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배대웅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1971년 [[경북고등학교 야구부|경북고등학교]] 재학 시절에 [[남우식]], [[천보성]], [[정현발]] 등의 동기, 1년 후배 [[황규봉]], [[이선희(야구)|이선희]] 등과 함께 대통령배, 청룡기, 봉황기, 황금사자기에서 모두 우승했다. 어려웠던 가정형편 때문에 고교 졸업 후 바로 실업팀인 기업은행에 입단했다. 1975년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부터 국가대표 2루수로 자리 잡으며 당시 유격수 [[김재박]]과 1981년까지 7년간 [[키스톤 콤비]]를 이뤘다. 김재박이 화려한 수비를 자랑했다면 배대웅은 안정적인 수비로 내야진을 이끌었다. 배대웅을 기업은행으로 스카우트했던 [[김성근]] 감독은 '포지션은 달랐지만 [[박진만]] 같은 선수였다'고 평가했다.[* 이 때의 인연 때문인지 배대웅은 삼성 라이온즈 창단 당시 코칭스태프 선임 문제가 잘 풀리지 않자 서영무 감독에게 김성근을 대안으로 추천했고, 김성근도 이 마음을 고마워했는지 삼성 감독 시절 배대웅에게 3루 코치와 선발 라인업 교환이라는 중책을 맡겼다.] [[1978년]] [[포항제철 야구단]]으로 팀을 옮기고, 1982년 프로야구가 출범하며 당시 실업야구선수라면 은퇴를 고려했을 만 28세의 나이로 연고팀인 [[삼성 라이온즈|삼성]]에 입단했다. 팀 내에서 [[황규봉]] 다음 가는 연봉을 받았으며 다년의 국가대표 경험 덕분에 초대 주장을 맡았다. 프로야구 첫 몰수게임의 원인 제공자였다. [[1982년]] [[8월 26일]] [[대구시민 야구장]]에서 열린 [[MBC 청룡]]전에서 4회말 1사 1,2루 상황에서 [[정현발]]이 유격수 땅볼을 치자 배대웅은 병살타를 막기 위해 MBC 2루수 [[김인식(1953)|김인식]] 쪽으로 거칠게 슬라이딩했다. 김인식은 넘어졌다가 일어나선 배대웅의 얼굴을 쳤다. [* 근데 이게 머리를 툭 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때문에 [[벤치 클리어링]]도 일어났고, 심판은 김인식을 퇴장시켰다. 김인식이 퇴장되자 [[백인천]] MBC 감독이 왜 김인식만 퇴장시키냐며 항의하다가 선수들을 모두 철수시켜 몰수게임이 선언됐다. 그런데 정작 당사자끼리는 잘 해결했다. 김인식은 배대웅의 얼굴을 친 후에 바로 사과했고, 동기인데다 오랜 기간 국가대표를 같이 했던 사이라 배대웅도 [[다혈질]]적인 김인식의 성격을 잘 알고 있어 사과를 받아줬다. 그리고 이 몰수게임이 있었던 다음날에는 같이 술을 마시며 이 일을 두고 얘기하면서 웃었다고 한다. 한국프로야구 사상 첫 [[KBO 한국시리즈|한국시리즈]]의 마지막 타자였다. 팀이 8:3으로.지고 있던 [[1982년 한국시리즈]] 6차전 9회말 2사 후에 타석에 들어서0 땅볼을 쳤고 유격수 [[유지훤]]이 1루 송구로 연결하여 시리즈를 끝냈다. 1983 시즌에는 0.285의 타율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1983 시즌 후 무릎수술을 하는 등 점점 잔부상으로 결장하는 일이 잦아지며 백업으로 밀려났다. 하지만 은퇴하기 전까지도 경기 후반에 대수비로 들어서 안정적인 수비를 자랑했다. 프로 5년간 통산 실책이 20개로, 1년당 4개를 범한 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