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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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어원
3. 형식
4. 사례
4.1. 한국
4.1.1. 고려
4.1.2. 조선
4.2. 일본
5. 오해
6. 기타
7. 같이보기



1. 개요[편집]


사대(事大)는 전근대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에서 약소국이 강대국을 섬기는 조공책봉 관계를 기초로 한 외교 정책이다.

여기에서 유래한 말로 사대주의가 있다. 사대 정책의 평가에 대해서는 사대주의 문서를 참고하고, 이 문서에서는 사대 정책에 대해서만 약술한다.

사대정책으로 인해 대내적으로 생긴 정체가 외왕내제이다.


2. 어원[편집]


<맹자>의 양혜왕하(梁惠王下)에서 다음과 같은 글귀가 나온다.

齊宣王問曰:交鄰國,有道乎

제선왕이 묻기를, "이웃나라와 사귀는 데 길이 있는가?

孟子對曰:有。惟仁者為能以大事小。是故,湯事葛,文王事昆夷。惟智者為能以小事大。故大王事獯鬻,句踐事吳。以大事小者,樂天者也。以小事大者,畏天者也。樂天者保天下,畏天者保其國。《詩》云:『畏天之威,于時保之。』

맹자가 답하기를: "있습니다. 오로지 어진 이만이 대국으로서 소국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탕은 갈나라를 섬기고, 문왕이 곤이를 섬겼던 것입니다. 슬기로운 이만이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길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태왕은 훈육을 섬기고, 구천이 오나라를 섬긴 것입니다. 대국으로서 소국을 섬기는 자는, 하늘을 즐기는 자요, 소국으로서 대국을 섬기는 자는,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니, 하늘을 즐기는 자는 천하를 보존하고, 하늘을 두려워하는 자는 자신의 나라를 보존하는 것입니다. 시경에서 가로되, '하늘을 두려워하여, 이로서 자국을 지키는도다'라 하였습니다."


대국이 소국을 대하는 것은 (仁)적인 도리로서 이해되는 반면에 소국이 대국을 섬기는 것은 지혜에 기반한 현실정치(Realpolitik)으로 이해된다는 얘기다. 즉, 자신보다 작은 나라에게는 대인배처럼 베풀어 국제질서(천하)를 유지하고, 자신보다 크고 아름다운 국가에게는 외교적 지혜를 발휘해 스스로의 안보를 추구하라는 것.

사대교린(事大交隣,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나라와 교류함)은 조선의 기본 외교전략이기도 하였다.


3. 형식[편집]


중국 황제인 천자는 하늘의 명에 의해 중국뿐이 아니라 천하(세계 전체)를 다스리는, 문자 그대로 "하늘
[天]
의 아들
[子]
"이다. 그러므로 외국의 군주는 천자와 동등한 위치에서 외교를 할 수 없고, 그 신하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천자는 그의 지위를 인정해준다. 그리하여 중국의 관점에서는 천하의 모든 나라는 천자의 신하가 다스리는 나라이며, 중국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나라는 모두 번국이나 속국의 형식으로만 인정이 되었고, 그것을 거부하는 나라는 아예 상종을 못할 오랑캐로 여긴 것이다.

무엇보다 전근대 동아시아 사회에서 문화-경제면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압도적이었기 때문에[1] 한반도 왕조들과 베트남 왕조들은 중국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 형식상 사대의 예를 취했다. 즉 이것은 외교와 국제교류의 형식이었다. 중앙아시아에서도 무적이었던 티무르 제국조차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고 신하를 자처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티무르 제국이 명나라의 신하국이었다는 이야기는 성립하지 않는다.

사실 중국에서 사대관계에서 얻는 이익은 대체로 정신적이고 사상적인 측면이 강했다. 종주국으로서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해서 천자는 신하를 자처하는 소국들에게 보답하는 사여품을 내려야 했다. 이 사여품은 종주국의 위엄을 위해 조공품보다 더 많이 내리는 것이 원칙이고 이 비율은 양국의 힘의 균형관계에 따라 유동적으로 달라졌다. 사대관계는 단순한 상하관계가 아닌 패권국가와 동맹 관계를 유지하고, 선진국과 문화 기술교류를 하는 복잡한 정치외교 관계였다.

쌍방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만 이득이나 손해를 보는 협의관계는 성립할 수 없는 법이다. 중국 역시 주변국들을 신하국으로 삼으면서, 국내적으로 왕조의 정당성을 확인시킬 수 있었다.[2] 뿐만 아니라 중국 입장에서 사방에 조공국을 확보하는 것은 국방전략상의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조공국을 자국을 지켜주는 울타리로 삼는다는 것이다. 이는 중국이 조공국을 번속이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렇게 조공 질서에 편입되는 것이 중국뿐 아니라 조공국 왕조에게도 도움이 되었다는 점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조공국의 왕은 중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책봉을 받은 왕이기 때문이다. 즉, 조공국의 왕위를 찬탈하는 것은 중국 황제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어 왕위 찬탈자는 중국 군사력의 위엄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의 유명한 사례로는 임진왜란 당시 명이 조선에 20만의 원군을 보내고 쌀을 백만 석(9만 톤) 보낸것을들 수 있다. 이것은 조선 정부 외교의 성공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공체제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라 쌍방 모두가 나름대로의 이익을 얻는 관계였던 셈.


4. 사례[편집]



4.1. 한국[편집]



4.1.1. 고려[편집]


왕건이 조공하니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장흥(長興) 연간에 권지국사(權知國事) 왕건(王建, 태조)이 고씨(高氏)의 왕위(王位)를 잇고는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건을 현토주도독(玄菟州都督)으로 삼고 대의군사(大義軍使)로 임명하고,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

- 송사 > 『송사』권487 열전246 > 왕건이 조공하니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갑인일에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왕건(王建, 태조)을 검교태보(檢校太保)로 삼고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

- 구오대사 > 『구오대사』권43 당서(唐書)19 명종(明宗)9 >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고려는 처음부터 송나라에 사대하였다. 대표적으로 고려의 건국자였던 태조 왕건은 송나라와 후당이 정식으로 고려국왕으로 책봉해주기 전까지 권지국사(權知國事) 또는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만을 자처하였고 왕이라고 스스로 호칭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여기서 ‘권(權)’은 임시라는 뜻이고 ‘지(知)’는 맡는다는 뜻이므로, 권지국사(權知國事)는 "아직 책봉을 받지 못한 기간 동안에 임시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린다"라는 뜻을 가진 칭호로서, 권서국사(權署國事)와도 사실상 같은 의미였다. 그렇게 고려태조 왕건의 왕조 창건 이후 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이를 알리어 승인을 받아야만 왕이라고 칭할 수 있었고 이후 이러한 전통은 후대의 고려왕들에게까지 일종의 관례로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3]

광종 또한 잠시나마 고유 연호를 사용하면서 잠시 칭제건원을 하였지만 이후 송나라거란이 격렬하게 항의하자 결국 뜻을 거둔채 칭제건원을 취소하였고 송나라를 천자국으로 인정하고 송의 연호인 '건덕'만을 계속 사용하였으며 성종은 994년 6월, 송나라에 '고려는 진심으로는 송을 따르고 있으며 거란을 증오한다'는 국서를 보냈을 정도였다. 단순히 외교적 유불리 때문뿐만 아니라 성종은 중빠로서 유교의 사상을 따르고 중국의 제도를 들여오길 좋아했다. 실제로 성종은 원구단을 설치하고 3성 6부제를 도입한 장본인으로 알려져있지만 정작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로 격하시키고 《예기》에 입각하여 천자가 아닌 제후의 격식에 맞춰 태묘를 7묘가 아닌 5묘로 정비한 인물이었다.

그 뒤로는 여요전쟁 이후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요나라에 사대하였으나 송나라에 계속 사대하려했고 이것이 거란과의 추가적인 전쟁의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금나라가 강해지자 금나라에게 사대하였는데 여진족이 원래 고려에 사대했던 관계라 위상이 역전된것이었다.

다루가치의 지적에 따라 각종 용어를 격하하다

甲申 達魯花赤詰之曰, “稱宣旨·稱朕·稱赦, 何僭也?” 王使僉議中贊金方慶·左承宣朴恒, 解之曰, “非敢僭也, 但循祖宗相傳之舊耳, 敢不改焉.” 於是, 改宣旨曰王旨, 朕曰孤, 赦曰宥, 奏曰呈.

갑신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이 비난하면서 말하기를,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렇게 참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과 좌승선(左承宣) 박항(朴恒)을 시켜 해명하기를, “감히 참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옛 관례를 따랐을 뿐입니다. 감히 고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선지를 왕지(王旨)로, 짐을 고(孤)로, 사를 유(宥)로, 주(奏)를 정(呈)으로 고쳤다.

-

- 고려사 권제28 충렬왕(忠烈王) 2년(1276년) 3월 19일(음) 갑신(甲申)년


여몽전쟁에서 원종몽골제국쿠빌라이 칸에게 항복하여 원나라에 입조하였고 이때부터 원간섭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충렬왕 때부터 다루가치의 반발로 인해 대다수 제도가 크게 격하되어 완전한 제후국 제도가 정착되게 되면서 원에게 완전히 사대하는 나라가 되게 된다.

《明太祖御製文集(명태조어제문집)》

즉위 초에 옛 철왕(哲王)의 도(道)를 본받아 사이(四夷)의 추장에게 신속히 통보하여 중국에 군주가 있음을 알게 하였다. 이때에는 통호하려고 한 것에 불과했다. 고려국왕 왕전(王顓)이 곧바로 칭신입공한 것은 의외였다.

-

- 《明太祖御製文集》권6, 〈諭中書却高麗請諡〉.


나중에 원나라가 쇠퇴하자 공민왕은 몽골과의 칭신관계를 끊어버렸고 곧 있어서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주원장명나라에 칭신입공하면서 새로운 사대관계를 맺게된다. 하지만 얼마안가 이성계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 명나라는 이성계를 왕으로 정식으로 책봉하지 않는다. 진통 끝에 개국세력은 명나라에게 기자조선을 잇는다는 의미로 조선이란 국명을 윤허받고 조선으로 국명을 바꾸면서 공민왕 부터 시작된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계속 이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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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2. 조선[편집]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체결한 여타 '번국'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국가 역시 어디까지나 형식상으로만 중국의 신하였을 뿐이고, "사대에 반한다"는 명분으로 위화도 회군을 한 조선 태조 이성계조차도 개국 초창기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요동 정벌을 염두에 두었던데다, 원 간섭기 이후 폐지되었던 황제국의 제도인 묘호를 다시 도입하기도 했다.

사대관계는 단순한 상하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시대상황에 따라 여러 면모를 보여줬고 대부분의 시기에서는 결국 쌍방에 이익이 나는 쪽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대관계에서 나오는 이득은 조선에 유리하고 명에 불리한 적도 있었으며 조선의 실록이나 명사 조선전에서 알 수 있듯이 명나라의 경우 조선에서 보내는 조공이 부담되어 적당한 핑계를 대며 3년에 1번으로 줄이거나 횟수자체를 줄이라고 요구했고 조선 측에서는 오히려 1년에 4번으로 늘리자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명나라가 조공의 횟수를 줄이자고 한 배경에는 사여품이 부담이 되었거나 혹은 관무역에 의한 시장질서 교란을 우려해서라고 여겨진다.

조선시대에 중국 명나라 사신에 의한 수탈이 있었던 시기는 조선 초기와 광해군 시기였다. 조선 초기에는 외교관계가 잘 정립되어 있지 않아서 사신들이 조선에 각종 '선물'을 요구하였다. 이에 세종이 분노한 적도 있었다. 세종 중기부터 명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사신의 수탈이 없어지고,[4] 외교가 정상적으로 성립되었다.

이후 광해군 시기에 임란에 의한 이른바 재조지은에 의해서 조선이 외교적으로 명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명기 교수가 쓴 '광해군' 에 따르면 중국 사신들의 횡포와 수탈에 광해군과 조선 조정이 괴로워 하는 모습들이 잘 나타나 있다.

명나라 사신들의 은 징세는 광해군대에 들어와 절정에 달했다. 그 액수는 거의 10만냥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앞서 임해군이 왕위를 양보했다는 사실을 조사하고 광해군의 국왕 자격을 심사하겠다고 왔던 엄일괴와 만애민이 수만 냥의 은을 챙겨갔다고 이야기가 전해지자, 이후 조선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봉'이 되었다. 명나라 환관들 사이에는 '조선에 가서 한 밑천 잡자'라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1 2 3

또한 인조반정 직후 들어선 인조 정권도 취약한 정통성 탓에 명나라에 호구로 잡혀 엄청난 은을 명 사신과 명 조정에 바쳐야 했으며 병자호란에서 청한테 패하게 되어 청에 대한 사대가 정해지면서 조선은 청에 배상금과 조공 형식으로 많은 수탈에 시달렸다. 그러나 청이 명을 정복하고 나라가 안정화되자 조선이 바쳐야 할 조공의 양을 줄였주었고 이때부터 조선과 청은 공평한 조공 무역을 했다.


4.2. 일본[편집]


대륙에서 떨어진 일본 열도 역시 중국의 조공책봉 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다. 일례로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한왜노국왕이라는 옥새를 받아오기도 하였고, 나라 시대헤이안 시대에는 중국에 조공(견수사, 견당사)을 바치면서 신하를 자처했다. 당시 일본은 낙후된 항해술 때문에 중국에 조공 사절을 자력으로 보낼 수 없자 신라에 도움을 청하기도 할 정도로 이러한 사대에 적극적이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일본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명나라에 칭신하고 일본국왕에 책봉된 뒤 조공을 바친 사례도 있다. 이를 전문용어로 감합무역이라고 한다. 또 일본의 다이묘들 역시 중국과 조선에 칭신하고 무역을 위해 온갖 아양을 떤 사례 역시 많다.

센고쿠 시대에는 전쟁으로 내부가 혼란해지자 외교에 신경쓸 처지가 못 되었고, 센고쿠 시대 이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강화를 시도할 때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다.실록의 내용 그리고 에도 시대에는 조선이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청나라에 사대를 하자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오랑캐 국가이며 중화(中華) 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하지 않고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였으며, 명나라를 저버리고 청나라에 사대하는 조선을 비난하였다. 또한 에도 시대에는 쇄국정책을 폈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의 외교 및 교역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일본에 민족주의/국수주의적 사관이 퍼지면서 과거 중국에 사대를 한 인물들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인식은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인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다.


5. 오해[편집]


현재 중국에서는 "한국이 사대를 한 것은 한국이 중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며 한반도가 중국 영토라는 증거다."[5]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중국은 한반도 내정간섭을 정당화하는데, 일본에선 일본의 과거 한국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사대를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일본 지방 정권도 조선에게 사대를 한 적도 있고, 일본 또한 중국에게 조공을 바치고 사대를 한 적도 있다.

사실 사대는 단순히 작은 나라가 큰 나라의 속국이 되어서 충성의 뜻으로 조공을 바치는 게 아닌 약소국이 강대국에게 "야 너희 나라가 강대국이고 세계 중심이라는 것 인정할테니 대신 우리나라 침략하거나 내정간섭 하지마"식의 조건으로 자국의 특산물을 바치고 강대국도 조공을 받는 대신 막대한 사례품을 제공하여 대국의 체면을 지키고 군사적으론 서로간의 주권과 국경을 인정하면서 이웃한 주변국들이 중국을 침략을 하지 않고 국경을 안정화시키는 게 자국의 이익이니 이를 허락하면서 서로간의 영토분쟁이나 갈등을 최소화하고 서로간의 정당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형식적인 행사였다. 이는 지금까지도 중국의 주변국 외교전략의 축인 내정불간섭주의로 이어지고 있다.

그 예로 남북국시대에 해당하는 구당서 현종본기의 725년 태산 봉선의식 기사에서는 봉선의식을 축하하러 온 나라들을 '조회하러 온 외국', '당나라의 내신 번국', '추장' 3단계로 나눠 열거하고 있는데 여기서 신라, 말갈(아마도 발해), 일본은 조회하러 온 외국으로 소개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고구려백제는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에 이미 멸망한 상태였고 그 유민의 일부를 괴뢰국으로 부리고 있었는데 그에 해당하는 '고려 조선왕'과 '백제 대방왕'은 내신 번국왕으로 소개하고 있다. '내신 번국'은 당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당나라 내지에 사민되었거나 본거지를 잃고 당에 투항해 복속한 이들을 말한다. 이렇듯 형식상 상국 황제에게 책봉된 봉국의 왕이라 할지라도 단지 서열상 이름만 같을 뿐 '중국 국내 영토인 봉국의 '[6]과 '영토 밖의 외국에 해당하는 봉국 '은 엄연히 서로 달랐다.

또한 충성 의미로 바치는 조공도 개인의 사무역과 국경개방이 엄격히 통제된 당시로서는 예물이라는 형식으로 두 국가가 서로 자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물자교환과 지식교류를 확대하는, 동아시아의 봉건국가들의 외교방침이자 일종의 공무역이었다. 즉 약소국은 강대국의 속국이 되어 일방적으로 수탈당하는 것이 아니다.[7][8] 오히려 사대를 한 나라에게 막대한 사례품을 내려서 그들이 반중국 노선을 걷지 못하게 달래야 했다. 실제 몽골이 건국한 원은 주변국가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조공과 공녀,환관,노예 등 을 요구하고 수탈하며 왕의 정당한 계승도 방해하는 등 내정에도 간섭하면서 반원 감정이 강해졌으며, 급기야 홍건적으로 보이는 농민반란이 일어나자 주변국들이 반원노선을 채택하고 명나라를 지지하는 사태까지 이른다.[9]


6. 기타[편집]


대한민국 건국 이래의 한미관계에 대해 비판적인 인사들은 한미관계를 '사대' 혹은 '사대주의'라 비꼬기도 한다.

재밌게도 일본에도 비슷한 인식이 있는데, 일본에는 근대 혹은 패전 이후 사대의 대상이 미국으로 바뀌었다고 보기도 한다. 일본인 스스로도 총리가 취임하면 제일 먼저 미국을 방문하는 것을 참근교대라고 일컬을 정도인데... 미국에 한 번 참교육을 당한 바 있는 나라라 극우들 중에서도 이런 넋두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현대의 거의 대부분 나라들은 필요에 따라 외세에게 적절히 양보하거나 그들의 장점은 본받으려 하기도 하며, 이런 태도 자체를 잘못되었다고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지금 한국도 21세기 들어 중국이 한반도로 끼치는 영향이 커지는 와중에도 미국과 동맹을 공고히 하고 외국 군대인 주한미군을 주둔시켜 이를 군사적, 경제적[10] 전략 지렛대로 활용하기도 하며 '글로벌 스탠더드'를 추구하기 위해 국내의 법과 제도를 고치고 타국의 좋은 사례가 있으면 그것을 배워오려고 노력한다. 오늘날 이러한 모습을 토대로 하여 근대 이전 한반도 국가의 '사대주의'를 근대 이전 '세계화' 노력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한국 발전은 사대주의, 즉 글로벌 스탠더드 따른 덕분"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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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같이보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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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를 들어, 고대에 중국세력(낙랑군)이 들어왔던 평양지역과 다른 지역을 비교해 보면, 당시 한반도와 주변지역은 초가나 너와 지붕을 얹은 움집이나 귀틀집(통나무를 井자 모양으로 쌓아 만든 오두막), 혹은 고상식 가옥(원두막에 문과 벽을 단 모습이다.)에 살았고 심지어 마한의 경우 토실(땅굴을 파고 출입구 쪽에만 움집을 지어 비바람을 막은 집)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평양 지역은 번듯한 기와집을 짓고 살고 있었다. (..) 한국은 조선 후기나 되어서야 화폐경제가 형성되고 그것도 보조적인 수단이었지만 중국은 이미 기원전부터 화폐경제가 이룩되고 근대 이전 세계역사상 유일무일하게 지폐경제까지 생성된다.[2] 한 왕조가 기본적으로 수백년씩 유지됐던 한반도에 비해, 중국에서는 왕조 교체, 즉 쿠데타가 빈번하게 일어났다. 실제로도 중국 왕조들은 한반도의 왕조들보다 수명이 짧다. 이런 상황에서 왕조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정당성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3] 참고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호칭을 기록상 최초로 사용한 군주였다. 권지국사(權知國事) 또는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라는 호칭들을 자칭한 후대의 군주들은 전부 왕건의 사례를 따라서 그러한 호칭들을 사용한 것이다.[4] 황제의 명 이외의 사신들의 사사로운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명령이다.[5] 중국도 북방민족들인 흉노, 토번, 돌궐 등에게 사대를 하기도 했는데, 중국의 주장대로라면 중국 또한 몽골과 티베트 등의 식민지라는 논리로 연결된다. 물론 사대 관계를 종속 관계로 보는 관점도 많긴 하지만, 적어도 식민지나 영토의 개념과 동등하지는 않다. 실제로 명나라는 광해군의 세자 책봉, 인조의 국왕 책봉을 거부했고 이것이 어느 정도 정치적 영향력으로 작용하긴 했으나 광해군이 폐세자되는 일은 없었고 인조 정권이 곧바로 붕괴하지는 않았다.[6] 중국은 군주가 황제이며 이라는 개념은 왕자나 봉국 제후의 개념이다.[7] 물론 조공국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고 강대국이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는 현대 국제관계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다.[8] 거기다 천문학적인 비용과 자원 그리고 인력을 소비하는 전쟁보다는 무역적자가 더 싸게 먹힌다.[9] 조선 초 사례 보듯이 명나라도 막대한 조공을 요구하였으나 원나라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고려 역사를 보면 귀족들 까지도 딸들을 공녀로 안보내고자 했다가 원나라 사신에게 매를 맞는 등, 원은 주변국가 지배층한테도 반발을 살 정도로 수탈하였다. [10] 미군 주둔으로 국방비를 일부 절약하여 다른 분야를 투자, 발전시킬 수 있다. 이런 사례는 해외에서도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