벵거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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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무패 우승의 신화?
3. 전술
4. 문제점
5. 종합



1. 개요[편집]


벵거볼 (Wenger Ball)이란 약 22년간 아스날 FC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감독인 아르센 벵거의 전술 철학 및 매니지먼트, 구단 운영 방식 등을 총망라한 개념 용어라고 할 수 있으며, 단순히 전술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로 사용되기 시작된 이 단어는 훗날 MLB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의 경영론에서 출발한 야구 경영론인 머니볼과도 그 궤를 같이 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영국 내에서는 역사가 있는 명문 클럽으로 간주되며, 엄연히 런던을 연고로 하던 빅마켓 클럽이긴 했으나 상대적으로 아르센 벵거의 부임 이전까지는 지속적인 리그 지배력을 갖추지 못했던 아스날이, 벵거의 영향력 아래에서 축구 스타일부터 구단 운영 방식까지 통 크게 갈아엎게 되면서 클럽과 리그 전체에 큰 파급력을 전파했다. 일반적으로는 벵거 감독 재임 시절 아스날 특유의 축구 스타일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고 있으며, 특유의 개성으로 인해 버스 세우기, 티키타카 등과 함께 축구계에서 아이코닉 해진 사례라고 할 수 있다.


2. 무패 우승의 신화?[편집]


엄연히 '벵거볼'이 무수한 축구 전술들과 경기 스타일 중에서도 콕 집어서 아이콘화된 결정적인 이유는 명확한 특징성을 내포했기 때문이다. 아르센 벵거는 22년간 아스날에 머물며 다양한 포메이션과 선수들을 기용하면서도 늘 한결같은 전술적 기조를 이루었는데, 바로 유기적이고 빠른 공격 축구를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단순히 기술적인 능력뿐 아니라 체력과 피지컬적인 부분에서 매우 높은 수준이 요구되었다. 빠르게 쉴 새 없이 뛰어야 하며, 긴 거리의 패스가 아닌 여러 번의 짧은 패스를 통해서 수비를 허물어야 하기 때문에 지구력과 민첩함이 요구되었다. 가장 큰 이유는 '전환' 때문이었다.

UEFA 유로 2004를 전후로 축구계에서 '공·수 전환', 즉 '트랜지션'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한때 이것을 가장 잘 했던 클럽들이 유럽 무대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었는데, FC 바르셀로나펩 과르디올라가 부임하기 이전까진 통칭 '빅 4'라 불렸던 맨유, 아스날, 첼시, 리버풀 등이 그러하였다. 당시 타 리그와 프리미어리그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전환의 속도'였는데, 영국 리그에선 전통이었던 '쉴 새 없는 공격과 수비의 전환'이 때마침 한시적인 패러다임으로 떠오르면서, 타 리그의 빅 클럽들은 모두 유럽 대항전 등지에서 프리미어리그의 '빅 4'에게 한동안 고전하였다. 아스날 역시 그간의 유럽 대회 설움을 뿌리치고 결승까지 진출했던 2005-2006 챔피언스리그에선, 리그에서의 부진과 다르게 해외 유수의 명문팀들을 상대로 수준 높은 경기력과 결과를 모두 챙기면서 준우승을 차지했고, 2008년에는 유럽 최고 수준의 경기력을 선보이며 디펜딩 챔피언인 AC 밀란을 상대로 당시 잉글랜드 클럽 최초의 산 시로 원정 승리 및 홈 앤 어웨이 무패를 기록하며 8강까지 진출하였다. 2009년에도 리그에서의 부진과는 다르게 유럽 무대에서는 선전하며 4강까지 진출했다. 그 시기 유럽 무대에서의 아스날을 막아선 팀들은 모두 공교롭게도 같은 프리미어리그 소속팀들인 리버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이었다. 리그에서 아스날이 '빅 4' 끝자락에 머물며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것과 엮일 수 있는 이야기였다. 아르센 벵거의 22년간 재임 역사에 있어서 바로 이 시기의 아스날이 유럽 무대에서 가장 크게 성공하고 경쟁력을 인정받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벵거볼'이 다른 유수의 축구 전술과는 차별화되었고 아이콘화된 지점이 여기에 있다. '트랜지션' 상태에서 경기를 풀어나가는 방식이 무척 독특했는데, 대부분의 팀들은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 시에 그저 빠르게 최단 거리로 스트라이커를 향해 롱 패스를 하거나, 주로 공을 운반하던 사이드 하프의 측면 돌파를 통해 상대 골문까지 도달하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벵거의 부임 이후 아스날은 이 전환 상황에서의 아수라장을 빈틈 삼아 최대한 많은 인원이 동시에 상대 박스까지 도달하여 상대 박스를 에워싸고 수적 우세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중앙에 창조적이고 기술적인 선수를 배치해야 했으며, 창조자의 볼 키핑을 트리거 삼아 적군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자신의 포지션을 이탈하여 순간적인 침투와 2:1 패스, 즉 반복적인 '페너트레이션' 상황을 만드는 것이었다.
2004년 2월 21일 첼시와의 경기[1]


2004년 4월 25일 토트넘과의 경기[2]

이러한 축구는 당시 축구계에 있어서 찬반이 갈리는 것이었다. 예술성과 창조성을 동반한 진보적이고 세련된 엘리트 축구라는 찬사의 이면에는 비효율적이고 심미적이기만 한 반쪽짜리 축구라는 촌평도 존재했다. 가장 큰 논란거리는 '벵거볼'의 방점이 축구 경기에 대한 '승리'에 찍혀 있는 것인지, 축구 경기를 하는 '행위' 그 자체에 찍혀있는지에 대한 부분이었다. 이는 축구의 철학적, 근원적 물음과 현대 축구의 어젠다적 물음 등을 자아냈다.

허나, 벵거의 팀이 경기장에서 노리는 것은 이상적으로는 둘 다였다. '아름답게 이기는 방식'과 '승리'의 조합이었다. 아름답다는 것은 주관적인 것이지만 통상적으로 사람들이 축구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들을 벵거의 팀은 보여주고 있었다. 동시에 승리까지 거두면서 두 번의 더블과 한 번의 리그 무패 우승을 차지했다. 벵거는 선수들 스스로가 함께 뭉쳐 자신들만의 문화를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부임 초기부터 아스날에 그러한 의식을 주입 시키고자 노력했고, 훗날 리그를 무패로 우승하는 등 결실을 맺으면서 '벵거볼' 신화를 쓰는 듯 보였으나, 여전히 수면 아래에 문제점들이 가라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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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대회에서의 지속적인 부진과 일관성의 부족이 아스날을 안방 호랑이로 만들었으며, 팀 내 최고의 스타였던 티에리 앙리는 유럽 무대에서의 성적이 뒷받침되지 못해 발롱도르 등의 권위를 얻지 못하였다. 날로 커져 가는 챔피언스리그의 권위와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고, 경제적 이권과 상업적인 문제들로 인해 낡고 작은 하이버리 경기장을 뒤로하고 현대식 경기장을 짓겠다는 야망은 이미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기 때문에 벵거는 자신이 오랫동안 만들어오던 팀을 다시 재건해야만 했다. 동시에 철저히 프리미어리그의 스타일에 맞춰진 전술 안을 개혁하고 좀 더 대륙적인 축구를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는 그 무렵 유럽 무대에서 동일한 리스크를 안고 있었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알렉스 퍼거슨 역시 동조했던 부분이었다. 치열한 프리미어리그 시즌을 운영을 하는 동안 다소 피지컬적인 트랜지션에만 몸이 익어버린 선수들이 유럽 무대에선 맥을 못 추는 상황을 겪고 있었다.

공간이 자주 나는 프리미어리그 경기와는 다르게 라인을 낮추고 공간을 없애는 팀도 있었고, 페이스 다운을 하며 1:1 기량 대결을 펼치는 팀들과 심지어 당시 프리미어리그에선 상상도 못 했던 후방 플레이메이커를 기용해 점유율을 가져가는 팀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퍼거슨 경이 이끌던 맨유의 트레블 이후 유럽 무대에서 다시 두드러지는 성과를 내기 시작한 프리미어리그 팀은 바로 스페인 출신인 라파 베니테스리버풀 FC와 이미 유럽 챔피언이었던 포르투갈 출신 젊은 천재 주제 무리뉴가 이끌던 첼시 FC였다.

그 무렵 세스크 파브레가스라는 영민한 스페인 소년을 FC 바르셀로나로부터 데리고 왔는데, 그 소년은 벵거를 완전히 사로잡았고 벵거의 눈에는 그 소년이 그의 꿈을 이루어 줄 것처럼 보였다. 결국 2006년의 아쉬웠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뒤로하고, 하이버리 경기장과 함께 영광을 함께 한 얼굴들이 하나둘씩 떠나가게 된다.


3. 전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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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거의 전술에서 가장 큰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트랜지션'과 '페너트레이션', 즉 '전환의 속도'와 '순간적인 수적 우세를 만들어 주는 침투'이다. 문제는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내느냐 하는 것이 중점이었다. 창조적이고 기술적인 선수들을 기용해 짧은 패스를 활용하는 것이 해법이었다. 한 편으로는 동시에 피지컬적인 요소를 간과할 수 없었다. 지속적인 육체적 활동, 즉 패스 앤 무브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짧은 거리를 끊임없는 반복해서 뛰어야 하는 민첩함과 기동력을 요구하는 전술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작은 공간에선 민첩함이 떨어지는 덩치 큰 선수보다는 작고 민첩한 선수들이 선호 되기 시작하였고, 나이가 많은 선수보단 젊은 선수들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 무렵 세스크 파브레가스라는 어리고 호리호리한 창조적인 선수를 데려왔다. 그리고 훨씬 덩치가 크고 나이가 많던 팀의 전설들이 물러났다.

과거 파트릭 비에이라는 물리적인 힘으로 압박을 버티고 뚫어내며 전진했지만, 세스크 파브레가스는 힘은 약하지만 비에이라보다 더 나은 시야와 패스를 갖고 있었다. 이로 인해 90년대까지 유행하던 섀도우 스트라이커에 대한 의존도를 버리고, 중원에서 곧장 창조적인 '트랜지션'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

더블과 무패 우승을 달성한 세대와 파브레가스를 중심으로 한 세대의 결정적인 차이는 경기 콘셉트가 달랐다는 것이다. 과거 세대의 아스날은 중앙 미드필더들이 종종 오버래핑을 시도했지만 기본적으론 4-4-2 대형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상대 중원을 상대하고 두 명의 공격수를 막는 데 집중하기 위해서 자리를 거의 비우지 않는 게 기본이었다. 따라서 팀에서 창의성을 발휘하는 가장 큰 포지션은 세컨드 스트라이커였던 데니스 베르캄프였다. 따라서 베르캄프가 볼을 받기 위해 중원으로 내려올 경우, 전방에서 공격적으로 유의미한 움직임을 가져가는 선수들의 숫자가 부족하거나 지연되는 탓에, 수비가 내려앉아 정돈이 된 팀을 상대로는 공간을 찾지 못해 고전했다. 또한 벵거의 팀은 항상 풀백을 높게 올려 수적 우세와 넓이를 얻었기 때문에 뒷공간을 늘 노출하고 있었다. 허나, 당시만 해도 빠른 속도로 펼쳐지는 공·수 전환 속에서 키핑력과 볼 점유에 대한 중요성을 크게 못 느꼈던 프리미어리그 팀들은 공을 빼앗기거나 턴 오버를 범한다는 것에 큰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아스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서로가 육체적인 활동에 기반한 짧고 반복적인 트랜지션만이 이루어질 뿐이었던 것이다.

이후 대륙 축구 도입 의제가 떠올랐고, 맨유는 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클레베르손, 에릭 젬바 젬바, 안데르손 등을 영입했고[3] , 아스날은 기술적인 남미 선수들과 스페인 리그 선수들을 영입했다. 또한 유럽 최고의 젊은 플레이메이커들이었던 토마시 로시츠키알렉산드르 흘렙을 데려오면서 기술적인 축구로의 전환을 시도하게 된다.

기술적인 축구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했다. 전임 선수들처럼 피지컬이 동반된 공간 침투는 분명히 위력적이었지만, 볼을 지켜내고 턴 오버 횟수를 줄이는 것이 점점 중요해져갔기 때문이다. 역습 후 낮은 위치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높은 위치에 머물며 계속 압박하고 곧바로 빠르고 기술적인 트랜지션을 하는 것이 당시까지의 축구의 흐름이었다. 아스날은 크고 빠른 선수들에서 작고 기술적인 선수들로 세대교체하면서 리그와 유럽 대회에서 모두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축구를 만들어 냈다.

허나, '벵거볼'이 축구 전술로서 크게 의의를 가졌던 시기는 이 시기까지가 마지막이었다. 빠르고 기술적이고 세련된 트랜지션을 무기 삼아 유럽 무대를 장악하던 잉글랜드 팀들의 패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트랜지션을 무용지물로 만드는 좀 더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한 펩 과르디올라FC 바르셀로나가 초현실적인 점유율 축구를 선보이면서 상대편에게 전환의 기회 자체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르센 벵거와 아스날은 그런 바르셀로나를 맞이하여 직접 유린을 당해보며, '우리에게 볼이 없을 때 얼마나 팀은 비참해지는가'를 사실상 처음 경험하게 된다. 물론 단 한 번 바르셀로나를 이겼던 경기에선, 바르셀로나를 유린했던 골은 '트랜지션' 상황에서의 빠르고 정교한 전개라는 아스날이 자랑하는 장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후 파브레가스 세대가 끝난 후의 벵거볼은 예전과는 조금 달라졌는데, 중원에서 직접 기술적이고 빠르게 트랜지션하고 마무리하는 것이 파브레가스 세대였다면, 펩 과르디올라가 축구계에 등장한 후를 기점으로 점유율에 대한 재고찰이 이루어져, 아스날 역시 상대 진영에서 볼을 좀 더 오래 갖고 있는 것을 방점으로 찍게 되었다. 점유에 불리한 투 톱을 버리고 원 톱으로 전환했으며, 그 원 톱은 주로 덩치가 크고 골문을 등지고 스크린플레이를 할 수 있는 타겟맨이 선호 되었다. 마루앙 샤막, 올리비에 지루 등은 그러한 기조에서 영입되었다. 물론 로빈 반 페르시가 포스트 플레이까지 해내는 완벽한 선수로 성장했기에 마루앙 샤막은 피해를 보았다.[4]


이들의 영입은 '트랜지션' 상황이 줄어드는 만큼 좀 더 상대방 진영에서 오래 머무는 상황이 많아지고, 자연스럽게 뒤 공간을 노리는 발 빠른 선수보다 직접 몸을 부딪히며 경합하는 상황이 많아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스날의 기조였던 수적 우세 유지를 위한 강도 높은 페너트레이션은 계속 이어졌기 때문에, 지공 상황에서 타겟맨을 기점으로 2대1 패스를 노리는 빈도가 매우 늘어갔다.

이후 고전적인 10번이었던 메수트 외질티에리 앙리 이후로 그간 가져보지 못했던 타고난 크랙 유형의 선수였던 알렉시스 산체스를 필두로 수비력이 거의 없는 선수들을 기용하면서 사실상 공·수를 오고 가는 강도 높은 트랜지션과 토털 풋볼에서 벗어나, 볼을 잡았을 때 파괴력과 지배력을 높이는 공격 지향적인 축구로 변모하였다. 또한 산체스를 영입하면서 그간 거의 쓰지 않았던 전술인 아이솔레이션도 허용하면서 산체스 개인의 기량을 믿고 의지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아스날은 한때 리그 우승에 근접했으나 레스터 시티 FC 동화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후 '벵거볼'은 더 이상 진화하지 못한 채 벵거와 함께 역사의 막을 내리게 된다.


4. 문제점[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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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벵거볼'은 아군이 볼을 잡았을 때 상대 진영에 최대한 많은 선수들을 난입 시키고 배치 시키는 것이 전제된다. 따라서 트랜지션 상황에서 어중이떠중이 뻥 축구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볼을 키핑 해줘야 하고, 볼을 키핑 하는 동안 나머지 모든 선수들은 재빨리 상대 진영까지 맹렬하게 올라가서 상대 박스를 에워싸야 한다. 이는 굉장히 강도 높은 노동력이 요구되는 행위이다. 당연히 많은 선수들이 높게 올라가게 되면, 그만큼 뒷공간이 공략 당할 리스크가 커지게 된다. 따라서 높이 올라가 있는 동안은 무사히 슈팅까지 공격 작업을 마무리해야 하며 그전에 볼을 빼앗길 경우, 상대방의 트랜지션 속도와 기술력이 좋다면 역습을 허용하는 빈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벵거볼'은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상대방의 강도 높은 트랜지션에 속절없이 당하는 고질적인 문제점을 안았다. 위의 일명 호루박 역습 짤방이 대표적 예시이다.

가장 큰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피지컬적인 문제였다. '벵거볼'이 가진 기존의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피지컬적인 요소를 상대적으로 등한시했던 아스널은 정작 후대로 갈수록 피지컬적인 요소가 부족한 탓에 자신들의 약점을 커버할 수 없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했다. 수적 우세를 위해 강도 높은 침투를 펼친 후 소득 없이 볼을 빼앗겼을 때, 일차적으로 저지선 역할을 할 수 있었던 패트릭 비에이라에마뉘엘 프티, 레이 팔러, 질베르투 실바, 마티유 플라미니 등과는 다르게 아스널의 중원은 일차적인 볼 탈취라는 측면에서 약점을 가질 수밖에 없는 중원 조합을 가져간 것이 원인이었다. 창조성과 지배력을 높이는 대신 그것을 향유하는 대가로 다가오는 리스크에는 대비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벵거 볼이 가지는 역설적인 한계였다. 벵거가 선택할 수 있는 가치 판단에는 오로지 양자택일뿐이었다. 비에이라와 파브레가스를 동시에 가진 적도 있었으나, 실제로는 한 명만 선택해야 했다. 파브레가스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진보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로 인해 아스날의 중원이 고착화되어간다는 것을 깨달은 리그의 여우들은 아주 손쉽게 맞춤형 전술을 들고 나오며 아스날을 유린했다. 이미 만천하에 아스날은 자신들의 수비에서 공격으로의 트랜지션 상황에만 집착할 뿐, 공격에서 수비로의 트랜지션과 볼 탈취에는 예전처럼 능숙하지 못하다는 게 드러났다.

또한 상대적으로 정적인 움직임을 가져가는 티키타카에 비하면 체력적인 소모가 월등한 피지컬적 요소가 필요했다는 점에서 알맞은 선수 수급에 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상대적으로 늘 어린 선수들이 선호 되었으며, 그 선수들에게 심미적인 요구 사항과 엘리트적 축구 의식에 더해 누구보다 부지런한 성실함을 동시에 요구했다는 점에서 벵거 스스로도 늘 고도의 매니지먼트 감각을 잃지 않아야 했다. 훗날 벵거의 말년이 다가오면서부터 메수트 외질알렉시스 산체스를 영입하며, 어린 선수들을 맞춤형으로 키워내는 것이 아닌 확실한 스타플레이어들의 기량을 믿어주고 살리며 의존하는 느슨한 매니지먼트 태도를 보이게 된다. 허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센 벵거라는 인물에게 늘 제기되던 문제점은 해결되지 않았다. 축구의 방점이 어디에 찍혀있느냐는 지적이었다.

곧 결과로 나타났다. 아스날이 리그나 유럽 대회를 우승하는 일은 그 뒤로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5. 종합[편집]


내가 인생을 살면서 몸에 익힌 윤리관은 축구를 통해 배운 것이다. 클럽으로서 우리는 교육적인 의무를 지고 있다. 아스널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우리의 시합이나 행동을 통해 윤리관을 배울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벵거볼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경기 방식에 대한 심미적인 접근법과 고고한 엘리트적 의식이 사람들의 질타를 받았음에도 그러한 의식이 자아내는 아름다운 경기들이 축구 팬들에게 승리와는 또 다른 풍경의 감동과 가치 판단을 선사했다는 점에서 벵거는 그것을 프로 축구의 존재 의의라고 설명하며, 축구 경기를 단순히 거액과 명예가 달린 기업과 기업 사이의 대리전이 아닌 축구 경기를 보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꿈과 희망을 갖게 해줘야 한다고 믿었다. 벵거는 그로 인해 철학자, 이상가, 낭만주의자라는 평을 받았으며 그와 함께 아스널에서 뿌리내렸던 벵거볼은 그러한 벵거의 철학이 선수와 전술을 넘어서 구단 전체와 리그 전체, 나아가서는 축구계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큰 인상을 주었다.

고도로 상업화된 현대 축구의 시발점 속에서도 유유히 축구에선 다른 가치관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고 설파했으며,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는 점에서 '벵거볼'은 축구계에서 독특한 축구적 어젠다를 유발했다고 할 수 있다. 동시에, 승리를 최우선으로 삼기엔 불안한 리스크를 여럿 야기하는 기조의 축구 방식으로 약 수십 년간 한 클럽의 흥망성쇠를 계속 이뤄냈다는 점에서 이미 현대적인 신화로 남게 될 전망이다.
[1] 파트리크 비에라의 동점골 장면.[2] 파트리크 비에라의 선제골 장면. 이 경기가 아스날의 리그 우승 확정 경기였다. 그것도 토트넘의 홈구장인 화이트 하트 레인에서![3] 물론 이들은 모두 실패작이 되었다.[4] 훗날 샤막은 벵거가 자신을 위해 반 페르시와 공존하는 전술로 바꿔준다는 말을 했지만 지키지 않았다면서 서운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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