의 처남[11]인 '이봉룡'으로 바꿔서 표기했다.


4.1. 가사[편집]


송도라 옛터전에
달빛도 차가운데
말 없는 바람결에
소나무 우적이네
아느냐 충성의 피
흐른 곳 어드메냐
목 메어 묻는 말에
돌짬이 들먹이네
바람이 잠 잔다고
달마저 흐렸느냐
선죽교 피다리엔
벌레만 우는구나
몸이야 가셨지만
혼마저 가셨으리
정포은[12] 이름 석자
잊지야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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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21년 12월 조선불교청년회 주최로 열린 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철장철학'을 주제로 강연할 때 강연 말미에 덧붙인 말이라고 한다.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도 등장했다.[2] 헌법상 경기도 개성시 선죽동 262번지[3] <고려사>에는 무신집권자 최이가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 선지교(地橋)였다는 언급이 있는데, 선지교와는 한자 하나만 다르고 발음이 같아서 사실은 서로 같은 곳을 가리킨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4] 얼룩의 범위가 60년 전과 현재의 모습이 좀 다른 듯 하지만#, 이때 찍은 사진은 혈흔으로 추정되는 것에 물을 부은 직후의 모습이라는 추측이 있다.[5] 무려 정몽주 자신이 살던 집 자리라는 전승이 있다. 흥선대원군서원 철폐 이후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에 들어갔다.[6] 출처: <개경의 생활사>[7] 이것도 반론이 가능하다. 일단 기사 자체가 40년 전 기사이고 후속편이 없으며, '송경록' 이라는 책은 육신전이라는 소설을 쓴 남효온이 지었다는 책인데, 육신전 자체의 허구가 드러난 이상 송경록도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모른다. 용비어천가도 본문에 없고 부록에 있다. 용비어천가고려사가 편집되던 시점에 계유정난 등 정치적 혼란이 많았음을 감안하면 이 사건에 대한 견해도 오락가락했을 테니 선죽교 전설을 뒤집기에는 불충분하다 하겠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1차 사료에 관련 기록이 없다는 것은 중요한 지적으로, 전설이 사실이라고 확증할 근거 역시 부족한 게 사실이다.[8] '귀국선', '미사의 노래', '꿈꾸는 백마강' 등을 부른 가수다.[9]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가수 이난영의 배우자이다.[10] 정확히는 납북 인사다.[11] 즉 이난영의 오빠.[12] 정몽주의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