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대 (문단 편집) ==== 고려 ==== >왕건이 조공하니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 >장흥(長興) 연간에 '''권지국사(權知國事)''' 왕건(王建, 태조)이 고씨(高氏)의 왕위(王位)를 잇고는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왕건을 현토주도독(玄菟州都督)으로 삼고 대의군사(大義軍使)로 임명하고,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 > - [[http://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levelId=cnkb_030r_0950_0020|송사 > 『송사』권487 열전246 > 왕건이 조공하니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 >갑인일에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 왕건(王建, 태조)을 검교태보(檢校太保)로 삼고 고려국왕(高麗國王)으로 책봉하였다. >----- > - [[http://db.history.go.kr/KOREA/item/compareViewer.do?levelId=cnkb_010r_0100_0030|구오대사 > 『구오대사』권43 당서(唐書)19 명종(明宗)9 >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다]] [[고려]]는 처음부터 [[송나라]]에 사대하였다. 대표적으로 고려의 건국자였던 [[태조(고려)|태조 왕건]]은 송나라와 후당이 정식으로 고려국왕으로 책봉해주기 전까지 '''권지국사(權知國事)''' 또는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만을 자처하였고 왕이라고 스스로 호칭하지 못했을 정도였다. 여기서 ‘권(權)’은 임시라는 뜻이고 ‘지(知)’는 맡는다는 뜻이므로, '''권지국사(權知國事)'''는 "아직 책봉을 받지 못한 기간 동안에 임시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린다"라는 뜻을 가진 칭호로서, '''권서국사(權署國事)'''와도 사실상 같은 의미였다. 그렇게 [[고려]]는 [[태조(고려)|태조 왕건]]의 왕조 창건 이후 왕이 즉위하면 중국에 이를 알리어 승인을 받아야만 왕이라고 칭할 수 있었고 이후 이러한 전통은 후대의 고려왕들에게까지 일종의 관례로서 계속 이어지게 되었다.[* 참고로 고려 [[태조(고려)|태조 왕건(王建)]]은 '''권지고려국왕사(權知高麗國王事)'''라는 호칭을 기록상 최초로 사용한 군주였다. '''권지국사(權知國事)''' 또는 '''권지고려국사(權知高麗國事)'''라는 호칭들을 자칭한 후대의 군주들은 전부 왕건의 사례를 따라서 그러한 호칭들을 사용한 것이다.] [[광종(고려)|광종]] 또한 잠시나마 고유 연호를 사용하면서 잠시 [[칭제건원]]을 하였지만 이후 [[송나라]]와 [[거란]]이 격렬하게 항의하자 결국 뜻을 거둔채 칭제건원을 취소하였고 송나라를 천자국으로 인정하고 송의 연호인 '건덕'만을 계속 사용하였으며 [[성종(고려)|성종]]은 994년 6월, 송나라에 '고려는 진심으로는 송을 따르고 있으며 거란을 증오한다'는 국서를 보냈을 정도였다. 단순히 외교적 유불리 때문뿐만 아니라 성종은 [[중빠]]로서 유교의 사상을 따르고 중국의 제도를 들여오길 좋아했다. 실제로 성종은 원구단을 설치하고 3성 6부제를 도입한 장본인으로 알려져있지만 정작 '조서(詔書)'를 '교서(敎書)'로 격하시키고 《예기》에 입각하여 천자가 아닌 제후의 격식에 맞춰 태묘를 7묘가 아닌 5묘로 정비한 인물이었다. 그 뒤로는 [[여요전쟁]] 이후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하고 [[요나라]]에 사대하였으나 송나라에 계속 사대하려했고 이것이 거란과의 추가적인 전쟁의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이후 [[금나라]]가 강해지자 금나라에게 사대하였는데 여진족이 원래 고려에 사대했던 관계라 위상이 역전된것이었다. > 다루가치의 지적에 따라 각종 용어를 격하하다 > > 甲申 達魯花赤詰之曰, “稱宣旨·稱朕·稱赦, 何僭也?” 王使僉議中贊金方慶·左承宣朴恒, 解之曰, “非敢僭也, 但循祖宗相傳之舊耳, 敢不改焉.” 於是, 改宣旨曰王旨, 朕曰孤, 赦曰宥, 奏曰呈. > > 갑신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이 [[충렬왕|왕]]을 [[갑질|비난]]하면서 말하기를, “선지(宣旨)라 칭하고, 짐(朕)이라 칭하고, 사(赦)라 칭하니 어찌 이렇게 참람합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첨의중찬(僉議中贊) [[김방경]](金方慶)과 좌승선(左承宣) 박항(朴恒)을 시켜 해명하기를, “감히 참람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조상 때부터 전해오는 옛 관례를 따랐을 뿐입니다. 감히 고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선지를 왕지(王旨)로, 짐을 고(孤)로, 사를 유(宥)로, 주(奏)를 정(呈)으로 고쳤다.''' >----- > -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jsessionid=D98F2FC8C2D2FEF2924D1606ECA2F655?levelId=kr_028r_0040_0030_0090|고려사 권제28 충렬왕(忠烈王) 2년(1276년) 3월 19일(음) 갑신(甲申)년]] [[여몽전쟁]]에서 [[원종(고려)|원종]]이 [[몽골제국]]의 [[쿠빌라이 칸]]에게 항복하여 [[원나라]]에 입조하였고 이때부터 [[원간섭기]]가 시작된다. 그렇게 [[충렬왕]] 때부터 [[다루가치]]의 반발로 인해 대다수 제도가 크게 격하되어 완전한 제후국 제도가 정착되게 되면서 원에게 완전히 사대하는 나라가 되게 된다. > 《明太祖御製文集(명태조어제문집)》 > > 즉위 초에 옛 철왕(哲王)의 도(道)를 본받아 사이(四夷)의 추장에게 신속히 통보하여 중국에 군주가 있음을 알게 하였다. 이때에는 통호하려고 한 것에 불과했다. 고려국왕 [[공민왕|왕전(王顓)]]이 곧바로 칭신입공한 것은 의외였다. >----- > - 《明太祖御製文集》권6, 〈諭中書却高麗請諡〉. 나중에 [[원나라]]가 쇠퇴하자 [[공민왕]]은 몽골과의 칭신관계를 끊어버렸고 곧 있어서 중원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른 [[주원장]]의 [[명나라]]에 칭신입공하면서 새로운 사대관계를 맺게된다. 하지만 얼마안가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우자 명나라는 이성계를 왕으로 정식으로 책봉하지 않는다. 진통 끝에 개국세력은 명나라에게 [[기자조선]]을 잇는다는 의미로 [[조선]]이란 국명을 윤허받고 조선으로 국명을 바꾸면서 [[공민왕]] 부터 시작된 [[명나라]]와의 사대관계를 계속 이어가게 된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사대주의, version=413, paragraph=3.1.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