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냥꾼 (문단 편집) == 인류 역사 속에서 == [[농부]]보다 먼저 등장한 인류 최초의 직업.[* 인류의 역사에서 농업이 시작된지 시기는 대략 기원전 1만년으로,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았다. 그 이전 수백만 년 동안 인류는 오직 [[수렵채집인|수렵과 채집]]으로만 연명했다. 일반적으로 문명의 시작을 [[농업혁명]]으로 보기 때문에, 사냥꾼과 어부, 임업보다 먼저 등장한 직업은 없다. 그 밖에 오래된 직업으로 손꼽히는 직업은 자기가 속한 부족을 지키고 전쟁에서 타 부족과의 전투에 나가는 [[군인]]이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농사]]를 짓기 전까지 [[고기]]류, 즉 '''[[생명]]과 직결되는 [[식량]]'''을 구하는 최초의 직업이었다. 자신보다 훨씬 크고 강한 동물을 제압 및 제거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엄청난 체력과 끈기, 사냥감에 대한 충분한 정보, 극한의 순발력이 요구되는 극도의 지식과 숙련이 요구되는 전문직이었다.[* 수렵인들은 물론 지금도 매우 전문적이다. 총만 있다고 해서 누구나 사냥꾼이 될 수 있는 게 절대 아니다. 사냥 동물의 종류에 따라 추적 방식이나 필요 도구 등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 매사냥 등 전통 방식으로 사냥을 하는 사람들은 아예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아무리 전문적이라 하더라도 사냥을 실패하면 식량이 바로 모자라는 상황에 도달하기 때문에 사냥꾼들은 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왔고 이 와중에 개를 가축으로 들임으로써 추적 성공률을 높인다거나 집단 사냥을 통해서 집단 운용 기술을 얻는다거나 하는 방식으로 사회의 진화에도 영향을 주었다. 농사법의 전래 이후 비중이 낮아졌다곤 하지만 원래부터 [[산]]이나 [[레인저|숲지기]] 등을 맡아 왔기에 매일 험한 지형을 타고 다닌 사람들인 데다가 [[활]]과 [[함정]]을 다루고, 추적에도 능숙하기에 [[전쟁|전시]]에는 진짜 '''인간 사냥꾼'''이 되어 정찰과 전투 양면에서 매우 우수한 전력이 된다.[* 물론 중장보병보다는 경보병이나 기마민족이라면 경기병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애당초 산이나 험한 지형을 타는 게 주특기인 사람들인데, 이런 능력 살리려면 당연히 경무장이 적합하다.][* [[시모 해위해]]도 전쟁 이전에는 본업이 농부이자 사냥꾼이었다.] 이 점은 [[총]]이 사냥꾼들에게 일반화된 뒤로는 더 심해진다. 일반인들이 접하기 힘든 총을 백날 들고 다니면서 사냥하는 덕에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정확하게 사격할 수 있는 뛰어난 전력이 되었던 것이다.[* 한 번에 한 발밖에 쏠 수 없는 전장식 머스킷이 주 전력이었던 시대에 곰 같은 맹수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한 방에 죽이거나, 두 방째에는 반드시 죽여야 했고, 두 방째를 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장전이 가능해야 했으므로 이들은 자연히 '빠르고 정확하게' 속사해댈 수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사냥을 하면서 해당 지역의 곳곳을 돌아다녀서 지형지물에 대한 전문가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한반도]]에서도 예외는 아니라 [[포수(동음이의어)|포수]]는 전시에 징집되며 우수한 병사로 평가되었고, 조선시대엔 이러한 병사들을 모아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조총으로 병장기를 바꾸는 와중에 모은 조총부대가 유명했으며 [[나선정벌]] 당시 형편없는 명중률이 상식이었던 당시 총기를 사용해 상식을 뛰어넘는 명중률로 큰 전과를 세운 적이 있다.[* 그 당시 화력은 강하지만 명중률이 낮은 총기의 단점을 일반 병사들은 [[화망]], 즉 물량으로 커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평소 조선에서 [[호랑이]] 등 맹수들을 상대하는 포수들의 경우, 한 발 빗나가는 것이 곧 사망과 직결되기 때문에 높은 명중률이 필수적이었다.] 이 점이 유용했는지 개화기 때도 [[흥선 대원군]]이 포수를 모아서 정예 부대를 만든 기록도 있다. 더불어 척박한 환경 탓에 평안도, 함경도 등의 북방지역과 경상도, 강원도 등의 산간지역은 옛부터 사냥을 생업으로 삼는 이들이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조선왕조 500년 내내 특히 북방 병사들은 항상 조선 최정예로 취급되었다. 조선과 이웃한 여진족 또한 수렵이 생존에 있어서 필수이기도 했다. 여진족의 그러한 생활양식 자체가 일종의 군사훈련이기에 중국이나 한반도의 왕조들이 그들의 전투력을 두려워했다. 근현대에 와서도 이런 부분이 남아있는데 [[안중근]]이 구월산에서 사냥꾼 일을 하기도 했었다. [[김구]]도 안중근을 기억할 때 구월산의 총 잘 쏘는 친구로 기억했다.[* '진사는 아들이 셋 있었는데 맏아들은 중근으로 당년 열여섯에 상투를 틀었고 자색 명주 수건으로 머리를 동이고서 돔방총을 메고 노인당과 신상동으로 날마다 사냥을 다녔다. 중근은 영기가 넘치고 여러 군인들 중에서도 '''사격술이 제일'''로, 나는 새 달리는 짐승을 '''백발백중'''으로 맞히는 재주가 있었다. 태건 씨와 숙질이 늘 동행했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노루]]와 [[고라니]] 등을 여러 마리 잡아와 그것으로 군사들을 위로하기도 하였다.' ─ 백범일지]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 안태훈은 [[동학농민전쟁|동학전쟁]] 때 동네 포수들과 장정들을 모아서 동학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일제의 조선 침략이 가속화되자 일어난 [[의병]]들 중에서도 포수 집단은 '''최정예''' 취급을 받았고[* 책 보는 게 직업이던 유생들. 농사짓는 게 직업이던 농부들. '''총 쏘는 게 직업'''이던 포수들. 당연히 포수 집단의 전투력은 타 출신 의병에 비해 [[넘사벽]]일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도 수많은 공적을 세웠다. 대표적인 예가 [[홍범도]]. 그 대신 영주나 나라에서는 사냥꾼의 수를 제한하기도 했다. 사냥꾼이 너무 많아지면 잡을 동물이 다 죽어버리는데, 이는 생태계도 생태계지만 유흥거리로 사냥을 하는 높으신 분들이 즐길 거리가 없어진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래서 사냥꾼들은 소수만 존재했고 그 외 나머지들은 본격적인 사냥보다는 토끼나 쥐, 족제비 같이 작은 유해조수들을 덫 등으로 사냥했다. 이런 동물들은 개체수도 많고 농가에 폐를 끼쳐서 따로 금지하는 일은 없었다. 미 육군의 유명한 [[제75레인저연대|레인저]] 또한 [[미국 독립전쟁]] 당시의 유명한 사냥꾼들이 주축이 된 "로저스 레인저"에서 유래했다. 숙련된 포수는 [[멧돼지]] 정도야 우습게 잡는다. 멧돼지 출몰로 골치 아픈 시골에서는 사냥꾼(포수)을 고용해서 멧돼지들을 잡는다. 멧돼지는 영리하기 때문에 함정을 설치해도 잘 안 걸려든다. 이러한 강력함 때문에 서구에서 엘리트 총병들은 '사냥꾼'이라는 명사로 호칭되곤 했다. 독일에서 정예 부대에 주로 붙이는 [[예거]]도 사냥꾼이라는 말이고, [[특수부대]]라는 뜻의 영단어 [[코만도|commando]]는 19세기 말 영국과 보어인의 전쟁에서 보어군의 소부대를 뜻하는 단어였다. 보어군은 국민 대부분이 사냥에 익숙했고, 이들의 사격 실력에 힘입은 [[저격]]과 소규모 부대의 매복 기습은 밀집대형을 하고 다니는 영국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주었다. 다만 이 쪽은 현대전의 전술을 제대로 보여준 스승으로서 대우받는 단어.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활동하던 대부분의 [[저격수]]는 '''사냥꾼 출신'''이었다. 애초에 '저격수'를 뜻하는 영어 단어 '스나이퍼'(Sniper) 자체가 원래 '스나이프(Snipe)라는 자그마한 도요새도 쏴서 잡는 사냥꾼'이라서 '명사수'라는 말로 쓰인 것이다. 미국인들의 사냥[[덕후]] 기질은 미군의 보병교리와 무기개발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원체 총기에 익숙한 입영자원이 많다 보니 개별 병력의 전투력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교리가 정립되었고, 자연스럽게 [[M1 개런드]] 같은 반자동소총이 제식으로 채택되어 전면적으로 보급될 수 있었던 것. 반면 징집병들에게 이런 전투력을 기대하기 힘들었던 독일군은 [[MG42]]로 대표되는 기관총 전력에 보병분대의 전투력을 몰빵하는 교리를 채택해야 했다. 현재의 사냥꾼은 [[수렵면허]] 및 [[총포소지허가증]]은 기본에 허가받지 않은 장소에서 또는 기간에 사냥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불법 사냥하는 사냥꾼은 [[밀렵꾼]]이 되기도 한다. 현재는 이런 범죄자들에 대한 법안이 미흡한 상황이고, 탄환규제도 심각해 미국은 아예 우스울 지경으로 총기규제부터가 아예 빡빡하단 소리를 듣는 일본보다도 엽사들에 대한 총기 규제는 한국은 '''너무하기 그지없다는 소리를 타국 엽사들이 나서서 비판을 거들 정도'''로 규제안이 이상하다. 과거에는 생태학자들도 노련한 사냥꾼이 많았다. 어쨌거나 표본이 필요하고, 심지어는 산채로 포획하는 것도 필요하다. 동물의 습성을 다 꿰고 있으니 다른 기술만 있다면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 지금도 동물보호를 위해서 마취총을 들고 다니며 사냥하는 생태학자들이 많다. 또 반대로 전문 사냥꾼 중 생태학자나 생태 보호 운동가로 활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동물이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존재하는지 잘 알아야 하는게 사냥꾼이므로, 그 과정에서 생태학 자체를 연구하여 생태 보호 운동을 하는 계기가 되거나, 사냥을 하다보니 누구보다도 동물 개체수가 줄어드는것이 체감되기에 위험하다는 인식을 가져 환경보호 운도을 하는 것. 아래 항목에서 언급하는 [[짐 코벳]]이 이런 유형이다. 또한 말년까지 사냥꾼으로 유명했던 미국의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도 생태보호 운동가였다. 1930년대 초반, [[스웨덴]]의 생태학자 [[http://cfile3.uf.tistory.com/image/205EC7174BFFDB8E628848|스텐 베리만]]이 함경도에서부터 [[제주도]]까지 긁고 내려오면서 조선의 생태조사를 하기 위해서 많은 동물들을 사냥했던 일화가 있다. 어느 정도냐면, 하루에 [[꿩]]을 120마리 정도 잡아내고 멧돼지는 150kg 미만은 멧돼지 취급도 안 했다는 전설이 있다. 다만 그조차도 백두산 [[호랑이]]를 만나진 못했다고 한다. 한 3번인가 시도해봤지만 다 실패했다. 혹시라도 웹에서 옛 사진 중에 콧수염 있는 외국 사냥꾼이 한국 비슷한 곳에서 동물 잡고 포즈 취하고 있는 사진을 본다면 일단 베리만이라고 생각해도 좋다. [[https://www.cha.go.kr/cop/bbs/selectBoardArticle.do?nttId=60102&bbsId=BBSMSTR_1008&pageUnit=10&searchtitle=title&searchcont=&searchkey=&searchwriter=&searchWrd=&searchUseYn=&searchCnd=&ctgryLrcls=&ctgryMdcls=&ctgrySmcls=&ntcStartDt=&ntcEndDt=&mn=NS_01_09_01|링크]], [[https://www.yna.co.kr/view/AKR20180425163800371|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