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비블로스 (문단 편집) == 역사 == 기원전 8천년부터 거주지가 형성된 비블로스는 고대 이집트의 교역 도시로 역사에 등장한다. 기원전 1350년의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립 핫다와 그 후계자 일리 라피흐가 그 군주로 거론된다. 기원전 11세기 이집트 제국이 붕괴하자 비블로스는 주변의 [[시돈]], [[티레]]와 함께 페니키아 연맹의 핵심 도시가 되었다. 그 무렵 비블로스에서는 페니키아 알파벳이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가나안의 전쟁신 레셰프에게 봉헌된 오벨리스크 신전이 지어졌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기에 이미 유적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만 그후 이집트와의 교역이 인근 티레와 시돈에게 집중되며 비블로스는 그 두 도시들의 명성에 뒤쳐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기원전 738년, 비블로스의 왕 시빗티바알은 새로운 패권국인 아시리아의 티글라스 필레세르 3세에게 조공하였다.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센나케리브가 페니키아를 전부 정복했을 당시 국왕은 우루밀키였고 밀키아사프와 예후멜레크는 각각 에사르하돈, 아슈르바니팔 등에게 복속하였다. 아케메네스 제국 시기에 비블로스는 시돈, 티레, 아르와드와 함께 4개 도시로 구성된 페니키아 번국들 중 하나로 자치를 누렸다. 기원전 332년 도시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되었고 헬레니즘 양식의 동전이 주조되었다. 지중해 교역의 활성화와 함께 비블로스는 재차 번영하였고, 레셰프 신전은 재건되었다. 그외에 이 도시는 시돈, 티레와 함께 아도니스 신앙의 중심이었고 3세기에는 로마 극장이 세워졌다. 그 무렵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비블로스는 주교령이 되었고 발전하였다. 7세기 [[이슬람 정복]] 시에 비블로스는 637년 점령되었다. 한편 사산 제국이 멸망하며 페르시아인들이 비블로스로 이주해왔다는 설도 있으나 신빙성이 낮다. 이슬람 정복 후 동로마와의 연이은 해상 충돌로 범지중해 교역이 단절되며 아랍어로는 주바일로 불리게 된 비블로스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