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대 (문단 편집) == 오해 == 현재 중국에서는 "한국이 사대를 한 것은 한국이 중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며 한반도가 중국 영토라는 증거다."[* 중국도 북방민족들인 흉노, 토번, 돌궐 등에게 사대를 하기도 했는데,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중국 또한 몽골과 티베트 등의 식민지라는 논리로 연결된다. 물론 사대 관계를 종속 관계로 보는 관점도 많긴 하지만, 적어도 식민지나 영토의 개념과 동등하지는 않다. 실제로 명나라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 인조의 국왕 책봉을 거부했고 이것이 어느 정도 정치적 영향력으로 작용하긴 했으나 광해군이 폐세자되는 일은 없었고 인조 정권이 곧바로 붕괴하지는 않았다.]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중국은 한반도 내정간섭을 정당화하는데, 일본에선 일본의 과거 한국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사대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 지방 정권도 조선에게 사대를 한 적도 있고, 일본 또한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사대를 한 적도 있다. 사실 사대는 단순히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의 속국이 되어서 충성의 뜻으로 조공을 바치는 게 아닌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야 너희 나라가 강대국이고 세계 중심이라는 것 인정할테니 대신 우리나라 침략하거나 내정간섭 하지마"식의 조건으로 자국의 특산물을 바치고 강대국도 조공을 받는 대신 막대한 사례품을 제공하여 대국의 체면을 지키고 군사적으론 서로간의 주권과 국경을 인정하면서 이웃한 주변국들이 중국을 침략을 하지 않고 국경을 안정화시키는 게 자국의 이익이니 이를 허락하면서 서로간의 영토분쟁이나 갈등을 최소화하고 서로간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형식적인 행사였다. 이는 지금까지도 중국의 주변국 외교전략의 축인 내정불간섭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그 예로 [[남북국시대]]에 해당하는 [[구당서]] 현종본기의 725년 태산 봉선의식 기사에서는 봉선의식을 축하하러 온 나라들을 '조회하러 온 외국', '당나라의 내신 번국', '추장' 3단계로 나눠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서 [[신라]], [[말갈]](아마도 [[발해]]), [[일본]]은 조회하러 온 외국으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에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그 유민의 일부를 [[괴뢰국]]으로 부리고 있었는데 그에 해당하는 '고려 조선왕'과 '백제 대방왕'은 내신 번국왕으로 소개하고 있다. '내신 번국'은 당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당나라 내지에 사민되었거나 본거지를 잃고 당에 투항해 복속한 이들을 말한다. 이렇듯 형식상 상국 황제에게 책봉된 봉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단지 서열상 이름만 같을 뿐 '중국 국내 영토인 봉국의 '''왕''''[* 중국은 군주가 [[황제]]이며 [[왕]]이라는 개념은 왕자나 봉국 제후의 개념이다.]과 '영토 밖의 외국에 해당하는 봉국 '''왕''''은 엄연히 서로 달랐다. 또한 충성 의미로 바치는 조공도 개인의 사무역과 국경개방이 엄격히 통제된 당시로서는 예물이라는 형식으로 두 국가가 서로 자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자교환과 지식교류를 확대하는, 동아시아의 봉건국가들의 외교방침이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즉 약소국은 강대국의 속국이 되어 일방적으로 수탈당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조공국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고 강대국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는 현대 국제관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 거기다 천문학적인 비용과 자원 그리고 인력을 소비하는 전쟁보다는 무역적자가 더 싸게 먹힌다.] 오히려 사대를 한 나라에게 막대한 사례품을 내려서 그들이 반중국 노선을 걷지 못하게 달래야 했다. 실제 몽골이 건국한 원은 주변국가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조공과 공녀,환관,노예 등 을 요구하고 수탈하며 왕의 정당한 계승도 방해하는 등 내정에도 간섭하면서 반원 감정이 강해졌으며, 급기야 홍건적으로 보이는 농민반란이 일어나자 주변국들이 반원노선을 채택하고 명나라를 지지하는 사태까지 이른다.[* 조선 초 사례 보듯이 명나라도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였으나 원나라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고려 역사를 보면 귀족들 까지도 딸들을 공녀로 안보내고자 했다가 원나라 사신에게 매를 맞는 등, 원은 주변국가 지배층한테도 반발을 살 정도로 수탈하였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