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대 (문단 편집) === 일본 === 대륙에서 떨어진 [[일본]] 열도 역시 중국의 조공책봉 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다. 일례로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한왜노국왕이라는 옥새를 받아오기도 하였고, [[나라 시대]]나 [[헤이안 시대]]에는 중국에 조공([[견수사]], [[견당사]])을 바치면서 신하를 자처했다. 당시 일본은 낙후된 항해술 때문에 중국에 조공 사절을 자력으로 보낼 수 없자 신라에 도움을 청하기도 할 정도로 이러한 사대에 적극적이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일본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명나라]]에 칭신하고 일본국왕에 책봉된 뒤 조공을 바친 사례도 있다. 이를 전문용어로 감합무역이라고 한다. 또 일본의 다이묘들 역시 중국과 조선에 칭신하고 무역을 위해 온갖 아양을 떤 사례 역시 많다. [[센고쿠 시대]]에는 전쟁으로 내부가 혼란해지자 외교에 신경쓸 처지가 못 되었고, 센고쿠 시대 이후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강화를 시도할 때 명나라의 책봉을 받았다.[[http://sillok.history.go.kr/id/kna_12912007_005|실록의 내용]] 그리고 [[에도 시대]]에는 조선이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청나라에 사대를 하자 청나라는 여진족이 세운 오랑캐 국가이며 중화(中華) 국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하지 않고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하였으며, 명나라를 저버리고 청나라에 사대하는 조선을 비난하였다. 또한 에도 시대에는 쇄국정책을 폈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의 외교 및 교역에 매우 소극적이었다. [[메이지 시대]]에는 일본에 민족주의/국수주의적 사관이 퍼지면서 과거 중국에 사대를 한 인물들이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인식은 [[태평양 전쟁]] 패전 이후인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남아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