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년산성 (문단 편집) == 역사 == [[신라]]가 삼국통일의 전초기지로 쓰려고 심혈을 기울여 축조한 요새였다. 성을 쌓는 데 화강암 약 1천만 개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3년간 노동하여 자비 마립간 13년(470)에 완공하였다. 5세기 한반도는 [[백제]]와 신라가 연합해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던 시대였고, 그래서 견고한 성이 필요했으므로 삼년산성을 축조한 것. 삼국사기는 삼년산성이 3년에 걸쳐 만들어 [[자비 마립간]] 13년(470)에 완공되었다고 할 뿐, 투입한 노동력의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는 적지 않았다. 다만 삼국사기의 소지 마립간 8년(486)조에 일선(一善: 현 경북 구미) 지방의 장정 3천 명을 동원해서 삼년성과 굴산성을 개축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진흥왕]]은 재위 15년(554) 이곳에서 조련한 군대를 몰고 [[관산성 전투]](현 [[옥천군|옥천]])에서 백제 [[성왕(백제)|성왕]]을 죽였다. 백제를 멸망시킨 [[김유신]]의 5만 군대도 삼년산성에서 훈련을 받았다. [[무열왕]]은 신라와 당나라 간 동맹을 위한 국제회의를 이곳에서 열었는데, 당나라에게 무력시위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후백제가 충북 일대로 확장하면서 후백제의 판도에 들어갔는데, 심지어 고려 태조 [[왕건]]도 후백제가 차지한 삼년산성을 재위 11년(928)에 빼앗으려다 크게 패한 바 있다. 그야말로 불굴의 천년요새였다. 이때, 후백제가 고려의 삼년산성의 일부인 오어곡성을 공략할때 호족의 배신으로 패하게 되자, 왕건은 배신으로 인한 분노로 배신자 가족들을 철퇴로 때려 죽인적도 있었다. [[난공불락]]의 [[요새]]답게 기록상 '''{{{+1 149승 1패}}}'''라는 무시무시한 성과를 남겼다.[* 승률을 계산해보면 99.3333...%라는 말도 안되는 수치다.] [[백제]]는 물론, [[수나라]], [[당나라]]도 꺾은 [[고구려]]조차 이 성 앞에선 답이 안 나왔다. 유일한 1패는 [[통일신라]] [[헌덕왕]] 14년(822) [[김헌창]]이 [[김헌창의 난|반란]]을 일으켰다가 삼년산성에서 관군에 패해서 함락당한 것. >위공과 제릉이 장웅의 군대에 합세해 삼년산성(三年山城)을 공격해 승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덕왕]] 14년(822) 전해지는 기록은 '''이게 전부'''라서 성이 함락된 유일한 사건인데도 불구하고 어떻게 함락되었는지는커녕 전투과정, 심지어 [[김헌창]]이 이 성에 있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한국의 수많은 성들 중에서도 탑급으로 난공불락이라 내부배신일 확률이 크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참고로 [[김헌창]]은 초기엔 우세했으나 신라군의 반격에 패전을 거듭하다가 본거지였던 [[웅진]]이 신라 관군에게 포위되자 자결했다. 고려가 통일한 뒤로는 더이상 최전방 요새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후 전쟁사에선 거의 등장하질 않는다. 특히 고려는 [[여요전쟁|거란]], [[여몽전쟁|몽골]], [[홍건적]], [[고려 말 왜구의 침입|왜구]] 등 수많은 외적의 침입을 받았고, 조선 역시 [[임진왜란]]이란 큰 전쟁을 겪었지만, 삼년산성에서는 큰 전투가 벌어진 적이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