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벵거볼 (문단 편집) == 무패 우승의 신화? == 엄연히 '벵거볼'이 무수한 축구 전술들과 경기 스타일 중에서도 콕 집어서 아이콘화된 결정적인 이유는 명확한 특징성을 내포했기 때문이다. 아르센 벵거는 22년간 아스날에 머물며 다양한 포메이션과 선수들을 기용하면서도 늘 한결같은 전술적 기조를 이루었는데, 바로 유기적이고 빠른 공격 축구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기술적인 능력뿐 아니라 체력과 피지컬적인 부분에서 매우 높은 수준이 요구되었다. 빠르게 쉴 새 없이 뛰어야 하며, 긴 거리의 패스가 아닌 여러 번의 짧은 패스를 통해서 수비를 허물어야 하기 때문에 지구력과 민첩함이 요구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전환' 때문이었다. [[UEFA 유로 2004]]를 전후로 축구계에서 '공·수 전환', 즉 ''''트랜지션''''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한때 이것을 가장 잘 했던 클럽들이 유럽 무대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FC 바르셀로나]]에 [[펩 과르디올라]]가 부임하기 이전까진 통칭 ''''빅 4''''라 불렸던 [[맨유]], [[아스날]], [[첼시]], [[리버풀]] 등이 그러하였다. 당시 타 리그와 프리미어리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환의 속도'였는데, 영국 리그에선 전통이었던 ''''쉴 새 없는 공격과 수비의 전환''''이 때마침 한시적인 패러다임으로 떠오르면서, 타 리그의 빅 클럽들은 모두 유럽 대항전 등지에서 프리미어리그의 '빅 4'에게 한동안 고전하였다. 아스날 역시 그간의 유럽 대회 설움을 뿌리치고 결승까지 진출했던 2005-2006 챔피언스리그에선, 리그에서의 부진과 다르게 해외 유수의 명문팀들을 상대로 수준 높은 경기력과 결과를 모두 챙기면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2008년에는 유럽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디펜딩 챔피언인 [[AC 밀란]]을 상대로 당시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산 시로 원정 승리 및 홈 앤 어웨이 무패를 기록하며 8강까지 진출하였다. 2009년에도 리그에서의 부진과는 다르게 유럽 무대에서는 선전하며 4강까지 진출했다. 그 시기 유럽 무대에서의 아스날을 막아선 팀들은 모두 공교롭게도 같은 프리미어리그 소속팀들인 [[리버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이었다. 리그에서 아스날이 '빅 4' 끝자락에 머물며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것과 엮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르센 벵거의 22년간 재임 역사에 있어서 바로 이 시기의 아스날이 유럽 무대에서 가장 크게 성공하고 경쟁력을 인정받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벵거볼'이 다른 유수의 축구 전술과는 차별화되었고 아이콘화된 지점이 여기에 있다. '트랜지션' 상태에서 경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무척 독특했는데, 대부분의 팀들은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 시에 그저 빠르게 최단 거리로 스트라이커를 향해 롱 패스를 하거나, 주로 공을 운반하던 사이드 하프의 측면 돌파를 통해 상대 골문까지 도달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벵거의 부임 이후 아스날은 이 전환 상황에서의 아수라장을 빈틈 삼아 최대한 많은 인원이 동시에 상대 박스까지 도달하여 상대 박스를 에워싸고 수적 우세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중앙에 창조적이고 기술적인 선수를 배치해야 했으며, 창조자의 볼 키핑을 트리거 삼아 적군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자신의 포지션을 이탈하여 순간적인 침투와 2:1 패스, 즉 반복적인 ''''페너트레이션''''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비에이라 침투 1.gif|width=100%]]}}} || || {{{#000000 '''2004년 2월 21일 [[첼시 FC|첼시]]와의 경기'''[* [[파트리크 비에라]]의 동점골 장면.] }}}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비에이라 침투 2.gif|width=100%]]}}} || || {{{#000000 '''2004년 4월 25일 [[토트넘 홋스퍼 FC|토트넘]]과의 경기'''[* [[파트리크 비에라]]의 선제골 장면. 이 경기가 아스날의 리그 우승 확정 경기였다. 그것도 '''토트넘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 }}} || 이러한 축구는 당시 축구계에 있어서 찬반이 갈리는 것이었다. 예술성과 창조성을 동반한 진보적이고 세련된 엘리트 축구라는 찬사의 이면에는 비효율적이고 심미적이기만 한 반쪽짜리 축구라는 촌평도 존재했다. 가장 큰 논란거리는 '벵거볼'의 방점이 축구 경기에 대한 ''''승리''''에 찍혀 있는 것인지, 축구 경기를 하는 ''''행위'''' 그 자체에 찍혀있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는 축구의 철학적, 근원적 물음과 현대 축구의 어젠다적 물음 등을 자아냈다. 허나, 벵거의 팀이 경기장에서 노리는 것은 이상적으로는 '''둘 다'''였다. '아름답게 이기는 방식'과 '승리'의 조합이었다. 아름답다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지만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축구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을 벵거의 팀은 보여주고 있었다. 동시에 승리까지 거두면서 두 번의 더블과 한 번의 리그 무패 우승을 차지했다. 벵거는 선수들 스스로가 함께 뭉쳐 자신들만의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부임 초기부터 아스날에 그러한 의식을 주입 시키고자 노력했고, 훗날 '''리그를 무패로 우승'''하는 등 결실을 맺으면서 '벵거볼' 신화를 쓰는 듯 보였으나, 여전히 수면 아래에 문제점들이 가라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무패우승.png|width=100%]]}}} || 유럽 대회에서의 지속적인 부진과 일관성의 부족이 아스날을 안방 호랑이로 만들었으며, 팀 내 최고의 스타였던 [[티에리 앙리]]는 유럽 무대에서의 성적이 뒷받침되지 못해 [[발롱도르]] 등의 권위를 얻지 못하였다. 날로 커져 가는 챔피언스리그의 권위와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고, 경제적 이권과 상업적인 문제들로 인해 낡고 작은 하이버리 경기장을 뒤로하고 현대식 경기장을 짓겠다는 야망은 이미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벵거는 자신이 오랫동안 만들어오던 팀을 다시 재건해야만 했다. 동시에 철저히 프리미어리그의 스타일에 맞춰진 전술 안을 개혁하고 좀 더 대륙적인 축구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는 그 무렵 유럽 무대에서 동일한 리스크를 안고 있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알렉스 퍼거슨]] 역시 동조했던 부분이었다. 치열한 프리미어리그 시즌을 운영을 하는 동안 다소 피지컬적인 트랜지션에만 몸이 익어버린 선수들이 유럽 무대에선 맥을 못 추는 상황을 겪고 있었다. 공간이 자주 나는 프리미어리그 경기와는 다르게 [[조세 무리뉴|라인을 낮추고 공간을 없애는 팀]]도 있었고, [[프리메라리가|페이스 다운을 하며 1:1 기량 대결을 펼치는 팀들]]과 심지어 당시 프리미어리그에선 상상도 못 했던 [[AC밀란|후방 플레이메이커를 기용해 점유율을 가져가는 팀]]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퍼거슨 경이 이끌던 맨유의 트레블 이후 유럽 무대에서 다시 두드러지는 성과를 내기 시작한 프리미어리그 팀은 바로 스페인 출신인 [[라파 베니테스]]의 [[리버풀 FC]]와 이미 유럽 챔피언이었던 포르투갈 출신 젊은 천재 [[주제 무리뉴]]가 이끌던 [[첼시 FC]]였다. 그 무렵 [[세스크 파브레가스]]라는 영민한 스페인 소년을 [[FC 바르셀로나]]로부터 데리고 왔는데, 그 소년은 벵거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벵거의 눈에는 그 소년이 그의 꿈을 이루어 줄 것처럼 보였다. 결국 2006년의 아쉬웠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뒤로하고, 하이버리 경기장과 함께 영광을 함께 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