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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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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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비블로스
Byblos
국가·위치
레바논 마운트레바논 주, 주베일 시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4년
등재기준
(iii),[1] (iv),[2] (vi)[3]
아랍어: جبيل (표준 아랍어: Jubayl/레바논 아랍어: Jbeil)
페니키아어: 𐤂𐤁𐤋 (Gebal)
히브리어 : גבל (Geval)
그리스어: Βύβλος (Byblos)
라틴어 : Byblus
영어: Byblos / Jbail
1. 개요
2. 역사
2.1. 중세 십자군 전쟁기



1. 개요[편집]


레바논 서북 해안의 유서깊은 도시. 수도인 베이루트에서는 북쪽으로 42 km 떨어져 있다. 현재 인구는 4만 명이고 광역권까지 합하면 10만 명이다. 비블로스는 그리스어로 '파피루스'라는 뜻으로, 이집트의 파피루스를 레바논 특제 백향목을 팔고 사들여 지중해와 메소포타미아에 중개무역으로 팔았다고 한다. 이 파피루스로 두루마리를 만들었는데 이 두루마리를 '비블로스'라 불렀다. 성경을 가리키는 영어단어 '바이블'도 비블로스에서 유래했다.

인류 역사에서도 오래된 도시이다. 무려 기원전 8000년경부터 도시가 형성되었는데, 기원전 5000년 이후로 중단 없이 지속적으로 사람이 거주했다. 그래서 청동기 시대의 신전과 페르시아 시대의 성벽, 로마의 가도, 동로마 성당, 십자군의 요새와 오스만 모스크(마스지드) 등 다양한 유적이 한 도시에 공존하는 이색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지붕 없는 박물관이다.

서양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대 페니키아의 군주인 아히람의 석관에 새겨진 비문에서 세계 최고(最古)의 알파벳이 확인되기도 하여 언어 학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도시이다. 성경에서는 게발(Gebal)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2016년 아랍 관광 수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2. 역사[편집]


기원전 8천년부터 거주지가 형성된 비블로스는 고대 이집트의 교역 도시로 역사에 등장한다. 기원전 1350년의 아마르나 서신에서는 립 핫다와 그 후계자 일리 라피흐가 그 군주로 거론된다. 기원전 11세기 이집트 제국이 붕괴하자 비블로스는 주변의 시돈, 티레와 함께 페니키아 연맹의 핵심 도시가 되었다. 그 무렵 비블로스에서는 페니키아 알파벳이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가나안의 전쟁신 레셰프에게 봉헌된 오벨리스크 신전이 지어졌다.[4] 다만 그후 이집트와의 교역이 인근 티레와 시돈에게 집중되며 비블로스는 그 두 도시들의 명성에 뒤쳐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기원전 738년, 비블로스의 왕 시빗티바알은 새로운 패권국인 아시리아의 티글라스 필레세르 3세에게 조공하였다. 기원전 701년 아시리아의 센나케리브가 페니키아를 전부 정복했을 당시 국왕은 우루밀키였고 밀키아사프와 예후멜레크는 각각 에사르하돈, 아슈르바니팔 등에게 복속하였다.

아케메네스 제국 시기에 비블로스는 시돈, 티레, 아르와드와 함께 4개 도시로 구성된 페니키아 번국들 중 하나로 자치를 누렸다. 기원전 332년 도시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정복되었고 헬레니즘 양식의 동전이 주조되었다. 지중해 교역의 활성화와 함께 비블로스는 재차 번영하였고, 레셰프 신전은 재건되었다. 그외에 이 도시는 시돈, 티레와 함께 아도니스 신앙의 중심이었고 3세기에는 로마 극장이 세워졌다. 그 무렵 기독교의 확산과 함께 비블로스는 주교령이 되었고 발전하였다. 7세기 이슬람 정복 시에 비블로스는 637년 점령되었다. 한편 사산 제국이 멸망하며 페르시아인들이 비블로스로 이주해왔다는 설도 있으나 신빙성이 낮다. 이슬람 정복 후 동로마와의 연이은 해상 충돌로 범지중해 교역이 단절되며 아랍어로는 주바일로 불리게 된 비블로스는 쇠퇴의 길을 걸었다.


2.1. 중세 십자군 전쟁기[편집]


1103년 가을, 비불로스는 1차 십자군의 레몽 드 생 질에게 점령되었다. 이후 세워진 트리폴리 백국의 일원이 된 비블로스는 기블렛, 기벨레트 등으로 불리며 제노바 출신의 엠브리아고 가문의 영지로 200년 동안 유지되었다. 이때 이탈리아 등지와의 지중해 교역이 부활하며 도시는 다시 번영하였다. 1170년 대지진으로 성벽의 붕괴를 겪은 도시는 하틴 전투 직후 그 포로로 잡힌 영주 위그 3세의 석방을 대가로 1187년(혹은 1188년) 8월 4일 항복하였다. 이후 3차 십자군의 침공이 임박한 1190년에 살라흐 앗 딘은 도시의 성벽을 허물었다. 리처드 1세의 활약에도 수복되지 못했던 비블로스는 1197년 위그의 과부 에티에네트가 쿠르드인 수비대장을 사적으로 불러내 매수하는 방식으로 다시 십자군령이 되었고 성벽이 재건되었다. 다만 에티에네트는 수복 직후 사망하였고 그녀와 위그의 아들인 귀도 1세가 계승하였다. 1222년 다마스쿠스의 아미르 알 무아잠이 도시를 공격하여 귀도 1세로부터 휴전을 얻어내었다.

귀도 1세의 후계자 기 1세는 시돈의 그라니에 가문과 함께 신흥 이벨린 가문에 맞서 기벨린, 즉 제국파를 지지하였다. 따라서 1228년 프리드리히 2세가 키프로스에 당도하자 기는 그와 합류하였다. 그후 비블로스 영주 베르트랑도는 트리폴리-안티오크의 보에몽 6세에 맞섰다. 1258년 가을 기는 바트룬 영주 장과 함께 트리폴리를 포위하였고 보에몽은 부상을 입었다. 다만 템플 기사단의 개입으로 반군은 내륙으로 철수하였고 베르트랑도가 과수원에서 민병대의 매복에 전사하자 반군은 비블로스로 철수하였다, 1266년 비블로스는 맘루크 술탄 바이바르스에게 복속하였으며 그 대가로 도시는 다른 십자군 도시들과 달리 14세기 초까지 유지될 수 있었다. 보에몽 7세 때에도 갈등은 지속되었다고도 한다.

1277년 비블로스의 기 2세는 동생 지오반니와 타르수스 상속녀와의 결혼 약속을 보에몽이 파기하자 그녀를 납치하여 결혼을 강행했다. 이후 템플 기사단의 도움을 얻은 기 2세는 보에몽의 비블로스 공격을 격퇴하였다. 이때 보에몽의 사촌이자 기 2세의 처남 발리앙이 전사하자 전자의 요청으로 현상유지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이듬해 휴전이 끝날 즈음 보에몽은 재차 비블로스를 공격했으나 격퇴하였고 템플 기사단과 보에몽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구호기사단의 중재로 재차 현상 유지의 휴전이 체결되었다. 1282년 1월, 기 2세는 트리폴리에 잠입해 반란을 시도하였는데 템플 기사단이 호응하지 않자 동생 및 사촌들과 함께 구호기사단 지부의 성탑에 농성하였다. 몇시간 후 그는 목숨 보장 대가로 항복하였다.

그러나 보에몽은 일행을 보트룬 부근 네핀 성채에 감금해 굶겨죽였고 제노바 혹은 티레에서 반응하기 전에 비블로스 영지를 직할령으로 몰수하였다. 이로써 도시는 트리폴리 백작의 직속령이 되었다. 한편 기 2세의 살아남은 동생 바르톨로메오는 1287년 보에몽이 사망한 후 설립된 트리폴리 코뮌의 대표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289년 기 2세의 아들 피에르가 비블로스 영주가 되며 엠브리아고 가문의 지배가 복원되었다. 같은해 4월 트리폴리가 맘루크 술탄 칼라운에게 함락되자 5월 초 피에르는 술탄에게 연공을 대가로 복속, 타르투스와 함께 유지될 수 있었다.[5]

1291년 아크레 함락 후로도 맘루크 조의 속령으로 유지되던 비블로스는 1302년 2월 일 칸국의 시리아 침공 시에 영주 장 드 엠브리아고가 그에 합류한 것에 분노한 술탄 앗 나시르 무함마드에 의해 맘루크령으로 흡수되었다. 다만 별 저항 없이 항복한 덕에 도시는 트리폴리, 아크레 등과 달리 약탈과 파괴를 면할 수 있었고 파괴된 성벽도 곧 복구되었다. 1369년 키프로스의 피에르 1세의 십자군 함대가 파마구스타에서 발진하여 도시를 습격하였으나 시타델의 수비대가 격퇴해내었다. 1516년부터 1918년까지 오스만 지배와 1920~1943년의 프랑스 위임통치를 거친 도시는 레바논 공화국령이 되어 현재에 이른다. 2006년 인근 발전소에서 유출된 기름이 항구를 덮치는 사고가 있었으나 곧 정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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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비블로스는 페니키아 문명의 시작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2] 비블로스는 지중해 세계 도시 건설의 주된 예를 보여 준다.[3] 비블로스는 아히람·예히밀크(Yehimilk)·엘리바알(Elibaal)·샤파트바알(Shaphatbaal)의 비문에 새겨진 페니키아의 알파벳(오늘날 사용하고 있는)의 역사 및 전파와 분명하고 직접적인 관련을 갖고 있다.[4]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기에 이미 유적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5] 인근 보트룬과 네핀은 점령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