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작 (문단 편집) === [[유럽]]의 백작 === || [youtube(HJMo3Xsmey0)] || || Hasan Cobanli as Der Blasierte Graf - The Arrogant Count || 대개 얼(Earl)과 카운트(Count), 그라프(Graf)가 백작으로 번역되는데, 일반적으로 대륙식 봉건제를 기준으로 본다면 [[로마 제국]] 당시 [[황제]]의 고위 행정관을 지칭하는 [[https://ko.wikipedia.org/wiki/%EC%BD%94%EB%A9%94%EC%8A%A4|코메스]](Comes largitionum)에서 유래되었다. 이 코메스는 특정한 관료 직위라기보다는 관료직 자체를 가르키는 말이었다. 일례로 [[동고트 왕국]]과 [[서고트 왕국]]의 관직 명 앞에 코메스가 들어가 있다. 대륙의 백작(Count)은 [[프랑크 왕국]]의 지방행정관 겸 [[판사]]를 로마 시절처럼 코메스라고 부른 데서 시작한다. [[고대 로마]]의 지역단위인 Pagus는 프랑크 왕국 하에서 주(gau)로 전환되었고, 각 주에는 행정관으로서 백작(Count; Graf)이 파견되었으며, 백작의 관할권은 [[카운티|County]]라고 불렀다.[* 이 영향으로, 귀족제가 존재한 적이 없는 미국 등에서도 County란 말이 행정구역의 의미로서 살아있다.] 이에 더하여 변경 군사 요충지의 특수행정구역인 변경주(March; [[마르크|Mark]])를 담당하는 [[변경백]]과 국내 주요 거점의 [[팔츠|궁정(Pfalz)]] 일대를 관리하는 [[궁정백]]이 파생되었다. 이러한 초기의 백작직은 분명하게 왕에게 고용된 비세습적 관료였으나, 전근대 사회의 특성상 부유한 이들은 손쉽게 자손에게 그 직위를 세습시키는 데 성공했고 점차 영주화, 작위화한다. 많은 수는 봉건체제가 시작되면서 [[공작(작위)|공작]]에게 귀속되었으나, 몇몇 백작은 다수의 주(Gau)를 흡수하면서 독자적 세력을 지니게 되었다. 본디 자유 영주였던 남작들은 이러한 행정관 백작의 관할령 안에 강제로 편입되었고, 작위별 위계가 생겨나면서 백작은 남작들의 장원과 주교령, 도시들을 포함하는 규모의 작위가 되었다. 그런가 하면 중세 성기에 이르러서는 백작 예하 관리로서 활동하던 [[자작(작위)|부백작]]이나 더 영세한 작위 없는 토호, 소지주 등 유력자들이 스스로 성을 쌓거나 이미 있던 성을 탈취하고 백작의 반열에 오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소규모 영주는 기존의 백작을 포함한 영역제후층과 구분하여 성주층의 일종으로 분류되기도 하였으며, 특히 남프랑스에서는 기존 영역제후들이 고전할 수준으로 성장하였으나, 중세 후기 무렵에는 다시금 군주나 영역제후한테 복속된 상태에 놓였다. [[프랑스]]에서의 백작(Comte)은 대강 900년까지는 세습할 수 없는 관직으로 여겨졌다. 또 서열화된 작위라기보다는 관직이었던 바, 프랑스 왕이 직접 지명한 백작 외에도 당대 프랑스 내 최대의 영역군주인 아키텐 공작이나 부르고뉴 공작 등도 자신들의 영역 내에 별도의 백작구를 만들어 백작을 파견했다. 그러나 봉건화 과정이 진전됨에 따라 관직의 성격은 사라지고 작은 땅의 세습영주가 되는 경향을 보였다. 또한 이때까지는 작위의 서열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아, 몇몇 지역을 기반으로 영역군주로 성장한 백작들은 프랑스왕의 직속 봉신으로써 공작급 봉신들과 대등한 '왕의 동료들' 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 예로 [[카페 왕조]]의 위그 카페는 파리의 백작이었지만 귀족들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오를 정도로 유력한 귀족이었으며[* 다만, 위그 카페의 할아버지 역시 프랑크 국왕에 오른 적이 있었으며 위그 카페의 할머니가 샤를마뉴 대제의 후손이었다.], 그 외에 플랑드르 백작, 상파뉴 백작 역시 '왕의 동료'로 여겨졌다. 좀 더 시간이 흘러 12세기엔 아키텐 공작의 봉신이었으나 영역 군주로 성장한 툴루즈 백작도 아키텐 공작령에서 똑 떼어져 프랑스 왕의 직속 봉신으로써 왕의 동료에 속하게 된다. 이들은 자신의 영역 내에서는 같은 왕의 동료인 공작들과 마찬가지로 입법권과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고, 또한 독자적으로 화폐를 주조하거나 사적 전쟁(Fehde)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허나 13세기 초부터 왕의 이름으로 재판권을 행사하는 대법관 제도가 생기면서 프랑스 내 백작의 권한은 악화되기 시작했고, 16세기에 들어서 화폐 주조권마저 잃고 말았다. 이후 프랑스 제1제정과 그뒤를 이은 군주정 및 제국주의 시대에는 백작의 지위가 영역 제후의 의미를 전혀 가지지 않았고 장자상속에 따라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허울 좋은 세습작위가 되었다. [[독일]]에서의 백작(Graf)은 10세기경부터 대부분 세습작위로 변하게 되었지만 오랫동안 관직의 성격을 유지했으며, 12세기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는 백작에게 그들이 다스리는 지역에서 치안유지권을 부여했는데, 이 권한은 1100년까지 공작에게 속해 있었다. 그 후 백작령이라는 용어는 백작이 생살여탈권을 갖고 있는 지역을 의미하게 되었고 또한 이미 12세기 초부터 독일 서부에서는 공식 지위와는 전혀 관계없이 단지 그들이 갖고 있는 성에서 백작이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백작이 많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는데, 프리드리히 1세 시대에는 보호관(Vögte) 같은 상류층의 일부 자유인들이 백작을 자처하기 시작했다. 이후 13, 14세기에는 공작에게 봉토를 하사받은 새로운 백작령이 생겨났다. 한편으로 신성로마제국 안에서는 일반백작과 [[제국백|제국백작]]을 차츰 구별하기 시작했다. 제국백작은 [[제국의회(신성 로마 제국)|제국의회]]를 구성하는 한 요소인 백작단(Grafenkollegium)의 일원이 되었다.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된 뒤 제국백작의 지위도 한 단계 낮아졌다. 다시 말해서 그때까지는 황제 한 사람만의 직속 신하였던 제국백작이 독일 여러 국가의 군주에게 종속된 지위로 떨어졌다. 그렇기는 해도 연방의회는 1829년 각하(Erlaucht)[* 영어에서는 Illustrious Highness라고 번역함]라는 특별 존칭을 쓸 수 있는 제국백작의 권리를 인정했다. '''영국(잉글랜드)의 백작(earl)은 대륙과는 계통이 전혀 다르다.''' 영국의 백작은 잉글랜드에서는 바이킹의 [[야를]](Jarl)에서 유래했고,[* [[노르드인]]의 영향을 받기 전에는 [[앵글로색슨]] 고유의 Ealdorman이라는 지위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하나 이상의 주(shire)를 통치하였으며, 초기 부족 시절에는 [[프린스|Prince]]에 가까웠으나, 기독교화 및 봉건화 과정에서 Duke와 Count 사이 즈음의 위치에 자리하였다.][* 수용 시 남성형 명사인 jarl만 도입되고 여성형은 도입되지 않은 채 이어지다가, 노르만 정복 이후 Count(대륙식 백작)으로 대체하지 않는 대신 여성형 명사로서 Countess라는 말이 도입된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스코틀랜드의 고유 작위인 모마어(Mormaer)에서 유래했다. [[노르드인]]이었던[* 로마화 과정에서 프랑스식 봉건제를 받아들였던 북프랑스의 [[노르만족|노르만인]]과는 다르다. 노르드인은 오직 스칸디나비아 출신만을 가리킨다.]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야를 작위가 도입되었다. 이때 야를은 오등작에 비추어 번역할 때는 보통 백작으로 번역하기는 하나,[* 부족적 성격을 강조할 때는 족장으로 번역한다. 실제로도 덴마크 등에서 봉건제를 받아들일 때 기존의 Jarl은 Duke(Herzog)로 대체되었다.] 사실상 공작급의 권력과 영역을 가졌다. 이런 특징은 잉글랜드 초기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웨식스 백작(earl)이나 노섬브리아 백작, 혹은 머시아, 켄트 백작 등, 그 임지가 백작이라기에는 [[앵글로색슨 7왕국|옛 왕국 규모]]였던 것처럼 '''사실상 대륙의 백작(Count)과는 달리 공작(Duke)과 비슷한 작위에 가깝다.''' 그렇게 본다면 웨식스 백작이었던 [[해럴드 2세]](후에 왕이 됨)가 막강한 권력과 부를 가진 이유를 알 수 있다. 웨식스의 권역만 해도 남부 잉글랜드 전체에 가까우니. 하지만 [[노르만 정복]] 이후로는 상황이 바뀌어서 옛 왕국들의 이름을 딴 권역은 철폐되고 새롭게, 그리고 섞어서 편성되었다. 이후 흑태자 에드워드가 영국 최초의 공작(Duke)인 [[콘월 공작]]으로 책봉되면서 Earl의 지위는 대륙의 Count와 비슷하게 내려가고, 본래 Earl의 권역은 공작위로 완벽하게 대체되었다.[* 그 이전까지 영국사에 존재하던 [[노르망디 공국|공작(Duke)]]은 [[프랑스 왕국|프랑스 국왕]]의 봉신으로써 [[잉글랜드 왕국|잉글랜드 국왕]]이 [[동군연합|겸하던]], 명목상(de jure) [[복수국적|'''영국 밖'''의 지위]]였으며, 영국 내에는 공작위가 존재하지 않았다.] 스코틀랜드의 모마어 또한 말이 백작이지 스코틀랜드 국왕의 통제를 벗어나 할거하는 소왕(petty king)이었다. 유명한 [[막 베하드|맥베스]]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모레이 백작(모마어)이었다. 스코틀랜드 고유의 모마어 작위는 15개가 있었다.[* 앙구스, 던바, 멘테이스, 애솔, 파이프(맥베스의 맥더프가 파이프 백작이다), 모레이, 버컨, 레녹스, 로스, 케이스네스, 마르, 스트래던, 캐릭(브루스 가문의 작위였으며, 이후 브루스 가문의 [[로버트 1세]]가 왕이 되면서 캐릭 백작은 스코틀랜드 왕세자의 작위가 된다), 마르, 미언스, 서덜랜드] 좀 특이한 사례로, 피아스트 왕조 폴란드에선 Komes는 끝까지 샤를마뉴 행정체계와 같이 관료로 성격이 유지되고 세습되지도 않았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시대에 백작 직위는 소멸해버렸고, 동유럽 특유의 제후인 [[보야르]]가 그와 비슷한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폴란드 분할 이후에나 독일의 Graf에서 파생된 Hrabia가 잠시 부활한다.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집권화한 근대 국가가 형성되었고, 백작은 영역제후로서의 정치 권력은 상실했으나, 귀족 계급의 일원으로서 누리던 특권은 계속 유지되었다. [[근대]] [[유럽]] [[역사]]에서 실세인 중앙 [[귀족]]은 백작이 대부분인데,[* 주의할 점은 이는 어디까지나 근세~근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중세 대부분의 기간 동안 대다수 백작은 공작의 봉신으로서 주군이 국왕이 아니었기에 (잉글랜드의 백작령이나 대륙의 일부 유력 영역제후령으로서의 백작령 제외) 그 기원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으로는 백작과 국왕 간에는 큰 교점이 없었다. 분권화된 중세 사회 특성상 강력한 제후 중에는 공작이 많았다. 하지만 근세, 근대로 넘어오면서 [[중앙집권]]화와 [[관료제]]화 하고 귀족의 독자적 영지 운영이나 군사력 등의 권력이 약해지고 장교, 공무원, 정치인으로서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자연스레 그 무게가 큰 공작보다는 적당한 백작 출신이 많아진 것이다.] 그 탓인지 백작 계열의 인물들이 많이 알려져서[* 그래서 그런지 [[루이 18세]]와 [[샤를 10세]]도 왕이 되기 전에 각각 앙주 공작과 베리 공작위가 있었지만, 각각 프로방스 백작과 아르투아 백작으로서 더 많이 알려져 있었다.] 현대인에게는 오등작 중 가장 친숙한 작위이다. 대표적으로 [[몽테크리스토 백작]]과 [[드라큘라 백작]], 존 몬태규 [[샌드위치]] 백작이 있다. 이러한 백작위(earl)는 근대에 이르러 명예로운 칭호로 변하면서 더이상 영토와 결부되지 않게 되었고, 18세기부터 작위를 받은 사람의 성(姓)에 백작이라는 칭호만 덧붙이는 관례가 생겨났다. 또한 이렇게 생겨난 백작위들은 '''Earl of 성씨'''라고 표기하는 것이 아닌, '''Earl 성씨'''로 표기한다. 형식적으로라도 [[영지(역사)|영지]]가 없어서인데,[* 이는 청나라와 일본의 친왕도 마찬가지로 공친왕 혁흔은 Prince Gong으로 번역된다. 또한 중국의 공작위 중 영지가 없는, 예를 들어 공자의 후손에게 내려진 연성공 작위나 금나라의 황제가 송나라의 휘종에게 내린 혼덕공과 같은 작위 역시 Duke Hunde 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이는 영국의 경우이고 타 지역에서는 조금씩 다르다. 독일에서는 성에 칭호만 붙여 만들어진 작위라도 "~~의"를 의미하는 von를 붙였기에 독일의 작위를 영어로 번역할 때는 of를 붙여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스페인의 de 역시 마찬가지. 대표적인 예시로 [[프랑코]]의 딸에게 내려진 프랑코 공작이 있다. 여담으로 프랑코 공작위는 초대 프랑코 공작인 프랑코의 딸을 거쳐 현재는 프랑코의 외손녀가 작위를 소유하고 있는데 現 프랑코 공작의 후계자이자 그녀의 장남인 루이 드 부르봉은 카페 왕조의 전체 수장, 즉 프랑스 왕위 요구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2022년에 스페인 민주화 기억법을 스페인 국왕 [[펠리페 6세]]가 허가하면서 프랑코 공작위는 박탈 후 폐지되었다.] 가령 [[다이애나 스펜서]]의 남동생인 찰스 스펜서가 Earl Spencer로 불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