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마리아인 (문단 편집) === 유대인과의 관계 ===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은 모두 [[이스라엘 왕국]] 시대에는 같은 [[히브리인]], 즉 동족들이었다. 그러나 북왕국의 후손인 사마리아인들은 토라를 게리짐 중심으로 읽었고, 남왕국은 예루살렘 중심으로 읽었다. 남북의 이러한 차이와, 사마리아가 이방 문화에 오염되었다는 유대인들의 인식이 두 집단 사이의 긴장을 낳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유대인들에게도 할 말이 꽤 많았던 건 사실이며 이는 유대인들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처우와는 별개다. 이스라엘이 망할 때 상당히 많은 이스라엘인들이 탈출에 성공해서 유다 왕국으로 도망쳤던 건 사실이며 그 시기에 유다가 극적인 경제적 성장을 이룬 것이 고고학적으로도 입증된다. 또한 유다가 이후 북진해서 이스라엘의 영토 일부를 점령했을 때 그 지역의 이스라엘인들은 유다에 동화되었다. 바빌론 유수 이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과정을 다룬 구약 [[성경]]의 [[에즈라]]서에도, 유대인들이 이방 민족과 혼인 혼혈을 많이 했으며 이교 문화에 영향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적어도 근동의 다른 민족들에 비해선 정체성과 문화를 꽤 보존한 상태였고 이는 세계사적으로 이례적인 경우에 속한다. 물론 현대적, 역사적 상식으로 볼 때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차별하는 이유가 나름대로 근거는 꽤 있으나 합당했다곤 보기 어렵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음은 인정해야 한다. 또한 바빌로니아의 경우 아시리아와는 달리 유대 지역의 모든 지방 세력들까지 철저하게 파괴하려 하진 않았고 주로 예루살렘 주변의 수도권에 관리 역량을 집중했으며, 때문에 유다의 수도권 격인 예루살렘 주변 벤야민 일대 지역 토호들은 나름대로의 세력과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현대 한국인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제3의 부류들인데, 적어도 알려진 자료로 판단하면 이들이 유수에서 돌아온 부류와 딱히 갈등이 있었다는 조짐은 없고, 또한 사마리아인에게 더욱 우호적이었다는 개연성도 보이지 않는다. 사마리아인에 대한 유대인의 비판은 혼혈 그 자체보다는 이방 종교와의 혼합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위 '역사' 문단에도 말했다시피 [[셀레우코스 제국]]의 영향 때 사마리아인들은 헬레니즘 종교를 수용하였는데, [[마카베오 전쟁]] 등으로 헬레니즘 제국에 강렬히 저항하던 유대인들 입장에선 피가 거꾸로 솟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시 유대인들 또한 그리스식 이름이 퍼지고 경전을 그리스어로 서술하는 등 헬레니즘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었지만, 성소 이름에 제우스를 박아놓을 정도로 막나가지는 않았다. [[카라임|카라임파 유대교]]와 교리가 어느정도 겹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