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오사화 (문단 편집) == 배경 == 먼저 당시 국왕 [[연산군]]과 대간들의 관계를 알아볼 필요가 있다.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당시의 임금이었던 연산군은 아버지 성종의 통치 방식에 대하여 강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 바로 성종이 대간이 간하는 일이라면 비합리적이고 이치에 어긋나도 다 들어주었다는 것. 연산군의 아버지 성종은 어린 나이와 낮은 계승 순위에도 훈구파의 힘을 빌려 용상에 앉은 임금이라 초창기에는 훈구파가 국정을 총괄했었다.[* 사실 세조도 말기에 신공신들을 요직에 앉혀서, 구공신들을 견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으며, 예종도 어떻게든 공신들을 견제해 보려고 했지만 역시 실패를 거듭했다. 이에 성종은 공신들을 견제하려고 사림파들을 등용시킨 것이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친정을 하려니 훈구파의 세력이 자기가 어떻게 손을 쓰기 힘들 정도였던 터라 그들을 상대할 무기로 사림들을 대간에 배치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성종 옹립에 앞장섰던 [[한명회]] 등의 원로 훈구 대신들이 하나 둘 나이가 들어 죽고,[* 세조 시대 거물들 중 청렴결백했고 당시 대신 중 유일하게 뇌물을 받지 않았다는 [[구치관]]은 성종 1년(1470년)), 세조의 큰 처남이자 정희왕후의 오빠인 윤사분과 정희왕후의 인척이자 한명회의 친척인 한계미는 성종 2년(1471년), 장원급제자 출신의 [[최항(조선)|최항]]과 안순왕후의 아버지이자 예종의 두 번째 장인이자 세조의 사돈인 한백륜과 정희왕후의 인척인 성봉조는 성종 5년(1474년)), 세조의 왼팔이었고 능력만큼은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신숙주]]와 살인마 정승이라고 불렸던 [[홍윤성]]은 성종 6년(1475년), 세조에게 총애받았던 재정관료 출신인 조석문과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학자 출신이자 훈구파의 브레인이던 이석형은 성종 8년(1477년), 신숙주의 처남인 윤자운과 훈민정음을 창제했던 집현전 대학자 출신이자 역시 훈구파의 원로였던 정인지와 사육신의 단종복위운동을 고발한 김질은 성종 9년(1478년), 훈구파의 원로이자 핵심인물인 김국광과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서원군의 사위인 현석규는 성종 11년(1480년), 무관 출신의 중신이자 왕실의 인척이던 박중선과 훈구파의 핵심 중진인 정효상은 성종 12년(1481년), 정희왕후의 인척이자 한명회의 친척이던 한계희는 성종 13년(1482년), 서화와 문장이 뛰어났던 학자 출신인 강희맹은 성종 14년(1483년), 훈구파의 중진인 이승소와 성종의 총애를 받은 중신인 성임은 성종 15년(1484년), 세조의 작은 처남이자 정희왕후의 동생이던 윤사흔은 성종 16년(1485년), 정희왕후의 인척이자 한명회의 친척이던 한계순과 이계전의 아들인 이파는 성종 17년(1486년), 훈구파의 수장 격인 [[한명회]]와 사육신을 밀고한 원로 [[정창손]]은 나란히 성종 18년(1487년)에 세상을 떠났다. 이후로도 음서 출신으로 요직을 했던 권감이 같은 해에 세상을 떠났으며, 조선 초기의 대학자이자 많은 문집과 시를 남겼고 많은 역사서와 저서를 남긴 [[서거정]]은 성종 19년(1488년), 성종의 총애를 받았던 사람이자 훈구파 내에서 개혁적인 성향을 보이고 관료로써 뛰어난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인 정난종과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사람이자 뛰어난 무술실력을 가진 무관 출신의 대신인 어유소는 성종 20년(1489년), 정희왕후의 측근이던 홍응은 성종 23년(1492년), 세조의 외숙부이자 소헌왕후의 남동생이던 심회는 성종 24년(1493년), 성종의 총애를 받은 사람이자 폐비 윤씨의 폐위를 반대했던 허종과 이극돈의 둘째 형인 이극증은 성종 25년(1494년)에 세상을 떠났다.] 또 대간들이 줄기차게 훈구 대신들을 까준 덕분에 훈구파의 힘은 예전보다 확실히 많이 약해지긴 했지만 부작용이 나타났다. 대간들의 발언력과 영향력이 성종의 통제권 밖으로 나갈 정도로 큰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에서 '대간'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면, 딱 4명만 검색어가 1천 건이 넘는데, '''성종''', '''연산군''', '''[[중종(조선)|중종]]''', 그리고 선조다. 중종이 9천 건이 넘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이 2천 건이 넘는 성종, 1500여 건이 연산군, 1천 건을 간신히 넘긴 [[선조(조선)|선조]]로 이어진다. 참고로 [[세조(조선)|세조]]는 100여 건 정도이고, [[태종(조선)|태종]]이나 [[세종(조선)|세종]], 재위 기간이 길었던 [[영조]] 등은 600여 건 정도이다.] 이로 인하여 성종은 재위 기간 내내 훈구 대신들과 대간의 사림파들의 틈바구니에 껴서 한쪽이 커지면 다른 한쪽을 키우는 식으로 줄타기를 하며 조선을 이끌었다. 비록 후대는 그런 통치 방식을 '왕권과 신권의 조화를 이루며 선정을 베풀었다'는 식으로 좋게 이야기해 주기도 하지만, 정작 성종 스스로는 "나는 명색이 이 나라의 왕인데 이렇게 신하들한테 시달리며 살아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재위 25년(1494) 시점에서는 짜증이 폭발했는지 대사헌이 "요즘 대간의 청을 물리치기만 하니 우려스럽습니다." 라는 불평을 했을 정도다. 성종이 30대 나이로 단명해서 그렇지 제외 말년에 기존과 다른 강경한 행보를 보여준 것을 보면 성종이 어느 정도 장수했으면 후반기에는 다른 행보를 보여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연산군 편에서, 즉위 초기 대간들의 억지를 봐 주지 않고 강경대응하는 아들 연산군의 모습을 성종이 내심 부러운 눈치로 쳐다보는 묘사가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은 아버지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성종이 대간에게 이렇게 고생을 한 건 전부 원래 왕위 계승자가 아니었던[* 선왕인 예종은 성종과 삼촌 관계에 불과했고 [[제안대군|예종의 적장자]]도 따로 있었는 데다가, 성종에게는 자기보다 연장자인 친형 [[월산대군]]도 있는 상황이었다.] 출신과 고작 13세 어린 나이에 즉위한 것에서 비롯됐지만, 연산군은 왕의 [[폐비 윤씨|정실 부인]]이 낳은 첫째 아들, 즉 적장자(嫡長子)였고 20세 나이에 즉위했다. 적장자라는 확고부동한 정통성에, 딱 좋을 나이에 즉위했던 것이다.[* 비록 모후인 [[폐비 윤씨]]가 폐위되고 사사된 몸이었다고 하나 연산군이 태어났을 때는 엄연한 국모였다. 그리고 성종도 이것이 연산군의 정통성에 흠집을 내지 않도록 신경을 많이 썼다.] 당시 '적장자 왕세자'라는 지위는 대의명분을 중시하고, 이때까지만 해도 적장자가 왕위에 오르는 경우가 거의 없었던 조선에서[* 우선 2대 임금인 정종 이방과는 태조 이성계의 차남, 3대 태종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의 5남, 세종은 이방원의 3남이었다. 그리고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 이유 역시 차남. 단종 이홍위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지 않았다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그저 왕자 신분으로 살았을 사람이었다. 게다가 연산군은 궁궐에서 태어난 첫째 아들이기도 했다. 조선 최초의 적장자 임금이었던 [[문종(조선)|문종]]은 세종이 사가에 있었을 때 태어났고, 문종의 외동아들이었던 [[단종(조선)|단종]]은 연산군 즉위 시점에는 반역자로, 폐위 상태였다. 연산군이 태어난 날 [[임사홍(조선)|임사홍]]은 "지금까지 세자 저하들이 모두 사저에서 태어나 이런 경사가 없었습니다" 라고 경하를 올렸다. 단종은 폐위 여부와 별개로 궁에서 태어났을 당시 세손이었으니 임사홍의 말은 사실이다.] 크나큰 메리트라 할 수 있었다. 추측이지만, 아마 이 때문에 연산군의 주변에서도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다음 왕위에 오를 게 확실한 왕세자 연산군을 떠받들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성장 환경 속에서 연산군 스스로도 왕과 왕족에 대한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자랐을 것이다. 쉽게 말하면 "내가 곧 조선"이라는 생각을 어려서부터 갖고 자랐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사실인 것 같다. 연산 10년 이후의 행적은 딱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 생각과 관점을 가지고 자라는 연산군의 눈에 '조선의 왕인 [[성종(조선)|아바마마]]께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별 시답잖은 것까지 이리저리 물고 늘어지며 지들 말 들으라고 설치는 대간 놈들'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상상에 맡긴다. 그 결과 대간에게 짜증과 울화통은 터뜨리더라도 직접적인 제재를 가하지 않고 그들의 악다구니를 결국은 다 들어주었던 아버지 성종[* 성종 문서에 자세히 나와 있지만 대간이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키워주고 밀어준 게 성종 본인이었던 탓도 있을 것이다.]과 달리, 연산군은 대간들의 말이 자신의 생각과 이치에 맞지 않으면 매우 단호하게 물리쳤다. 이에 대간들은 연산군을 길들여 보겠다고 평소 같으면 가만히 둘 문제까지 거의 게거품을 물며 덤벼들었다. 연산군 즉위 초기의 기사를 보면 대간들은 연산군 즉위 초기에 소위 '신고식 모드'에 들어갔다. 즉위 직후부터 연산군이 아버지의 묘호를 정하는 문제에서 대간은 '인'을 주장했고, 대신은 '성'을 주장했는데 '성'이 받아들여졌다. 그러자 대간들이 '성'을 주장한 대신들을 처벌할 것을 요구했다. 대간의 존재 이유는 언로(言路)를 열기 위함이고, 언로를 열려면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 시작이다. 그런데 이들은 단지 연산군의 주장을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처벌을 주장한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은 자신들이 의견을 낸 것에 '''처벌'''이 아니라 '''기각'''된 것만으로도 언로를 막는다며 '''성종''' 때부터 반대했던 이들이다.[* 당연한 소리지만 대간의 존재의의는 일의 '''집행'''이 아니다. 의견을 내고 조언하고 자문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결정은 왕이 하고 정책에 도움을 주는건 정승과 판서들이다. 대간들의 의견은 참고나 반영만 할 뿐 이들의 의견을 주류로 택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애초에 그럼 의정부와 육조가 있는 이유가 없으니까. 그런데 대간은 자신들의 권한을 넘어 타 부서의 권한까지 범하는 짓을 저지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윗사람을 능멸하는 풍조(능상)'를 혐오하는 개인적 성향을 지닌 데다 임금이 하는 일에 무분별하게 태클을 걸던 대간들에게 강한 불만을 갖고 있었던 연산군과, '임금이 나쁜 길로 빠지지 않게 견제해야 한다'는 명분 아래 조선 역사상 가장 대간들에게 관대했던 성종 치하 25년에 익숙해진 나머지 시시콜콜 잔소리를 매우 위험한 수위로[* 돌보다 값이 싼 구리로 만든 수로를 보고 밑도 끝도 없이 사치스럽다고 주장하여 '''이미 다 만들어진 구리 수로를 철거하고 돌로 새로 만들게 하지'''를 않나, 다리 셋 달린 닭이 태어난 것도 아무튼 왕 잘못이니 반성하라고 하지를 않나, 하여간 대간들은 온갖 트집이란 트집은 다 잡아가며 성종에게 악다구니를 써댔다. 물론 유교 사상이 지배하던 조선에서는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나면 뭐든지 왕을 탓하는 구조이긴 했다. 재이론에 따라 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이게 왕이 뭘 못해서 그러는 거다 식으로. 다만 보통 특이한 동물이 태어났다 같은건 그 사실만 기록하고 딱히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숙종 년간에는 기형 고양이가 태어났다는 기록이 여러건 등장하지만 그냥 그런 고양이가 태어났다 정도 이상의 의미는 없었다.] 해댄 대간들은 필연적으로 타협할 수 없는 존재였다. 이 때문에 연산군 초기의 국정은 혼란스러웠다. 당시 인사 업무는 최종적으로 대간이 동의해야 확정되었는데 대간들이 툭하면 연산군이랑 싸우면서 총파업을 해대니 인사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러니 행정이 제대로 될 리가. 그나마 실무적인 부분은 잘 굴러가서 백성들의 삶은 괜찮았다고 하는데, 이게 우리들에겐 놀라운 일로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어디까지나 연산군이 자제를 하면서 국정을 운영하였기 때문이다. 연산군과 대간들의 대립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가 연산군이 즉위한 해인 1495년에 벌어졌던 [[불교]] 문제이다. 연산군은 즉위 초기에 아버지를 위해서 '수륙제'[* 水陸祭.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 의식이다.]를 지냈다. 이 수육제는 조선이 개국한 이래 모든 왕들이 다 지냈고, [[숭유억불]](崇儒抑佛)의 기치 아래 불교 타도를 외쳤던 신하들도 자신들이 죽을 때는 공공연하게 지냈으며, [[인수대비]]까지 찬성한 일에[* 왜 인수대비가 의견을 냈냐면 결심이 서지 않았던 연산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대비를 찾아가 의견을 구했기 때문이었다.] 대간들이 벌 떼같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물론 인수대비가 이전에도 강력하게 불교를 옹호했기에 잔뜩 긴장했을 수는 있겠다. 당장에 몇년 전 있었던 금승법 제정때도 대비와 대신, 대간이 충돌했다.][* 연산군일기 연산군 즉위년(1494) 12월 26일 [[http://sillok.history.go.kr/id/kja_10012026_005|기사]]] 심지어 [[성균관]] 유생들까지 상소를 올려서 연산군을 거든 [[노사신]]을 파직시킬 것을 상소하였다. 연산군은 상소가 과도하다하여 성균관 유생들을 모조리 하옥하고 추국하는데, 대간들이 성균관 유생들을 하옥하면 안 되고 대간들은 말을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하루에 한 번 정도 비율로 이어졌다. 다른 예로는, 훗날 [[중종(조선)|중종]]의 외숙부가 되는 윤탕로를 통해 불경을 편찬하게 하는데, 이 문제로 대간들의 반대가 다시 반복된 일도 있다. 그 외에 정미수를 당상관으로 임명하는데, 정미수가 [[문종(조선)|문종]]의 외손([[정종(부마)]]과 경혜공주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대간들이 반대해 몇 개월을 끌었다. 그 다음엔 [[정도전]]의 후손[* 정도전의 아들들 중 장남인 [[정진]]이 무인정사 때 유일하게 살아남았는데, 이후에 태종이 복권해서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 정진에겐 정래와 정속이란 두 아들이 있었고, 정문형은 이 중 정속의 아들이다. 즉 정문형은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을 우의정에 임명하는데 이것도 결사반대로 또 몇 달을 끌었다. 대간이 이때 이유랍시고 들이민 건 그냥 '특별히 공을 세운 게 없다'라는 이유뿐이었다. "[[정도전]]은 감히 종친들을 해치려 한 자[* 후대 사람들의 오해와는 달리 정도전은 태종 및 그의 세력에게 철저히 폄하당하긴 했지만 명백한 반역자로 취급당하지는 않고 종친 모해죄, 즉 왕자들을 비롯한 종친들을 해치려 했다는 살짝 어정쩡한 죄목이 걸렸다. 정도전의 후손들이 [[연좌제]]에 걸리지 않고 무사히 벼슬에 오를 수 있던 것도 이 때문이다.]로 [[무인정사]] 때 [[이방원|태종대왕]]께서 친히 처단하신 자입니다. 그런 자의 후손을 중용하는 건 안 됩니다."같은 것도 아니고. 이게 왜 문제냐 하면, 왕조 시대에 왕이 한번 내린 결정은 쉽게 되돌릴 수가 없다. 그 자체가 왕이 잘못을 범했음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 왕의 권위 자체에 큰 흠이 되기 때문이다. 다음 왕으로 넘어가 버리면 "자식인 현왕이 아버지인 선왕의 흠을 드러낸다=불효하는 왕"이라는 논리로 더더욱 큰 결점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큰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고 '큰 공이 없다'는 어이없는 이유로 왕이 직접 내린 인사 결정을 되돌리라고 요구하는 것은 연산에게는 "우린 당신의 권위 따위 우습다"는 뜻으로 보이게 된다. 연산군도 이에 대해 답답해하며 "지금 의논하는 걸 보니 정문형이 어떤지는 말도 하지 않고 대간들의 말만 나오고 있다. 내 말은 우습게 여기고 대간들은 두려운 건가?"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연산군일기 13권, 연산 2년 3월 29일 정미 3번째기사) 그 다음에는 노사신에 대한 탄핵이 다시 몇 개월. 대충 이런 식이었다. 문제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적장자 [[왕세자]]로서 [[자부심]]이 강했으며 아버지가 대간들에게 휘둘려서 아무것도 못 하는 것을 보아왔던 연산군과, 말발과 비판이 자신들의 존재 근거라고 믿었던 대간들 사이에서 양보란 곧 죽음이라는 것.[* 아닌 게 아니라 성종 대에 좋은 대간이란 왕이 열 받아서 화내도 그러거나 말거나 바락바락 대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 온갖 구실로 엄청난 수위의 비판들이 왕에게 가해졌다. 성종 문서 참조.] 자연히 즉위 이후부터 성종과는 다르게, 대간에 대해서 강성(強性)인 연산군과 대간의 충돌은 당연한 것이었다. 연산군은 대간들을 하옥하고 정거[* 停擧. 유생에게 일정 기간 동안 과거를 못 보게 하던 벌로, 대개 과거 시험장에서 부정행위를 하다가 걸릴 때 내리는 벌이었다. 심할 경우 평생 과거를 못 보게 하는 [[영구제명|영영정거]](永永停擧)가 있었다.]하는 등 어느 정도 채찍을 쓰기도 했지만, 우의정 정문형의 임명을 취소하고 그럴 듯한 비판은 칭찬하는 등 당근도 많이 내밀었다. 노사신, 윤필상 등의 피혐[* 避嫌. 탄핵을 받은 자가 혐의가 풀릴 때까지 업무를 보지 않고 근신하는 것.]에는 "다 내 결정이었으니 내 책임이다"라고 보호해서 대신들과 사이가 좋았고, 승지급들을 매개로 대간의 제어를 시도했다. 하지만 대간은 여전히 기세를 꺾지 않았고, 이렇다보니 연산군의 성격이 아니라도 이런 식의 부드러운 대응에는 한계가 있었다. 비타협적인 삼사의 태도는 [[김일손]]과 [[김종직]] 등의 처리 문제가 정국의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을 때 자신들의 발목을 잡게 됐다. [[연산군]]과 훈구 대신들이 김일손과 김종직 등에게 적용한 범죄는 단연 '대역죄'였다. 연산군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이자 선왕 성종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세조를 모독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삼사는 이보다는 보다 더 온건한 쪽의 처결을 주청하며 다른 의견을 내버렸다.[* 물론 사안이 사안인지라 삼사에서 나온 의견 중 가장 약한 의견도 '''죽여 마땅하지만''' 이미 죽었으니 그럴건 없고 작호만 거두자는 것이었다. 삼사도 결코 분위기를 못 읽은건 아니었다.] 그러자 [[연산군]]은 삼사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대간 니네들이 김종직-김일손 무리와 같은 편인 게 아니라면 이렇게 나올 순 없다"면서 대간들을 김일손, 김종직과 연루시키며 삼사의 대간들을 마침내 직접 처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평소에 질려버릴 만큼 대간들에게 시달리던 훈구 대신들은 연산군의 대간 손봐주기에 적극 동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