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르살리에리 (문단 편집) ===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시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00px-Scontro_di_Rivoli.jpg|width=100%]]}}} || || 쿠스토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제국군과 격돌하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군 소속 베르살리에리 장병 ||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장군 [[https://en.wikipedia.org/wiki/Alessandro_Ferrero_La_Marmora|알레산드로 라 마르모라]]의 제안을 수락한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이 1836년 6월 18일 창설했다. 모태는 [[경보병]] 부대였으며, 이는 당시 사르데냐군의 부족한 기병전력을 메꾸기 위한 조치였다. 이 부대의 가장 큰 특징인 '[[뜀걸음|3보 이상 구보]]'도 빠른 이동속도로 기동보병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었다. 따라서 전술적 유연성을 위한 독립적인 작전권도 보장 받았다. 베르살리에리가 대중에게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1836년 7월 1일 군사 퍼레이드였다. 퍼레이드에 참가한 제1중대는 뜀박질을 하며 분당 180보로 [[토리노]]를 행진했다. 본래 창설될 때는 네 개 중대만 있었지만 규모가 점점 커져서 1871년에는 36개 대대로 이루어진 6개 연대가 되었다. 이들은 1870년 [[교황령]] 점령에서 큰 활약을 하였다. 이들이 최초로 국제사회에 이름을 떨친 것은 [[크림 전쟁]]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왕국]]의 모태였던 [[사르데냐 왕국|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열강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1만 5천명의 군대를 파병하였고 베르살리에리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당시 [[영국군]]과 [[프랑스군]]은 [[똥별|졸장]]들의 삽질 등으로 인해 온갖 추태를 보여주었는데, 상대적으로 소수였던데다 정예병으로 구성되어있었던 사르데냐군은 상당히 잘 싸워서 호평을 받았다. 특히 베르살리에리 연대는 그중에서도 돋보였으며, [[https://en.wikipedia.org/wiki/Battle_of_the_Chernaya|체르나야 전투]]에서는 [[러시아 제국군]]의 기습에도 굴하지 않고 육박전까지 벌여가며 적을 쫒아내는데 지대한 공훈을 세웠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