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삼국지(정사) (문단 편집) == 정통성 == 진수는 위를 유일하게 기(紀), 즉 본기로 써서 위나라만 정통 천자국으로 기록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위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한 예로 유선이 즉위할 때에도 '황초 5년'이라 하여 위의 연호를 통해 시간을 구분하고 있다. 이는 위를 중앙 정권으로, 촉한과 오를 지방 정권으로 간주했음을 나타낸다. 촉한의 유비, 유선이나 오나라의 황제들은 일반 인물들처럼 전(傳), 즉 열전에 기록했다. 다만 촉한의 유비와 유선은 선주, 후주라고 칭하였다.[* 후대의 [[촉한정통론]]을 주장하는 유학자들에게는 불만이 있었는지, 촉의 군주를 더욱 높이고([[유비|선주]] → 소열제), 위의 군주는 그냥 조조, [[조비]] 등으로 표기한 판본이 나오기도 했다.] 위처럼 정통성을 부여하진 않았지만 이름을 그대로 적지는 않고 어느 정도 격을 높여 오보다는 더 권위있게 표현한 것이다. 또한 조조가 위왕(魏王)에 오를 때는 깔끔하게 위왕이 되었다고만 썼지만 유비가 한중왕(漢中王)이 될 때는 신하들과 유비 본인이 한나라 황제에게 올리는 글들을 자세히 실어 좀 더 비중 있게 서술하였다. 그러나 촉한은 나라이름을 공식적으로 '한' 이라 하였는데 진수는 '촉서' 라고 하여 촉한이 후한의 정통 후계자가 아님을 명시하였다. 오나라 황제들은 본명을 그대로 쓰면서 촉나라보다 더 낮게 취급했다. 서진 시대 사람이라는 진수의 사정을 생각하면, 당대에는 후한 → 위 → 진이 정통으로 취급받았으므로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진수가 촉을 정통이라 생각했더라도 서진 정권을 거스를 수는 없었기에 위나라를 정통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위나라와 서진이 별개의 나라긴 했지만 역성혁명으로 정식으로 선양을 받았기 때문에 서진 시절에도 위의 정통성은 중요했다. 만약 촉한을 천자국으로 인정해버리면 서진은 황제국을 침공하여 멸망한 오랑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도 촉나라 출신이어서인지 유비와 유선의 취급이 손권, 손량 등에 비하면 낫다. 결론적으로 정사 삼국지의 전체 구성과 서술방법으로 볼 때, 위를 정통으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를 정통으로 한 것은 당대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고 적어도 당나라 시절까지는 주류 의견이었으며 정부의 공식적인 의견이었다. 북위는 위, 서진을 이어 건국되었다 주장했고 당나라는 북위, 북주, 수를 이었다 생각했던 것이다. 남조의 경우도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를 계승한 송나라 이런 식이었다. 북송 때는 구양수, 소식, 사마광 같은 사람들의 의견이 달랐지만 위를 정통으로 보거나 정통이 없다(무통)고 봤지 촉을 정통으로 보진 않았다. 이때도 정부는 공식적으로 위나라를 정통이라 보았다. 하지만 더 후대에 나온 성리학의 시각으로 볼 때 커다란 흠결이었기 때문에 후대의 수많은 유학자와 사대부들에게 비판받았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가 그 대표격이다. 이후 탈봉건화를 강조한 현대의 중국사학자들은 삼국 중 가장 강대했으며, 최후에 중국을 통일한 것이 위를 계승한 서진이었기 때문에 진수의 판단이 실사구시적이라고 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