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맹 (문단 편집) === 일제 강점기 === [[일본]]에서 [[의무교육]]제도가 1885년부터 도입되었다. 그리하여 [[조선]]으로 오는 일본인들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초등교육을 받아 [[가나(문자)|가나]] 문자와 [[한자]] 수백 자 정도는 읽고 쓸 줄 알았다. [[1909년]]에 조선에 살고 있는 [[일본인]]들에게 의무교육이 적용되었고, 조선 내에서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특권층에 속해 있었기에 조선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문맹률이 낮았다. 반면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학교를 가지 못할 만큼 경제력이 열악했다. 경제력이 된다 해도 자녀 전부를 학교에 내보내는 경우는 좀체 드물었다. 설사 학교에 간다 해도 학비가 상당해서 가정에 상당한 부담이 되므로 기껏 학교를 다닌다 해도 중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기 때문이었다.[* 2천 만 국민 중 80∼90%가 문맹자였던 1920년대, 1928년 3월 16일자 「동아일보」에는 “어찌하면 우리는 하루 바삐 이 무식의 지옥에서 벗어날까. 어찌하면 이 글장님의 눈을 한시 바삐 띄어볼까…….”라는 기사를 통해 ‘글장님 없애기(문맹퇴치) 운동’을 선언했다. 4월 2일에는 안재홍, 방정환, 최현배, 최남선 등 명사 30여 명의 강연회를 열 계획이었으나 조선총독부가 3월 29일 문맹퇴치운동 금지령을 내리며 막았다.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illiteracy.do|링크1]]] 게다가 그 시절에는 여자라는 이유로 학교에 못 가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여자의 문맹률이 더 높았다. '''1910년대~1920년대까지의 문맹률 조사는 [[일본어]] 문맹을 기준으로 조사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흔히 일제 초기 조사에서 문맹률이 99%였다고 나오는 자료들이 일본어 문맹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다만 19세기 후반에 최초 발행된 신문인 한성순보가 순한문 신문이였던 점 등을 볼 때,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한글은 등한시되었고 문맹률은 높던 것으로 보인다. [[주시경]] 등의 노력이 있기 전까지 한글 기준 문맹률이 낮았으리라 추측할 만한 근거는 없다. “고상한 학문과 해박한 지식은 그만두고라도 조선 글로 편지 한 장 쓰지 못하고 심지어 상점 간판과 정거장 이름 하나 몰라보는 사람이 열의 아홉”이라는 신문 기사가 일제 강점기에 실렸을 만큼, 조선인들은 한글조차 제대로 읽거나 쓰지도 못했다. [[http://theme.archives.go.kr/next/koreaOfRecord/illiteracy.do|링크1]] |||| || 문맹률[* 여기서는 한글과 가나를 둘 다 모르는 비율.] || 한글 문해율 || 가나 문해율 || |||| 합계 || 73.95% || 25.8% || 6.8% || ||<|2> 성 || 남성 || 59.9% || 40.0% || 11.5% || || 여성 || 88.0% || 7.9% || 1.9% || ||<|5>연령 || 0-14세 || 89.6% || 10.4% || 6.7% || || 15-24세 || 57.7% || 40.3% || 14.0% || || 25-39세 || 64.6% || 32.3% || 6.5% || || 40-59세 || 73.4% || 26.5% || 1.9% || || 60세 이상 || 79.8% || 20.1% || 0.4% || [[http://kosis.kr/statHtml/statHtml.do?orgId=101&tblId=DT_1IN3015&conn_path=I2|1930년 국세조사 당시 조사된 조선인 문맹률]]. 그래서 [[일제강점기]]에는 문맹률이 대체적으로 70%대 후반-80%대 정도에 달했다고 추산되며, 1930년 일본 국세조사에서도 조선인들의 문맹률이 77%[* 다만 이 수치 자체는 일반적으로 문맹률을 계산할 때는 빠지는 아동 인구를 포함해서 높게 나온 면도 있다. 당시 15세 이상 조선인 문맹률은 69.9%였다.], 일본어 문맹률은 93%로 나타났다. 아동이나 청소년층들도 문맹률이 70%에 근접했고, 이는 40-50대와 큰 차이가 없는 수준이었다. 일본어 문해율만은 연령이 내려갈수록 높아지는 경향을 보였지만 일본어 문해율이 가장 높은 연령대에서도 10%대에 그쳤고, 무엇보다 일본어를 읽을 줄 아는 조선인 중 대부분(99.5%)은 한글 역시 읽을 줄 알았기 때문에 전체 문맹률 수치에는 별 영향을 끼치진 못했다. 때문에 당시 근대교육의 보급이 문맹퇴치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브나로드 운동]]은 생각보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또한 일제 당국에서 [[서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해서 상당수의 서당을 폐쇄시키게 만들고 브나로드 운동을 탄압하려는 움직임까지 보였던 점이나 일제강점기 내내 조선에서 유일한 종합대학이 [[경성제대]] 단 하나였던 점을 생각해 보면[* 정작 일본 본토에서는 같은 시기 도쿄나 오사카 같은 도시들에 여러 개의 대학들이 세워졌다. 교육에 있어서도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훨씬 심한 차별에 시달렸던 것이고, 그래서 해방이 되자 조선인들의 억눌렸던 학구열이 폭발하여 각종 대학교들이 무수히 생겨났다.] 일제 당국이 조선인들의 교육에 대해 무관심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식민지 근대화론|말로만 근대화]]를 내세웠을 뿐, 실제 근대화를 위한 기초 인프라 작업은 철처히 방기했고, 그나마도 일본인들 위주로 보급되었다는 점이다. 실제 경성제대조차도 일본인 학생이 조선인 학생보다 훨씬 많았고,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 사립 중고등학교들도 이 시기에는 대부분 일본인들을 위한 학교였다. [[1930년대]] 후반-[[1940년대|40년대]] 전반기에는 일본어 문맹률이 조금씩 낮아졌다. 당시 조선인들이 자녀의 출세를 위한 교육에 주목하면서 [[1920년대]]부터 학교를 늘려 달라고 했고, 더불어 일제가 [[황국신민|황국신민화]] 교육을 위해 학교를 증설한 영향이 컸다. 그렇지만 [[일본]]에서도 전비로 예산의 대부분을 쓰는 바람에 자국민을 제대로 못 먹였던 시기였기 때문에 예산이 충분치 못하여 교육의 질은 별로 좋지 못했다[* 당시 일본은 전비만으로 국가 예산의 80% 넘게 쓰고 있는 상황이었고 1940년대가 되면서 국가 예산의 98%를 전비로만 사용했다.]. 그리고 이런 모든 정책은 성인들의 문자 해독 능력을 향상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서 성인층의 문맹률은 여전히 매우 높았다. 일제는 한글 문맹 퇴치에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특히 1940년대에 조선어 교육이 완전히 금지되면서 한글 문맹이 더 늘어났다. 그 결과로 [[1945년]] [[광복]] 직후의 조선인(분단 직전)의 문맹률은 78%에 달했다.[* 1947년 미 군정청 조사 결과.] 이는 식민지배를 당했던 다른 국가에서도 마찬가지였으며 식민지 근대화론의 허구성을 보여준다. [[베트남]]에서의 문맹률은 1945년에 80% 후반에 달했으며, [[프랑스]]에게 지배당했던 [[알제리|프랑스령 알제리]]도 자원 배분을 [[피에누아르]]와 친불파[* [[세파르딤]], [[하르키]]]에게만 배분하여 대다수 아랍인들이 학교에 갈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대다수의 인구가 문맹이었으며, [[인도 제국]]도 인구의 80% 이상이 문맹이었다. 물론 예외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당시에는 드물었다. 총독부 후기에는 조선어 문맹률은 조사 대상에서 빠진다. 20년대 말부터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구독자 확대를 목적으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이는데, 자세한 통계가 남지 못했다. 그나마 이 문맹 퇴치 운동조차 [[조선총독부]]의 탄압으로 인해 중단되었다. 당시 문맹 퇴치 운동을 벌이던 조선인 지식인들은 혹시 독립운동으로 번질까 봐 기본적인 숫자 계산이나 글자 읽고 쓰기 말고는 가르치지 않는 쪽이었는데, 조선총독부는 그조차도 봐주지 않았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