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상주시 (문단 편집) == 역사 == ||<-12> '''고대 상주 행정구역 변천사''' || || 사벌국[br](沙伐國) || → || 사벌주[br](沙伐州)[br](249) || → || 상주[br](上州)[br](525) || → || 상주[br](尙州)[br](757) || → || 사벌주[br](沙伐州)[br](757) || 삼한시대부터 [[사벌국]](沙伐國), 사량벌국(沙梁伐國)[* 사량(沙梁)과 발음이 비슷한 상락(上洛) 또한 상주를 뜻하는 별명이었다. 중국의 전통적인 수도인 [[낙양]](洛陽)과 한자 락(洛)을 같이 써, 옛 사람들은 상주를 낙양에 비견하기도 했다. 또한 [[낙동강]]의 이름도 ‘상주(낙양)의 동쪽을 흐르는 강’이라 하여 나온 것이다.]이라는 부족국가가 번성하였고, [[삼국유사]]에 나오는 6가야 중 가장 고고학적 근거가 희박한 [[고령가야]]가 상주시 함창읍에 있던 것이 아니냐는 설도 있다.[* 고령가야는 [[경상남도]] [[진주시]]에 있었다는 설도 있다.] 249년 [[신라]]([[첨해 이사금]])가 이곳을 합병하고 사벌주(沙伐州)라 불렀다. 525년([[법흥왕]] 12)에는 2경(京) 5주(州)의 하나인 상주(上州)로 개칭하였으며, 757년([[경덕왕]] 16) 오늘날의 명칭인 상주(尙州)로 고쳤다. 통일신라 [[9주 5소경]] 중 하나인 상주의 치소(현대의 [[도청(행정)|도청]])가 있었으며, 지금의 경북 북부 지방 전체의 중심지였다. [[혜공왕]](재위 765~780) 때 사벌주로 복명(復名)되었다. 이 상주시는 문경, 영동, 보은과 함께 신라 눌지계 왕가의 근위대 겸 신라 정예병을 양성하는 아주 중요한 지역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사벌국]], [[아자개]] 문서 참조. 물론 눌지계 왕가를 밀어내고 신라의 왕권을 차지한 습보계(=무열왕계) 왕가 또한 눌지계 왕가가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왕실 직할병 양성 체제를 거의 그대로 승계하여 상주 지역이 누렸던 특권을 모두 보전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아자개]]와 [[후백제]]의 왕이 되는 [[견훤]]의 출신지로 흔히 알려져 있는데 이들은 당시 상주 가은현 출신이다. 이 곳은 당시에는 상주 소속이었지만 지금은 [[문경시]] 소속인 가은읍 지역 출신이다. 옛 이름인 '사벌(沙伐)'은 오늘날 하위 행정구역인 '사벌국면'으로 그 명맥을 이어 나가고 있다. 그러나 아자개가 문경 출생이었어도 후삼국시대 당시 주요 세력은 이 상주 일대에서 유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자개와 마찬가지로 견훤도 오늘날 문경시에서 태어났으나, 15세에 서라벌로 상경해 입대하기 전까지는 상주시에서 성장했을 개연성이 매우 높기에 견훤이 상주 사람이었다고 하는 얘기도 그렇게 틀린 말은 아니다. 906년도에 태봉이 진격했을 때 상주시는 태봉의 강역이 되지만, 907년도에 후백제군이 진격하여 상주-문경 일대를 장악하게 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아자개는 태조 왕건 드라마에서 나오는 모습마냥 견훤에게 내내 매우 부정적이었기에, 후백제는 상주 일대만큼은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여 상주시는 아자개가 후백제, 고려, 신라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고 중립을 유지하는 어정쩡한 곳이 된다. 그러나 끝내는 918년도에 아자개가 고려에 아예 귀부를 결정하여 고려의 판도가 된다. 하지만 927년에 견훤이 공산 전투에서 승리한 뒤로는 상황이 바뀐다. 견훤이 고려에게 가담한 문경 일대를 응징하는 차원도 겸해 대군을 몰고 왔는데 이 시기에 상주 일대 또한 군사력으로 제압하여 후백제령으로 편입한 것. 이후 후백제가 고려의 대반격에 경상도 일대 판도를 꽤나 잃지만 상주-문경만큼은 영토로 고수한 것을 보면 견훤과 신검이 조상들의 고향인 이 일대를 고려에게 잃지는 않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하긴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백제는 936년에 멸망했고 이후로 상주 일대는 고려의 영역이 된다. ||<-12> '''고려 상주 행정구역 변천사''' || || 상주[br](尙州)[br](940) || → || 상주목[br](尙州牧)[br](983) || → || 귀덕군[br](歸德郡)[br](995) || → || 안동대도호부[br](安東大都護府)[br](1012) || → || 상주안무사[br](尙州安撫使)[br](1014) || → || 상주목[br](尙州牧)[br](1018) ||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에 이르러 다시 상주로 지명을 고친 이후 현재에 이른다. 983년(성종 2) 지방제도를 정비하면서 전국 12[[목]](牧)의 하나가 되어 [[목사(관직)|목사(牧使)]]를 두었다. 1019년(현종 9) 전국 8목의 하나인 상주목으로 고쳐져 조선 전기까지 계속되었다. 고려시대에 [[경상도]]를 만들 때 상주의 상 자를 따서 지었다. [[경주시]]와 함께 영남의 주요 도시로 기능했다. 조선 세종 때 경주와 함께 이곳에 경상도 감영이 설치되었고, 1459년(세조 5) 진(鎭)이 설치되면서 상주는 경상도의 중심지가 되었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중에 경상도의 감영이 대구로 옮겨갔다. ||<-10> '''상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 || 상주군[br](尙州郡, 1895)[br]함창군[br](咸昌郡, 1895) || → || 상주군[br](1914) || → || 상주시[br](1986)[br]상주군[br](1986) || → || '''상주시'''[br](1995) || 1914년 [[부군면 통폐합]] 때 상주군과 함창군은 상주군으로 통합되어 18개 면을 두게 되었다. 1923년 4월 1일 상주면이 지정면으로 전환된데 이어[* <동아일보> 1923.2.27일자 4면 '四日부터指定面' 동시기 지정면이 된 곳은 동도 [[안동시]], [[경주시]], [[경상남도]] [[밀양시]], [[동래]], [[전라북도]] [[정읍시]], [[전라남도]] [[여수시]],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강릉시]], [[황해북도]] [[사리원]], [[평안남도]] [[안주시|안주]], [[평안북도]] [[정주시|정주]], [[선천군]], 현재의 [[자강도]] [[강계시|강계]], [[함경남도]] [[북청군]]등 17개면이었다.] 1931년 4월 1일 상주읍으로 승격하고, 1980년 12월 함창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6년 1월 상주읍이 시로 승격되어 상주군과 분리되었다. 1989년 4월 상주군의 화북 남부출장소가 화남면으로 승격되었다. 1995년 1월 상주시와 상주군이 상주시로 통합되었다. [[택리지]]([[이중환]] 저)에서는 상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고 있다. > 상주의 다른 이름은 낙양이며, 조령 밑에 있는 하나의 큰 도회지로서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다. 북쪽으로 조령과 가까워 충청도·경기도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낙동강과 임해서 김해·동래와 통한다. 운반하는 말과 짐 실은 배가 남쪽과 북쪽에서 물길과 육로로 모여드는데, 이것은 무역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 지방에는 부유한 자가 많고 또 이름난 선비와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도 많다. 우복 정경세와 창석 이준 모두 이 고을 사람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