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대 (문단 편집) ==== 조선 ==== 중국과 조공-책봉관계를 체결한 여타 '번국'과 마찬가지로 한반도 국가 역시 어디까지나 형식상으로만 중국의 신하였을 뿐이고, "사대에 반한다"는 명분으로 [[위화도 회군]]을 한 조선 태조 [[이성계]]조차도 개국 초창기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자 [[요동 정벌]]을 염두에 두었던데다, 원 간섭기 이후 폐지되었던 황제국의 제도인 묘호를 다시 도입하기도 했다. 사대관계는 단순한 상하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시대상황에 따라 여러 면모를 보여줬고 대부분의 시기에서는 결국 쌍방에 이익이 나는 쪽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사대관계에서 나오는 이득은 조선에 유리하고 명에 불리한 적도 있었으며 조선의 실록이나 [[http://db.history.go.kr/item/level.do?levelId=jo_023r_0010_0010_0420|명사 조선전]]에서 알 수 있듯이 명나라의 경우 조선에서 보내는 조공이 부담되어 적당한 핑계를 대며 3년에 1번으로 줄이거나 횟수자체를 줄이라고 요구했고 조선 측에서는 오히려 1년에 4번으로 늘리자고 적극적으로 나섰다. 명나라가 조공의 횟수를 줄이자고 한 배경에는 사여품이 부담이 되었거나 혹은 관무역에 의한 시장질서 교란을 우려해서라고 여겨진다. 조선시대에 중국 명나라 사신에 의한 수탈이 있었던 시기는 조선 초기와 광해군 시기였다. 조선 초기에는 외교관계가 잘 정립되어 있지 않아서 사신들이 조선에 각종 '선물'을 요구하였다. 이에 세종이 분노한 적도 있었다. 세종 중기부터 명나라 황제의 명에 따라 사신의 수탈이 없어지고,[* 황제의 명 이외의 사신들의 사사로운 요구를 들어주지 말라는 명령이다.] 외교가 정상적으로 성립되었다. 이후 광해군 시기에 임란에 의한 이른바 [[재조지은]]에 의해서 조선이 외교적으로 명에게 밀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명기 교수가 쓴 '광해군' 에 따르면 중국 사신들의 횡포와 수탈에 광해군과 조선 조정이 괴로워 하는 모습들이 잘 나타나 있다. 명나라 사신들의 은 징세는 광해군대에 들어와 절정에 달했다. 그 액수는 거의 10만냥에 달하는 엄청난 것이었다. 앞서 임해군이 왕위를 양보했다는 사실을 조사하고 광해군의 국왕 자격을 심사하겠다고 왔던 엄일괴와 만애민이 수만 냥의 은을 챙겨갔다고 이야기가 전해지자, 이후 조선은 명나라 사신들에게 '봉'이 되었다. 명나라 환관들 사이에는 '조선에 가서 한 밑천 잡자'라는 풍조가 생겨났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http://sillok.history.go.kr/id/koa_10207001_001|1]] [[http://sillok.history.go.kr/id/kob_10207011_004|2]] [[http://sillok.history.go.kr/id/kob_11305001_001|3]] 또한 인조반정 직후 들어선 인조 정권도 취약한 정통성 탓에 명나라에 호구로 잡혀 엄청난 은을 명 사신과 명 조정에 바쳐야 했으며 병자호란에서 청한테 패하게 되어 청에 대한 사대가 정해지면서 조선은 청에 배상금과 조공 형식으로 많은 수탈에 시달렸다. 그러나 청이 명을 정복하고 나라가 안정화되자 조선이 바쳐야 할 조공의 양을 줄였주었고 이때부터 조선과 청은 공평한 조공 무역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