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제순 (문단 편집) == 개요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2b9c4c1-cef1-4b6b-a406-3d6b004c4328.jpg|width=100%]]}}}|| || {{{#ffde09 '''[[1909년|{{{#ffde09 1909년}}}]], [[순종(대한제국)|{{{#ffde09 순종}}}]]이 순행을 마치고 돌아와 [[창덕궁|{{{#ffde09 창덕궁}}}]] [[창덕궁 인정전|{{{#ffde09 인정전}}}]] 앞에서 친일 관료들과 기념촬영한 사진.[* 중앙에는 순종이 앉아있고 그 오른쪽에는 [[이재각]], [[민병석(1858)|민병석]], [[조중응]], [[김윤식(조선)|김윤식]], [[이지용]], [[조민희(1859)|조민희]], 고희성이 서 있으며, 어진 뒤에는 [[이병무]], [[윤덕영]]이 서 있다. 순종황제의 왼쪽에는 [[이토 히로부미]], [[이완용]], [[임선준]], [[고영희]], [[송병준]], [[박제순]]이 서 있다.]'''}}} || >"[[박제순|할아버지]]는 대체 왜 자결하지 않으셨는가. 왜 후손들을 이다지도 욕되게 하는가." >---- >박제순의 '''친손자''' [[박승유]][* 일제강점기의 [[성악가]]로 집안의 친일 행적에 부끄러움을 느껴 [[일본군]]을 탈영하고 [[한국광복군]]에 입대해 심리 활동, 선전 활동 등을 맡았다. 광복 이후에는 교수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의 참정대신.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치가]], [[유학자]], [[외교관]], [[친일반민족행위자]]. 조선 후기의 친청 [[개화파]]로 활동하다가 1894년 [[동학농민운동]]을 진압했고 1905년 [[을사조약]] 체결 당시에는 [[외부|외부대신]](현재의 [[외교부장관]])으로서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고 있었으나 "나는 모르겠오, 마음대로 하시오."라는 등의 [[자포자기]]한 태도를 보여주며 [[을사오적]] 중 1명이 되었고[* 박제순이 [[한규설]]과 조약문 수정에 참여하지 않았고 을사조약 체결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반면에 처음에는 반대 입장을 밝혔다가 입장을 바꿔 체결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하영(1858)|이하영]]을 박제순 대신 을사오적에 포함시키기도 한다. 다만 박제순이 당시 대한제국의 외교를 담당하던 만큼 박제순을 포함시키는 경우가 많다.] 이후 1910년 [[경술국치]] 때 [[내부|내부대신]](현재의 [[행정안전부장관]])으로서 또다시 [[한일병합조약]]에 동의하며 [[경술국적]]이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