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오사화 (문단 편집) === 김일손 저술의 문제점 === 김일손 일파의 문제점은 두 가지인데, 바로 자신들이 못마땅해하는 세조와 그 후손들인 국왕들에게서 봉록을 받아먹는 관료 생활을 했다는 것과, 세조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글을, 그것도 국가의 공식 공문서이자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에 들어갈 자료인 사초에 적었다는 점 때문이다. 이 중에서도 진정한 문제는 후자의 사초 문제. 전자는 당대의 유교 윤리상으로 문제가 된다면, 후자는 현대인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된다. 김일손 일파는 속으로는 "세조는 왕이 아니라 모리배들이 세워준 우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론 아무렇지도 않게 세조가 주는 벼슬을 받고 국가의 녹을 먹어온 것이다.[* 비록 소설이지만 [[육신전]]에서 세조가 "네가 지금 나를 '나으리'라 하는데, 그러면 내가 준 봉록은 왜 먹었느냐?"라고 묻자 "나으리가 준 녹(봉급)은 하나도 먹지 않고 우리 집 창고 안에 고이 쌓아 두었소이다"라고 대답했는데 조사해 보니 과연 그랬다더라는 식의 일화가 있다는 점과 크게 대비된다. 참고로 육신전도 선조 때 박계현이 성삼문이 충신이라며 추천했지만, 선조는 그것을 읽은 후 대노하여 '''"책을 모두 거둬서 태워 없애고 이야기하는 자도 처벌해야겠다."'''는 발언을 했으나 신하들이 말려서 그만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게다가 이때 선조가 읽은 후 남긴 평 중에서 '''"춥지도 않은데 몸이 떨었다, 이 저자가 살아 있다면 내가 끝까지 추국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다."'''는 내용이 있었다. 한낱 소설인 데다 세조와 촌수가 꽤 벌어진 선조도 저렇게 격분했다는 것. 김일손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질렀는지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벼슬살이를 하면서 그 관직을 이용해 몰래 [[비난]]을 일삼아 온 셈이었다. 이것은 기군망상(欺君罔上, 임금을 속이고 윗사람을 농락함.)의 죄로, 당연하게도 전근대 시대엔 대역죄나 다름없었다. 당장에 김종직의 제자라던 표연말과 홍한이 군사부 일체를 버리고 스승을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이미 사태의 심각성이 극에 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는데, 세조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생각을 품었거나 비슷한 내용의 의견을 표출했더라도 그 방식이 '관료'로서가 아닌 '선비', 즉 지식인 개인으로서의 모습이었다면 문제의 성격이 조금이나마 달라졌을 것이다. 그 역시도 결국엔 국왕과 왕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발각되었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웠을 테고,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은나라]]나 [[고려]] 왕조가 멸망한 이후 신왕조의 개창에 참여하지 않고 은둔한 선비들이 그 나름대로 추앙받았던 것처럼, 비록 현 정권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내용의 절개라고 해도 그 절개 자체는 아름답게 여기는 인식이 유교 전통 내에서는 확실히 있었다. 조선의 국왕인 [[태종(조선)|태종]]이 새로운 왕조 조선을 위해 일해달라는 국왕의 명령을 거역하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논지로 조선 왕조 자체를 부인하면서 낙향한 [[길재]]를 직접 높이 평가해줬던 일 등등을 생각해 보면, 조선에서도 관료가 아닌 사람들의 사상은 반란 수준이 아니라면 상당 부분을 보장해주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단종의 죽음과 그 지지자들의 죽음은 수백\년이 지난 후에도 다들 억울하다고 여겼던 걸 감안하면 일개 선비로서는 충분히 그런 기록을 남길 만했다. 실제로 이렇게 단종에 대한 의리를 지켜 벼슬을 버린 이들은 [[생육신]]이라 불리면서 후일 시호를 받거나 추증을 받는 식으로 절개를 인정받았다. 문제는 세조 비판 세력의 경우 대체로 세조 정권기 및 그 이후에 벼슬에 올라 녹봉을 받으며 일을 했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한 논쟁이 [[사육신]]들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논쟁에서도 소개되어 있어서, 이들에 대한 복권이 꽤나 나중인 조선 후기에나 이루어지는 배경 겸 원인으로도 작용한다. 선조 때 사육신을 재평가해서 복권시키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선조가 "헐 세조 밑에서 벼슬하며 봉록 먹어놓고 이 짓 했는데 뭔 헛소리?"라면서 씹기도 했었다.[* [[육신전]]의 내용을 보더라도 "너희는 내게 칭신하고 내가 준 녹봉을 받지 않았느냐"는 세조의 힐문에 "공문 다시 읽어봐라. 신(臣) 자가 아니라 거(巨) 자 썼다" 라거나 "니가 준 녹봉 받기만 하고 하나도 쓰진 않고 창고에 고대로 쌓아놨으니까 확인해 봐라"고 답변하는 등 거의 말장난처럼 보이는 대답을 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은데, 사실 육신전을 쓴 남효온 본인도 저런 변명이 구차한 말장난임을 몰랐을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유교적 윤리관에서 차라리 군주를 섬기기 싫어 낙향을 하면 했지, 일단 섬기면서 두 마음을 품었다는 것은 정당화가 거의 불가능한 치명적인 도덕적 결함이었기에 이런 결함이 있다고 인정하면 도저히 사육신을 긍정적 주동 인물로 만들 수가 없었고, 정 긍정적 주동 인물로 등장시키려면 구차한 말장난과 억지 변명으로라도 이 흠을 부정해야만 했다는 것.]. 또한 [[이황]]이 [[조식(조선)|조식]]에게 비난받았던 이유도 "처사라는 것이 벼슬할 거 다 했는데 뭔 놈의 처사?"였던데, 이처럼 처사가 절개를 지킨다는 명성을 얻기 위해선 벼슬을 안 하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근데 김일손 일파는 둘 다 얻으려고 했으니까 문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아무리 세조가 [[계유정난|가장 정당성 없는 쿠데타]]를 일으켰대도 왕실 입장에서는 이를 그대로 넘길 수 없었다. 연산군은 세조의 증손자고, 세조는 당시 중흥의 선조로 취급받았으며, '''단종 비 [[정순왕후(조선 단종)|정순왕후]]가 그 시점에도 살아있는 등''' 끽해야 2세대쯤 전의 사건이었다. 또한 그 당시에 단종은 노산군이라 불렸으며, 노산군에 대한 첫 제사를 국가에서 지내 준 것이 중종 대이고, 그때까지 남아있던 왕실 명부 선원록에서 노산군의 이름을 뺀 것도 중종 대다.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위된 것은 수백 년 후인 [[숙종(조선)|숙종]] 시대의 일이었고[* 단종으로 복권되고 사육신이 복권된 이후에도 김종서, 황보인 등은 바로 복권이 되지 못했다. 그들이 복권된 것은 한참 더 지나서 영조 때였다.], 그 무덤이 폐허가 된 것은 임진왜란을 거치고도 아무도 관리해 주는 사람이 없어서였다. 그리고 '''세조 이후대의 국왕들 모두가 그 세조의 자손들이자 후예들이다.''' 숙종 때 노산군이 복권될 당시에 단종 복위를 주청한 집권 세력도 노론과 소론 등등의 서인계 붕당들이었는데 이 '''서인계 붕당들도 세조를 왕위에 올리는 데 큰 공을 세운 훈구파의 후신 붕당'''[* 기성 사림, 온건 사림, 노당, 대윤, 소윤이 합당을 하면서 서인이 된 듯하다.]이기도 했다.[* 효종 때 서인 산당의 영수인 [[김집]],그리고 현종, 숙종 때 서인의 핵심 인물인 [[김만중]], [[김만기(조선)|김만기]], [[김익훈]], [[김만채]], [[김진구]], [[김진규]] 등은 훈구파 대신 [[김국광]]의 후손이고 게다가 기묘사화에 동조한 [[김극핍]]과 을사사화를 부추긴 [[김명윤]]과도 가족 관계로 연결되어 있으며, 또한 송시열의 수제자 [[김수항]], [[김수흥]], [[김창집]]도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학조대사의 후손이었다. 그 외에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신익상]]도 [[신숙주]]의 후손이었다. 또한 숙종 때 송시열의 강력한 수제자였던 [[이단하]]와 [[이여]]도 중종 때 [[단경왕후]]의 신원을 반대한 [[이행]]의 후손이었다. 특히 그들은 을사사화의 주범인 [[이기]]와도 관련이 있다. 그리고 [[김수항]] 가문은 [[인목왕후]]-[[김제남]] 가문과 인척인데 [[김제남]]의 선조 역시 기묘사화에 동조한 [[김전]]이었다. [[김전]]의 후손들도 대부분 서인이 되었다.][* 더군다나 그 당시 서인의 명문가들은 거의 대부분 훈구파의 후손들이 대부분 많았다. 게다가 [[이이명]], [[이사명]], [[이건명(조선)|이건명]], [[이관명]] 등의 선조도 [[단종복위운동]]을 고발한 [[정창손]]과 인척으로 얽혀져 있다. 또한 서인이 추진하는 국혼산림이나 혈연관계도 대부분 훈구파의 국혼정책이나 혈연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당시 김일손의 행동은 '''왕실을 능멸한 행위'''였다. 한마디로 왕실에게 있어서, 김일손의 행동은 왕실 전부가 반란의 무리들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연산군 개인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감히 증조부를 모욕한 [[역적]]'''이나 다를 것이 없었다. 게다가 숙종 때 노산군이 단종으로 복권될 때 그것을 강력히도 주청한 [[송시열]]이나 [[권상하]] 등도 '''세조의 즉위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고, 단종 사사도 세조의 본뜻이 아니라고 주장했었을 정도다.'''[* 조선 후기에 단종이 복권되기는 했지만, 그때만 했어도 세조를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의견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대신에 우유부단한 행보를 보이기는 했지만 나름 능력이 뛰어나고, 업적도 제법 있는 [[신숙주]]가 변절자로 타겟이 잡히면서 집중적으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세조가 본격적으로 비판받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는데, 독재 정권이 끝난 이후로도 세조를 미화하는 드라마들이 여러 차례 방영되었기 때문이다. 정작 [[권상하]] 등의 노론 대신들은 동시대에 제기된 단경왕후 추숭에는 반대했다.][* 그 당시에 단경왕후 추숭론도 제기되었지만 별전을 지어주는 선에서 끝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신수근]]의 후손들은 대거 남인계 인사가 되는데, [[이서우]], [[윤휴]], [[권대운]], [[목내선]], [[목창명]], [[민희(고려)|민희]], [[허목]], [[허적]], [[홍우원]], [[이원정]], [[이담명]], [[오정창]], [[오시수]], [[오시복]] 등 남인계 인사들과의 교류가 잦았다. 당연히 [[송시열]] 등의 서인 세력과는 악연이 있을 수밖에 없다.(서인 대신들 중에는 공신들의 후손들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 낮은 관직에 있었거나 한직, 말단 지방관 등의 벼슬을 지니고 있었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자제했기 때문에 남인 세력이 실각한 환국에 연루되지 않았고 가문이 화를 입지 않았다.(그것으로 보면 남인이 최초로 집권한 갑인예송과 남인이 재집권한 기사환국 이후에도 중앙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는 거다.) 그나마 단경왕후가 숙종 때 별전이 지어지고 영조 때 복권된 것도 신수근 후손들이 남인이면서도 높은 벼슬이나 중앙관직에 나서지 않고 정치적인 활동을 자제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지, 만약 신수근 후손들이 높은 벼슬을 얻고 중앙 관직에 나섰거나 정치적인 활동을 전개했다면 신수근의 후손들은 노론 세력에게 사문난적으로 찍히거나 간흉, 흉물로 간주되거나 그게 아니어도 크게 비난을 받는 상황에 처해서 단경왕후 신원은 이뤄질 수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중앙 관직에 진출했거나 고위직에 오르거나 정치 활동을 활발히 전개한 남인 인사들([[허적]], [[허목]], [[윤휴]], [[권대운]], [[목내선]], [[김덕원]], [[이원정]], [[오정창]], [[민암]], [[오시수]], [[홍우원]], [[유혁연]], [[이서우]], [[이담명]], [[유명천]], [[유명현]], [[심재]], [[이우정]])은 남인이 몰락한 뒤에 노론 세력으로부터 큰 비난을 받고 정치적인 수난을 많이 겪었는데, 그뿐 아니라 그 후손들은 관직에 나서지도 못했다.][* 우암 송시열의 경우 단종 복권과 김종직 추증에는 찬성을 넘어서 열렬히 추진을 했었지만 단경왕후 추숭에는 좀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숙종이 민회빈 강씨를 사면시킨 것처럼 그냥 깔끔하게 정리하는 경우도 있었긴 했지만 이것도 결국 왕이 결단을 해서 가능한거였다. 결국 왕이 마음에 있지 않는 이상 언행은 조심스러워야 한다. 게다가 해석 여지에 따라서는, 아예 '''세조의 뒤를 이은 왕통까지도 부정한다'''는 혐의까지 받을 수 있다. 《조의제문》이 무오사화에서 핵폭탄급의 위력을 발휘했던 게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더불어서 마찬가지로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과 유사한 내용인 화술주시까지 발견되면서, 그야말로 연달아 사림 세력들이 터지는 계기가 되었다. 그 말은 사림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대간들이 터져나가게 되었다는 뜻도 된다. 정리하면 김일손의 혐의는 기군망상, 근거 없는 소문으로 사초를 훼손한 죄, 선조를 모욕해 왕실의 정통성을 부정한 역모죄의 세 가지이며, 하나하나가 극형에 처해질 만한 수준이다. 이러니 연산군이 흉폭하거나 옹졸한 인물이라서 김종직을 부관참시할 것을 명했다고 볼 수 없다. 그게 누구든지 간에 전근대 시대 국왕이라면 왕실을 능멸한 반역자들에겐 인정사정 안 봐주고 이런 조치를 취하는 게 당연했다.[* 중국 [[청나라]] 명군 [[순치제]]는 반역 혐의와 황실 능멸 행위를 한 [[도르곤]]이 죽은 뒤 부관참시했고 아들인 성군이었던 [[강희제]]도 [[삼번의 난]]을 일으킨 [[오삼계]]를 난이 평정한 후 그의 시체를 [[부관참시]]한 사례도 있다. 심지어 강희제는 사형에 대해선 굉장히 신중해서 제위 중에 '''전체 중국에서''' 사형시킨 사람이 100명도 안 되는 해도 많았다. 당시 중국 인구는 억 단위 가까이 되었음에도 말이다. 그런 강희제가 부관참시까지 했다는 얘기다. 거기다가 강희제는 오삼계의 일족들도 멸했고 마찬가지로 주요 가담자인 경정충의 일족 역시도 멸족했다. 그리고 왕을 살해하거나 반란을 일으키는 것만이 반역죄로 다스리는 행동이 아니였다. 군주가 [[명군]]이거나 [[성군]]이더라도 임금과 왕실을 모욕하는 글을 쓰면 반역죄로 다스렸다. 그 예로 [[영락제]] 시절 방효유가 영락제를 연적찬위라고 가리키며 역적이라고 모욕하는 문장을 쓰자 분노한 [[영락제]]가 방효유의 십족을 몰살시킨적도 있고, [[문자의 옥]]이라 하여 [[강희제]]와 [[옹정제]]도 반체제가 쓴 글이 파자하면 반역에 가까운 글이라 역모죄로 다스렸다. 조선의 [[영조]]도 자신이 형 [[경종(조선)|경종]]을 독살했다는 글을 쓴 준론의 잔당들과 [[나주괘서사건]]의 주모자들을 역모죄로 다스렸으며, 영조의 손자인 [[정조]] 역시도 자신을 모욕한 글을 쓴 [[김하재]]를 역모죄로 처벌했다.] 더군다나 [[연산군]]은 이때까지만 해도 폭군이 아니라 정상적이고 개념적인 군주였다. 그리고 성종의 아들인 연산군 입장에서는 김종직이나 김일손을 불쾌하고 혐오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는데, 세조한테 [[개소리]]하면서 대들다가 털린 김종직[* 세조가 실무능력을 위해서 문관들에게 잡학 7학을 가르쳤는데, 이것을 선비의 일이 아니라 부당한 일이라면서 반대하다가 파직되었다.]을 아버지가 성은을 베풀어서 중용해 줬는데, 이따위 글이나 쓰며 그 선왕의 조부를 모독하고 있었으니 [[배은망덕]]한 자들이라고 치를 떨 만도 했다. 김일손의 동기인 표연말과 홍한이 스승인 김종직을 대역죄로 다스리라고 다른 대신들처럼 적극적으로 요청한 것과 가장 온건한 의견을 낸 사람들이 김종직에게 [[거열형|찢어 죽이는 형벌]]을 내려줘도 마땅찮다는 이야기를 한 게 괜한 일이 아니다. 나중에 [[중종반정]]으로 즉위한 [[중종(조선)|중종]]도 확실히 이 일이 떨떠름했는지, 김종직과 김일손을 신원할 때에도 그 두 사람은 성종한테 죄를 지었다고 밝혔고, 나중에는 위 소문의 제공자였던 허반의 딸에게 [[노비]]를 주는 건의를 거부하거나 유자광을 다시 공신으로 복권시키기도 했으며, 그 이후엔 무오사화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이극돈[* 전술했듯이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삭탈관직을 당해야 했었다.]도 신원해 주려다 실패하는 등등[* 중종실록 1511년 06월 16일 기사.] 무오사화를 불편하게 본 행동들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중종은 연산군의 동생이자 성종의 적차자로 똑같이 세조의 증손자인지라 조상을 모욕한 사건을 그냥 봐줄 수 없었을 것이다. 중종 때 거짓말[* 김종직과 김일손의 복권을 주장하던 신료들이 성종도 조의제문을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와 달리 이 일이 성종 생전에 그의 귀에 들어갔다면, 평소 신하, 특히 터무니없는 것조차 꼬투리 잡아 괴롭히던 대간들에게 마지못해 져주던 성종이라도 조용히 넘어갈 가능성은 극히 낮았을 것이다. 성종은 정통성 문제로 평생 골머리를 잡던 인물로, 할아버지의 정변은 둘째 치고 왕위 계승 3순위였던 처지에 [[제안대군|1순위]], [[월산대군|2순위]]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태로 왕이 되어서 더 그랬다.[* 2순위인 친형 월산대군은 의경세자의 장남이며 1순위 제안대군은 '''[[예종(조선)|선왕]]의 적장자다.''' 이런 둘을 제치고 성종이 즉위한 것은 순전히 [[한명회|장인]]을 잘 둔 덕이었으니 골머리를 앓는 건 당연하다.] 이런 와중에 일족의 역린을 건드리다 못해 뽑으려 드는 이런 글을 알았다면 분노는 둘째 치고 이 기회에 대간들 눈치 안 보고 왕 노릇 좀 해보자는 생각으로 인정사정없이 숙청했을 것이다. 특히 말년의 성종은 사림의 악다구니와 30대 후반이라는 원숙한 나이 덕에 대간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일이 늘어나는 등 대간들이 '우리 전하께서는 이전과 다르게 엄청 변했어요.'라고 할 만큼 달라졌다. 더군다나 성종이 별것도 아닌 일들로 억지를 부리며 대드는 대간들을 그냥 넘어간 건 그들이 성종이 중요시하는 유교적인 도덕률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위에서 언급한 다리가 세 개 달린 닭이 태어난 일에 대해 왕의 탓이라고 대간들이 따지자 미신을 가지고 그런다며 불쾌해했으며, 반대로 유교적 도리를 어겼다고 판단된 [[폐비 윤씨]], [[어우동]]에 대해선 법을 무시하면서 극형을 내렸다. 성종의 이런 행적을 보면 무오사화마냥 유교적 군신 관계에 배치되면서 자신의 정통성과 생존을 위협하는 사건에 성종이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가능할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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