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죽교 (문단 편집) == 역사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정몽주)] 본래 이 다리의 이름은 [[선지교]](善地橋)였는데, 말 그대로 '좋은 땅의 다리' 라는 뜻이다.[* <고려사>에는 무신집권자 최이가 군사를 훈련시킨 곳이 선지교('''選'''地橋)였다는 언급이 있는데, 선지교와는 한자 하나만 다르고 발음이 같아서 사실은 서로 같은 곳을 가리킨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우왕 14년(1388) [[위화도 회군]] 때 숭인문으로 들어온 이성계가 선지교를 지나서 황룡대기를 날리며 개성 자남산에 올랐다고 한다. 이 다리가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정몽주가 살해된 사건의 무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1392년]] 정몽주는 이 곳을 지나다 [[이방원]]의 지시를 받고 기다리던 [[조영규]]에 의해 살해되었다. 오늘날에 다리 위에 붉은 자국이 남아 있는데, 야사에 의하면 이것이 정몽주의 혈흔이며, 이는 일제 시대까지도 선명했지만 현재는 희미한 무늬만 남아 있다고 전한다.[* 얼룩의 범위가 60년 전과 현재의 모습이 좀 다른 듯 하지만[[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29&pn=1&num=9644|#]], 이때 찍은 사진은 혈흔으로 추정되는 것에 물을 부은 직후의 모습이라는 추측이 있다.] 물론, 과학적으로는 특별히 처리되지 않은 혈색소가 노상에서 600년간 풍화, 침식되지 않고 그대로 남을 수는 없으므로 전설 같은 이야기이다. [[2차 왕자의 난]] 때에 전투가 일어난 곳도 이 곳 선죽교 부근이었다고 한다. 선죽교 서쪽에는 정몽주를 제향(祭香)하기 위해 세웠다는 [[숭양서원]](崇禳書院)[* 무려 '''정몽주 자신이 살던 집''' 자리라는 전승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이후에도 살아남은 47개 서원에 들어갔다.]이 있으며,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 2기와 표충비(表忠碑)가 있다. 지금은 선죽교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지만 과거에는 물이 흐르지 않았다는 증언도 있는데 [[김일성]]이 "'''다리 밑인데 물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말이 되냐'''"며 지금처럼 다리 밑으로 물이 흐르게 했다고 한다.[* 출처: <개경의 생활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