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박시창 (문단 편집) === 독립운동 === 1923년, 난징 중앙대학에 입학했지만 몇달 후 휴학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생활고 때문에 학비를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상하이로 돌아온 그는 조선인청년동맹회에 가입해 활동했다. 1925년 11월 부친 박은식이 서거하자 상하이에서 거행된 장례식에 참석한 그는 1926년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인 황포군관학교 제5기 포병과에 입교했다. 1926년 7월 [[국민당의 1차 북벌]]이 개시되자, 그는 국민혁명군 포병대에 편입되어 북벌에 참가했다. 그해 10월 국민혁명군이 우한에 입성한 뒤 황포군관학교 우한분교가 설립되었다. 그는 다른 학생들과 함께 우한분교에 입학했고 1927년 7월 졸업 후 중국군 장교로 지내는 동시에 한국의 독립 운동에 참여했다. 우한분교 재학 시절 친분을 맺었던 진공목, 진갑수, 안재환, [[김영재(1911)|김영재]], 송욱동, 장기준, 그리고 중국 기술교관으로 있던 백득림, 홍의균, 권준, 전창무, 노세방 등과 같이 무한한인혁명청년회를 조직했다. 이 조직은 점점 확장되어 후에 의열단 무창지부로 발전했다. 또한 1928년 난징의 군관단(軍官團)에 입대했으며, 1929년에는 국민혁명군 경위군(警衛軍)에서 8년 동안 복무했다. 경위단은 나중에 제 87사단으로 개명되었는데, 제87사단은 당시 국민혁명군 중 손에 꼽히는 정예부대였다. 1932년 일제가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을 때, 박시창은 제 87사단 소속 중대장으로서 참전하여 2달 동안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후퇴했다. 1935년, [[김구]]의 중국군관학교 입교생 모집 활동에 적극 협력했다. 그는 [[노태연]], [[염온동]]과 함께 낙양에 배치되어 연락원으로 활동하며 그 일대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키려 노력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독립운동가 최중호의 딸 최윤신과 결혼했고, 계속 중국군에서 복무를 했으며 1937년 노구교 사변 당시 중국군 포병연대장으로 보정에 주둔하고 있기도 했다. 이후 1941년 [[김홍일(군인)|김홍일]]과 함께 육군대학에 입교했다.[* 중국군 상교] 당시 한국인으로서 육군대학에 입교한 이는 그와 김홍일, 그리고 [[최용덕]] 뿐이었다. 1942년 5월 조선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을 때, 당시 조선의용대 대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그 역시 광복군에 편입되어 광복군 제1지대 장교로 활동했으며, 1943년 8월에는 광복군 총사령부 고급참모에 선임되었다. 또한 민족혁명당에 가입하여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44년 10월, 임시정부 국무회의는 그와 [[문일민]]을 광복군 참모부 참모로 임명했고, 그는 그해 12월까지 참모로 재직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