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문맹 (문단 편집) === 조선시대 === [[조선]]시대에는 문맹률 통계조사가 실시되지 않아서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일단 인구조사부터가 철저하게 시행되지 못했다. 물론 인구조사를 정례적으로 시행하기는 했지만 군역이나 [[세금]]을 내는 걸 회피하려고 인구조사를 일부러 안 받으려 하는 사람들이 위낙에 많아서 인구통계자료의 정확성이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조선을 지배했던 국가 이념인 [[성리학]]에서는 원래 세금을 적게 걷는 것을 이상적인 통치로 간주한 반면, 호구를 철저히 조사하여 세금을 많이 걷는 것을 나쁜 정치라고 보았던 점도 유념해야 한다. 실제로 조선과 같은 시기, 중국 [[명나라]]의 재상인 [[장거정]]은 전국의 호구를 철저히 조사하여 세금을 정확하게 걷어서 무려 10년치 국가 재정을 마련했는데 이 점 때문에 오히려 엄청난 욕만 먹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엔 [[의무교육]]이 행정력의 부족과 예산 문제로 실시되지 않았다. [[서당]] 교육을 대대적으로 확대하자는 의견이나 [[의무교육]]을 시행하자는 의견 자체는 있었지만, [[의무교육]]을 시행하기에는 재정적으로 애로사항이 많았기에 실제로 시행되지는 못했고, 각 고을의 [[수령]]과 유향소의 [[유생]]이 서당 교육을 장려하고 보조하는 선에 그쳤다. 전국적인 의무교육이 제대로 시행되려면 1년에 적어도 수십만 권의 [[교과서]]를 [[정부]] 주도로 찍어내야 되는데, 당시에는 세율이 상당히 낮아서 심지어 사초에 쓰인 [[종이]]도 빨아서 [[재활용]]했을 정도로 재정에 여유가 없었다. 다시말해 교과서나 공책 등을 물려 쓰거나 했던 60~70년대 대한민국보다 더 심했던 것. 또한 현대의 교육과정과 같이 제도가 변하게 되면 이를 다시 해야하는 난관에 부딪힌다. 교통사정도 별로 좋지 않아 [[도로]]가 잘 닦여 있지 않았을 뿐더러, 당시에 초고속 이동수단(?)이었던 [[말(동물)|말]]이나 [[마차]]는 공무용 정도로나 쓰일 정도로 비싼 물품이었기 때문에 그 만큼의 물품을 옮기려면 품이 많이 들었다. 이렇게 [[조선]] 정부의 재정이 늘 풍족하지만은 못했던 이유 중 하나는, [[성리학]]에 근간을 둔 조선의 통치이념상 백성에게 세금을 많이 거두어 나라에 쌓아두는 것을 좋게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신대기근]] 항목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조선 정부는 예산을 지출하고도 남을 정도의 세금을 걷지 않았다. 낭비를 줄일 수 있었지만,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는 힘들었다. 또 조선시대엔 [[여자]]들이 일반적으로 [[서당]]이나 [[향교]]로 교육 받으러 가는 일은 없었다. 여성을 위한 서당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그 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최초로 여학교가 설립된 것은 1886년이다([[미국인]] [[감리회]] [[선교사]] [[메리 스크랜튼]] 부인이 세운 [[이화학당]]). 대다수는 [[홈스쿨링|집에서 한글을 익혔다.]] 게다가 "[[낫]]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도 전해져 내려오며, 당시의 기록이나 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설화나 민담 중에서도 글을 배우지 못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도 상당히 존재하는 걸 보면, 조선시대엔 문맹률이 높았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백성들이 아예 까막눈은 아니었던 듯 하다. 단지 양반처럼 문서를 작성하고 한시를 짓는 등의 한문을 쓰지 못했을 뿐 기초적인 한자를 읽는 것 정도는 일반 백성들도 할 수 있었다. [[한글]]의 경우 "[[낫]]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과 같이 한글조차 모르는 사람을 무식하다고 이야기할 정도로 상당히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르는 게 당연하면 속담이 생길 일이 없고 특이하게 무식하니 까내리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조선과 이웃 나라들>이나 스카스 게일의 <전환기의 조선>에는 하층민이 글을 읽을 수 있다는 기록이나 "[[중국]]이나 [[인도]]는 1,000명에 1명만이 글을 읽을 수 있는데 반해 [[조선]]은 읽기가 보편적"이라는 기록을 볼 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관아 또는 [[포도청]]에서 붙이는 방을 읽기 위해서 기초적인 한자독해는 필수적이었기에, 사극에서 나오는 것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도 기본적으로 한글과 [[천자문]] 정도는 떼었다고 볼 수 있다. [* 다만 천자문의 교재로서의 완성도는 낮은 편이라, 실용 한자의 습득률은 지역 [[훈장]]의 역량을 크게 탔을 것이다. 또한 1천자를 모두 뗐다기보다는 생활어휘 300-400자 정도 떼어 포고문 정도는 떠듬떠듬 읽을 수 있는 수준이다.] 1930년 국세조사에서 시행한 연령별 문맹률을 연령별 교육기간과 연계하여 역추산할 시, 조선후기 보편적인 교육을 받은 이들로 보이는 60세(1870년생 이전) 이상의 문맹률은 약 79%였다. 이정도면 전근대 기준으로는 훌륭한 편이나, 18세기부터 본격적인 근대교육이 시행되었던 국가들과 비교하였을 때에는 부족한 면이 없지 않아 있다. 하지만 조선 역시 근대교육을 실시한 19세기 후반부터는 식자율이 증가하여, 구한말 ~ 일제초기 초등교육을 받은 25세~39세(1891년~1905년생)의 식자율은 33.3%로, 이는 당대 중남미, 1870년대 일본이나, 18세기 프랑스와 유사한 수준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일제의 우민화 교육의 실태를 은폐하기 위해서 일제 강점기 문맹률이 이전 문맹률 보다 향상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아무런 근거가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